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의 여섯 아내... 이혼 당하고 죽임 당한 그들의 반란 [난 네게 반했어]
콘텐츠가 넘쳐 나는 시대, 당신에게 딱 맞는 책이나 영화, 노래를 배달해 드립니다. 좋은 콘텐츠를 소개하면서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난 네게 반했어 챌린지'는 다음 필자를 지목하는 릴레이 연재입니다. 글의 마지막 부분을 주목해 주세요. <편집자말>
[리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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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해밀턴>의 북미 투어 공연 장면 |
ⓒ Joan Marcus |
뮤지컬 <해밀턴>을 제작한 린 마누엘 미란다는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요약했다. 10달러 지폐에 얼굴을 남긴 건국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정작 본인은 카리브해의 외딴섬에서 태어난 사생아 출신이었던 인물,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
얼핏 들으면 지루한 역사 이야기가 될 법도 하지만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초연 이래 전 세계를 휩쓸 수 있던 비결은 과거의 역사를 가장 현대적인 방식으로 21세기의 관객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해밀턴>은 인물 간에 말로 주고받는 대사가 거의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송스루 뮤지컬이면서, 동시에 노래 대부분이 힙합과 R&B, 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밀턴>은 작품이 만들어낸 사회문화적 가치와 영향력으로도 크나큰 대중적 지지를 받아왔다. 주인공을 비롯해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역사적 인물인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등 등장인물 대부분이 역사적으로는 백인임에도 불구하고, 주조연 배역부터 앙상블까지 적극적으로 비백인 배우들을 기용했다.
영미권 공연계에서 배우의 인종을 고려하지 않는 컬러블라인드 캐스팅(color-blind casting)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비록 현대 미국의 이민자와 실제 역사 인물 알렉산더 해밀턴이 완전히 동일한 위치의 '이민자'는 아니지만, '건국의 아버지'에게 '이민자'라는 소수자 정체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현대의 유색인종 배우들이 전달하게 함으로써 <해밀턴>은 21세기의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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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M(Black Lives Matter) 시위 현장의 모습 |
ⓒ Lee Chinyama/Pexels |
<해밀턴>은 아직도 혁명이 될 수 있을까?
알렉산더 해밀턴, 마르쿠스 라파예트 등 지금은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 혁명을 외치며 싸웠던 시절을 그려내는 만큼, 작중에선 혁명(Revolution)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강조된다. 2015년에 초연된 뮤지컬 <해밀턴> 또한 혁명 그 자체였다. '이민자'와 '비백인 유색인종'이 21세기 미국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전하는 <해밀턴>은 소수자의 목소리와 다양성 등 진보적 가치를 표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떨까. 2020년 브레오나 테일러와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BLM(Black Lives Matter,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은 전 세계를 휩쓸었고, 인종차별의 역사를 더욱 예민하게 되짚어 보자는 대중적 흐름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거센 시위의 물결 속에 노예 무역에 참여했거나 이를 지지했던 역사적 인물들의 동상들이 끌어내려졌다. 영국에서는 17세기 노예무역상 에드워드 콜스턴의 동상이 호수 속에 처박혔고, BLM 시위를 이끌어낸 흑인 여성 시위자를 본뜬 동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을 이끌었던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도 이제는 인종주의의 상징이 되어 수많은 논의 끝에 결국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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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밀턴>의 브로드웨이 초연에서 다비드 딕스가 토마스 제퍼슨 역으로 분한 모습.실제 토마스 제퍼슨은 노예 소유주이기도 했다. |
ⓒ Joan Marcus |
2020년, 뮤지컬 <해밀턴>의 브로드웨이 초연 실황이 영화로 제작되어 디즈니플러스에 공개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제작된 특집 <해밀턴: 역사가 지켜본다>에서, 초연의 주연 배우 레슬리 오덤 주니어는 한 학생에게 <해밀턴>을 두고 "나는 <해밀턴>이 전혀 혁명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미 너무도 많이 이야기된 백인들의 서사를 유색인종 배우들이 출연해서 똑같이 반복할 뿐이라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라는 질문을 받았음을 알렸다. 그는 해당 질문이 아주 흥미롭게 다가왔다는 소감과 함께 자신의 답변을 공유했다.
"내가 아는 건, 린(제작자 린 마누엘 미란다)은 자신의 진심을 담아 <해밀턴>을 써냈고 나는 그걸 믿고 참여했다는 거예요. 지금의 젊은 세대가 보기에 <해밀턴>은 구세대적일 수 있지만, 이건 긴 릴레이 중에서 우리가 달렸던 부분인 겁니다. 이제는 여러분 차례인 거죠."
한때 혁명 그 자체였던 <해밀턴>은 이렇듯 여러 비판을 마주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고한 인종차별과 이로 인한 유리장벽, 유리천장이 여전히 존재하는 공연계에서 비백인 배우들은 백인 배우들에 비해 한정된 기회를 얻으며, 논란을 피하기 위해 선심 쓰듯 한두 자리에만 토큰같이 주어지는 자리를 두고 서로 경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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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스 더 뮤지컬> 영국 투어 프로덕션 공연 장면 |
ⓒ Manuel Harlan |
"웰컴 투 더 쇼, 다시 쓰는 역사."
순서대로 '이혼-참수-사망-이혼-참수-생존' 순으로 왕비를 갈아치워 도합하면 무려 여섯 왕비를 두었던 잉글랜드의 헨리 8세. <식스 더 뮤지컬>은 이름처럼 헨리 8세의 '여섯' 아내들의 이야기다. 영미권에서 헨리 8세와 왕비는 우리에게 있어 장희빈과 인현왕후마냥 단골 소재로 사용된다.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다룬 작품에 항상 숙종이 등장하는 것처럼, 이 여섯 왕비들을 다룬 작품이라면 으레 헨리 8세에 초점이 맞춰져 있거나 적어도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드라마 <튜더스>와 영화 <천일의 스캔들>이 그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1800년대 제작된 오페라 <안나 볼레나>가 그랬듯이.
그러나 <식스 더 뮤지컬>에서는 헨리 8세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여성들만이 등장하는 무대. 이 작품에서는 여섯 왕비들만이 무대에 오른다. 심지어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도 전원 여성 뮤지션으로만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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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스 더 뮤지컬>의 한국 공연 제작사 아이엠컬처가 2022년 올린 오디션 공고문 중 일부. |
ⓒ 아이엠컬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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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9월 공개된 <식스 더 뮤지컬> 웨스트앤드 캐스트.논바이너리 퀴어인 베일리 칼슨과 클라우디아 카리우키는 'they' 대명사를 사용한다고 기재되어 있다. |
ⓒ SIX |
이 작품은 여성들의 이야기(her-story)면서 동시에 '트랜스젠더 친화적인(Trans-inclusive)' 프로덕션임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2022년 올라온 <식스 더 뮤지컬>의 한국 공연 오디션 공고도 이를 강조했고, 같은 해 런던 웨스트엔드 공연에서는 커밍아웃한 오픈리 논바이너리 배우인 베일리 칼슨과 클라우디아 카리우키가 각각 두 번째 왕비 앤 불린과 세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 역을 맡았다. 공식 계정에서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에 지지 메세지를 올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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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해밀턴>의 브로드웨이 초연 공연 사진. 중국계 미국인 배우 필리파 수가 일라이자 해밀턴 역을 맡았다. |
ⓒ Joan Marcus |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전할 이야기
※ 이 단락에는 뮤지컬 <해밀턴>과 <식스 더 뮤지컬>의 결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작품 안으로 들어가 보자. <해밀턴>의 주인공 알렉산더 해밀턴은 극이 전개되는 내내 자신의 이름과 명예가 유산(Legacy)으로 남아 후대에 전해지길 꿈꾼다. 그러나 수많은 정적을 만들었던 그는 결국 결투에서 총에 맞아 사망하고, 그렇게 이야기에서 사라진다.
실제 역사에서처럼, 극의 마지막에서 알렉산더 해밀턴의 서사를 전하고 유산을 남기는 것은 해밀턴의 아내 일라이자다.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고, 누가 당신의 이야기를 전하는가(Who Lives, Who Dies, Who Tells Your Story)? 이것은 뮤지컬 <해밀턴>의 결말을 장식하는, 일라이자가 부르는 마지막 노래의 제목이며, <해밀턴>의 오프브로드웨이 공연 포스터에도 기재되었던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일라이자는 해밀턴이 남긴 글을 정리해 출판하고, 해밀턴과 함께 독립전쟁에서 싸운 이들을 인터뷰하고 기록하며,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명했고, 뉴욕 최초의 사설 고아원을 설립한 뒤 돌보는 아이들의 눈에서 해밀턴을 떠올린다. 해밀턴 사후 몇십 년의 긴 세월 동안 이 모든 일들을 홀로 해내며 "훗날 사람들이 당신과 나의 이야기를 기억할지"를 질문하고, 이윽고 무대 앞으로 나아가 홀로 조명 아래에서 관객석을 바라본다. 마지막 장면에서 일라이자는 관객을 바라보며 모든 감정이 동시에 밀려 들어오는 듯 벅찬 숨을 들이키는데, 이때 일라이자가 본 것이 자신을 마중 나온 사후세계의 해밀턴인지, 해밀턴의 이야기가 전해진 오늘날의 관객들을 보는 것인지는 배우들의 해석에 따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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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스 더 뮤지컬> 영국 투어에서 캐서린 파 역을 맡은 배우 알라나 로빈슨이 'I Don't Need Your Love'를 부르고 있다 |
ⓒ Manuel Harlan |
한편 <식스 더 뮤지컬>은 정반대 방식으로 서사를 마무리한다. 각자가 자신이 헨리 8세에게 가장 지독하게 당했음을 돌아가며 토로하던 중, 마지막 왕비였던 캐서린 파가 질문한다. 자신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어쩔 수 없이 헨리와 결혼해야 했지만, 왜 이런 불행에 대해서만 노래해야 하냐고. 실제 역사 속의 캐서린 파는 헨리 8세의 마지막 왕비임과 동시에 16세기 영국에서 최초로 책을 펴낸 여성 작가이기도 했으며, 나는 이것을 노래할 것이라고. 이 장면에서 캐서린 파가 부르는 노래의 제목은 '네 사랑은 필요 없어(I Don't Need Your Love)'다. 그리고 모두가 깨닫게 된다. 헨리 8세와의 관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비교하고, 경쟁하는 구조 안에서는 '헨리 8세의 여섯 왕비 중 하나'로만 기억되고 만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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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해밀턴>과 <식스 더 뮤지컬>의 앨범 표지 |
ⓒ Amazon Music |
<해밀턴>과 <식스 더 뮤지컬> 모두 역사 속 인물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고, 여러 의미로 긍정적인 사회문화적 영향을 만들어냈다고 평가받는다. <해밀턴>이 있었기에 <식스 더 뮤지컬>의 시대에서는 컬러블라인드 캐스팅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두 작품이 서사를 마무리 짓는 방식은 이토록 다르다. <해밀턴>이 역사적 인물들을 통해 오늘날의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면, 이 작품이 놓쳤던 여성 서사를 <식스 더 뮤지컬>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 속에 단편적으로 박제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꺼내서 해방시킨다. 배우 레슬리 오덤 주니어가 말한 것처럼, <해밀턴>이 남긴 혁명의 릴레이는 <식스 더 뮤지컬>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선주민 배우들이 <해밀턴>을 공연한다면, 그래도 2015년 초연과 같은 혁명이 될 수 있을까? 10년 뒤의 대중이 <식스 더 뮤지컬>을 보았을 때, 이 작품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공연계에 혁명의 릴레이를 이어가고 질문을 던지는 다음 작품은 무엇이 될지 기대해본다.
*다음 필자는 조윤아님입니다. 나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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