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 소설가들이 포착한 한국사회의 단면
[김성호 기자]
바야흐로 신춘문예의 계절이다. 세계 속 한국문학계에만 있는 전통, 20여 곳을 헤아리는 언론사의 새해 첫 지면을 통하여 문단에 입성을 원하는 신인들이 선배 문학가의 선택을 받아 첫 걸음을 떼는 등용문이 신춘문예다.
시와 소설, 평론 등 문학의 제 분야 협회는 매해 신춘문예를 진행하는 20여 곳 언론사의 당선작을 모아 작품집을 내는데, <2023 신춘문예 당선소설집>은 그중 26곳의 선택을 받은 신인 소설가의 작품이 모인 책이다.
매해 신춘문예 당선작엔 나름의 흐름이 있다. 다른 예술이 그러하듯 소설 또한 시대와 공명하게 마련이고, 시대상을 반영하여 그 시대 고유의 질병에 대하여 나름대로 고발하고 치유하며, 위안을 던지는 탓이다.
어디 작가들만의 일일까. 언론사에서 문학을 심사하고 발표하는 전통을 한 세기 이상 이어온 것이 오늘의 한국이며 신춘문예다. 한국 문학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시대와의 연결성을 강조해온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광주일보> 신춘문예를 심사한 함정임의 심사평 서두가 이와 같은 현상을 잘 보여준다.
▲ 2023 신춘문예 당선소설집 책 표지 |
ⓒ 한국소설가협회 |
신진 작가들이 포착한 한국의 단면
지난 몇 년 간 코로나19로 인한 비일상의 단절성이 신춘문예의 큰 흐름을 차지했다면, 2023년도 신춘문예는 다시금 회복된 일상의 주제가 전면에 떠올랐다 해도 좋겠다. 다양한 소재의 글이 소설을 채우게 마련이지만, 2023년만의 특색 또한 없지 않다는 이야기다. 지난 십 수 년 간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가 두드러졌던 경향 또한 어느 정도 이어진 가운데 변화의 조짐이 발견됐다는 평도 있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유명한 정지아 작가는 <무등일보> 신춘문예 심사평에서 2023년 신춘응모의 특징을 두 가지로 압축해 드러낸다. 하나는 중장년 층의 응모가 늘고 과거의 현실을 그린 소설이 많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지난 몇 년간 압도적이었던 여성서사 대신 좀 더 보편적인 가족서사가 늘었다는 점'이다. 여전히 여성의 목소리로 풀어가는 가족서사가 중심이긴 하지만, 그래도 보편의 공감을 살 수 있는 가족서사가 전보다 많아졌다는 뜻이겠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문학은 갈수록 좁아져왔다. 읽는 이가 줄어들고 쓰는 이 또한 마찬가지여서 소설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적잖았다. 특히 남성독자의 이탈은 심각한 수준이어서, 한국 소설이 이야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여성향을 보인다는 점이 위기론에 힘을 실었다. 자연히 신춘문예 또한 여성서사가 지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나 2023년 만큼은 그래도 소수나마 남성성이 녹아든 작품이 일부 있어 눈길을 끌었다.
어느날 갑자기 사람이 코뿔소로 변했다고?
<광남일보> 당선작 '코뿔소' 같은 작품은 언급할 만하다. 임정인이 쓴 이 소설은 코로나19를 연상케 하는 가상의 질병을 배경으로 한다. 이 병에 감염되면 기침을 하다가 어느 순간 코뿔소로 변하고 만다.
주인공인 해음은 친구인 환이 어느날 코뿔소로 변한 뒤 사라졌다고 주장했지만 세상은 그의 말을 좀처럼 믿어주지 않았다. 21세기에 사람이 코뿔소로 변하다니 무슨 말이 되지 않는 소리냐고 일축했던 것이다. 그러나 차츰 코뿔소가 된 사람이 늘어나고, 그 가족들이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니 나라 안은 코뿔소가 되는 병으로 떠들썩하게 된다.
소설은 코뿔소가 되는 사람들과 코뿔소가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난동을 부리는 코뿔소를 함부로 취급하는 사람들 등 다양한 군상을 등장시켜 오늘의 세상을 엿보게 한다. 비정상적인 상황과 마주하여 인간이 보이는 여러 모습은 코로나19 속에서 일어난 상황들을 연상케 하고, 그 속에서도 어떤 믿음이며 우정 같은 것을 간직하려는 인간의 발버둥을 흥미롭게 그렸다.
지난 수 년 간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가 지배해온 신춘문예 가운데서 판타지적 설정의 전면적 수용, 거칠고 남성적인 묘사가 인상적인 작품이 수상했다는 점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40억원 내걸고 후계자 모집하는 구두닦이
<전남매일신문> 당선작 '보스를 아십니까'도 빼놓을 수 없다. 후계자를 구하며 평생 모은 40억 원을 내건 구둣방 주인의 이야기다. 일생을 구둣방에서 구두를 닦으며 살아온 이가 이로부터 겪게 되는 일상의 변화를 흥미롭게 그렸다. 왜곡을 일삼는 언론의 모습이나 일확천금을 꿈꾸며 파리떼처럼 들끓는 사람들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 결말부의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읽는 내내 흥미롭고 읽고 나면 일상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소설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낸다. 일상의 위로나 재발견 같은 소소한 문제 또한 의미가 있겠으나 근 몇 년 간 찾아보기 쉽지 않았던 선 굵은 이야기가 당선의 영예를 안았단 점이 흥미롭다.
2023년 신춘문예의 경향은 여전히 섬세한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소소한 이야기에 무게추가 쏠려 있다. 그 섬세함이 어려운 국면을 헤쳐 나가는 오늘의 독자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 편에선 위기에 봉착한 한국문학을 일점에서 돌파해나가며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작품 또한 발굴해내야 할 일이다. 전에 없던 새로운 이야기, 그 방식과 캐릭터, 전개 모두에서 파격을 더하는 도전적인 작품을 어쩌면 올해 신춘문예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 문학에 관심이 큰 독자라면 신인 등용문을 두드리는 젊은 작가들의 현주소를 접해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일 테다. 한국만의 전통인 신춘문예에도 미덕이 있다면, 그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일 테니까.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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