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장애인·여성·이주노동자…'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편집자주 - 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차별이 소수자의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의 연구기록이다.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노동자 등을 “읽고 만나고 부대끼며” 얻은 내용을 담았다. 과학을 빌미 삼아 소수자에게 사회적 낙인을 찍은 19세기 논문부터 국내 성소수자 건강 연구까지 다채로운 학술자료를 소개한다. 1993년 응급의학과 의사인 녹스 토드 박사 연구팀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병원에서 백인 환자가 처방받은 진통제 비율이 히스패닉 환자의 2배가 넘었다. 저자는 이를 '불평등한 치료' '암묵적 편견'이라 지적한다. 저자는 자신의 실수도 솔직하게 털어 놓는다. 트랜스젠더 연구 참여 감사 의미로 지급한 기프티콘에 적힌 '트랜스젠더 연구'라는 말이 아웃팅이 될 수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음을 고백한다. 여러 인물을 직접 만나 나눈 대화도 소개한다. 2018년 미투 운동을 촉발한 서지현 검사, 용산참사 피해자들이 겪는 개별적 고통을 포착한 영화 '공동정범'의 김일란 감독, 인종차별, 정신질환 낙인, 성소수자 혐오를 겪은 데이비드 윌리엄스, 패트릭 코리건, 리 배지트 등과 나눈 대담을 담았다. 저자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란 공기처럼 존재하는 차별을 정확한 데이터로 마주하고, 당사자의 고통을 함께 이야기하고, 문제의 복잡한 맥락을 헤아리는 모든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부조리한 사회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은 종종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죽이며 아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당사자의 몸에 갇히지 않고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 고통에 응답해야 합니다. - 「들어가며」 중에서
지체장애인이 아침이면 직장에 출근해 일하고 저녁이면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는 하루가 일상이 되는 사회에서 그들이 투표소와 극장과 병원에 가지 못할 리 없다. -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1」 중에서
A 씨의 입학을 반대하는 이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상상할 수 없다는 이유로, 트랜스여성인 A 씨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우려 했습니다. - 「당신은 ‘정상인’입니까? 그럼 특권층입니다」 중에서
우리 뇌의 신경망이 첫눈에 보이는 피부색이나 성별과 같은 정보를 조합해 어떤 사람을 특정 범주로 분류하고 그에 따라 판단하는 데 0.1초가 채 걸리지 않습니다. - 「절대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 중에서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전 세계 어느 전문가 학회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그런 비과학적인 주장을 당신 같은 사람들이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주장하고 다니기 때문에 성소수자들이 죽음을 생각하는 세상이 된 것이라고. 바뀌어야 하는 건 동성애자의 성적 지향이 아니라 전문가가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윤리를 어기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당신 같은 사람들이라고. -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2」 중에서
누군가의 인권을 다음으로 미룰 수 없는 것처럼, 여성과 트랜스젠더와 장애인과 그 밖의 수많은 다양한 소수자가 화장실을 이용할 권리 역시 다음으로 미룰 수 없습니다. - 「‘오줌권’을 위한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에서
한 사회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목숨이 계속 부당하게 죽어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살아남은 목격자’인 우리는 계속 질문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고롱고사’는 어디인지,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은 ‘상아 없는 코끼리’는 누구인지, 이 부조리한 생존경쟁에서 이득을 취하고 있는 밀렵꾼은 누구인지 말입니다. - 「한국 사회의 ‘상아 없는 코끼리’는 누구인가」 중에서
가족으로부터 자신을 부정당하는 성소수자들의 삶은 절벽에 몰리게 된다. 성소수자들이 가장 가까이에서 살아가고, 때로는 가장 인정받고 싶은 존재인 부모에게조차 자신의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밝히지 못하는 것은 거절당하고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3」 중에서
불법인 마약 사용을 모두 막을 수 있었다면, 그래서 주삿바늘로 전파되는 HIV 감염 역시 함께 막을 방법이 있었다면 그게 최선이겠지요. 그러나 그런 이상적인 정책을 실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뉴욕시 보건담당 부서는 실현 가능하면서도 현실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 이 같은 노력은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 「1980년대에 머물러 있는 에이즈에 대한 인식」 중에서
김도현_제가 장애인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라고 말하곤 하는데요. 장애인이라는 구분과 그 범주 자체가 필요하지 않은 사회에 도달할 수 있다면, 아마도 굉장히 먼 길이 되겠지만, 그 사회는 지금보다 근본적으로 진전된 단계일 거라고 생각해요. - 「균열과 혼란에서 시작되는 변화」 중에서
리 배지트_반동성애자들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뛰어넘어 그 뒤에서 작동하는 힘을 분석해야 한다. 지금은 ‘정치적 순간’이기 때문이다. - 「차별에 침묵하는 정치 움직이려면」 중에서
서지현_그래서 제가 이번에 여러 언론 인터뷰에 응하며 “저 원더우먼처럼 찍어주세요”라고 했어요. 기자들이 이렇게 많이 물어요. 건강 안 좋다던데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고. 그런데 그런 거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약해 보이거나, 슬프고 동정심 유발하는 이미지를 남기고 싶지 않아요. - 「내 본질은 누구도 무엇도 바꿀 수 없어요」 중에서
나는 ‘장애를 극복한’ 박제된 영웅보다, 오류와 모순을 품고 당대를 살아낸 한 인간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길 원한다. - 「헬렌 켈러의 빛과 그림자」 중에서
아무리 마음속에 분노와 슬픔이 있어도, 학자가 글을 쓸 때는 내용을 소화하고 정리해서 써야 하니까요. 학자로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나은 무기를 세상에 내놓고 싶었어요. - 「이것은 저의 싸움입니다」 중에서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320쪽 | 2만2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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