[이상렬의 시시각각] 쉬운 일만 하다 시간 다 갔다
“죽도록 일해서 번 돈을 고스란히 대출 원리금 상환에 갖다 바치는 현실이 마치 은행 종노릇하는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이 전한 자영업자의 개탄엔 그들의 고단한 사정이 담겨 있다. 자영업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시기에 불황의 늪으로 빠져든 뒤 코로나 때 무너졌다. 이제는 고금리에 짓눌려 있다. 요즘 웬만큼 신용 좋은 이도 대출 이자가 연 6%를 훌쩍 넘는다.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라도 갚으려면 영업이익이 그만큼 나야 한다. 하지만 대기업도 영업이익으로 이자 감당을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코스피 상장사 613개 사의 올해 3분기까지 누적 영업이익률이 4.5%에 불과하다. 국내 대형마트 1위 이마트의 3분기 영업이익률(별도 기준)은 2.5%. 중소 자영업자는 오죽할까.
사실 은행을 윽박질러 번 돈을 토해내게 하는 것, 대출 기한을 연장하고 고리 대출을 저리로 대환하게 하는 것 등은 쉬운 일이다. 인허가·규제 산업 속성상 은행은 감독 당국 말을 듣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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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영업자 구조조정 미루지 말고
취약층 위축된 급전 통로 살려야
시장원리 입각한 경제운용 필요
」
문제는 그런다고 해서 자영업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영업자 수는 너무 많고, 경기는 너무 나쁘다.
자영업자 가운데 세 개 이상 대출을 보유한 다중채무자는 올 2분기 말 현재 약 178만 명. 대출 잔액이 약 744조원인데, 이 중 13조원이 연체됐다. 역대 최대다. 연체액은 1년 전(약 5조원)의 2.5배로 늘었다. 자영업 부채는 2000년대 초반 신용카드 사태 때처럼 눈덩이 구르듯 커지고 있다.
문제를 풀려면 자영업 경기가 확 좋아지거나 구조조정이 빨리 이뤄져야 한다. 손님도 매출도 없는데 빚으로 연명하고 있는 이들이 자영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전직 지원 프로그램이 국가 차원에서 가동돼야 한다. 금융 당국은 물론 기획재정부·산업통상자원부·중소벤처기업부 등 전 부처가 달라붙어야 한다.
윤 대통령은 불법 사채에 대해 “약자의 피를 빠는 악질적 범죄자들은 자신의 죄를 평생 후회하도록 강력 처단하라”고 했다. 옳은 방향이다. 수천·수만%의 이자와 인권을 유린하는 악랄한 추심은 피해자를 생지옥으로 몰고 간다. 불법 사채를 뿌리 뽑는 것은 국가의 책무다. 검경의 수사와 단속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몇 백만원의 급전을 제도권 금융에서 구할 수 있어야 취약계층이 불법 사채를 거들떠보지 않게 된다.
정책금융만으론 부족하다. 취약층의 마지막 급전 창구인 대부업계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대부업계는 급격히 돈줄을 조이고 있다. 금리 인상으로 자금 조달 비용은 비싸졌는데, 최고금리는 법으로 20%에 꽉 묶여 있어 대출에 ‘역마진’이 생기기 때문이다. 올해 대부업체 가계신용대출 신규 취급은 지난해의 4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2002년 연 66%이던 법정 최고금리는 그간 7차례에 걸쳐 인하됐다. 정권마다 서민을 위해 이자를 낮췄다며 생색을 냈다. 하지만 ‘순진한 금리’의 날벼락은 저신용자에게 떨어졌다. 대부업체에서 돈을 못 빌려 불법 사채시장으로 내몰린 저신용자가 지난해에만 최대 7만명이 넘는다는 추산(서민금융연구원)도 있다. 학계에선 대부업계가 영업할 수 있도록 최고금리를 시장금리에 연동하자는 의견이 많다. 금리 오른 것보다 급전을 못 구할 때 서민들 고통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결국 최고금리를 높이면 서민만 힘들어진다는 고정관념을 뛰어넘어야 한다.
경제 처방은 대개 쉬운 일과 어려운 일로 나뉜다. 많은 정부와 정치인이 쉬운 쪽을 택한다. 정부가 시장을 좌우하고, 대중에 영합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중소 상공인 형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최저임금을 왕창 올렸던 소주성도, 에너지 가격 급등에도 계속된 전기요금 동결도 그런 경우였다. 모두 국민 피해로 돌아왔다.
어려운 일은 개혁과 구조조정이다. 거센 반발을 뚫고 가야 한다. 경제를 시장원리대로 운용하는 것은 특히 어렵다. 그래도 그 길을 택해야 한다.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않고 구조개혁에 충실한 경제가 언제나 성공을 누렸다.
이상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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