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전, 방미길…페소 대신 달러 택한 아르헨 '전기톱맨' 실험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당선된 하비에르 밀레이(53)가 취임도 전에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밀레이는 선거 유세 기간 전기톱을 들고 다니며 “아르헨티나의 만성적인 공공 지출을 잘라내고, 중앙은행은 폐쇄하겠다”고 공언해왔다.
로이터통신과 현지 매체 부에노스아이레스 헤럴드 등에 따르면 밀레이 대변인실은 지난 27일 그가 소수의 참모들과 민간인 자격으로 미 뉴욕·워싱턴 DC를 방문한다고 발표했다. 밀레이는 같은 날 “미국으로 향한다. 망할 자유를 위해!”라며 헝클어진 머리, 가죽점퍼 차림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는 사진을 X(옛 트위터)에 올렸다. 공식 취임식은 내달 10일이다.
밀레이는 이날 뉴욕에서 크리스 도드 미 백악관 미주 특보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만나 점심을 먹은 뒤 워싱턴으로 날아가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면담할 예정이다. 워싱턴의 국제통화기금(IMF) 본부에 들러 관계자들도 만날 예정이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고(故) 로잘린 카터 여사의 추도식 참석차 워싱턴을 비웠다. 아직 취임 전인 밀레이를 바이든 대통령이 맞이하는 ‘그림’이 관례에 맞지 않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취임 전에 미국을 방문한 밀레이의 행보를 두고 그가 아르헨티나의 달러 법정 통화 전환(dollarization, 달러화)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란 관측을 외신들은 내놓고 있다. 밀레이 대변인실 관계자는 현지 언론에 “재정 긴축과 통화 개혁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을 찾는다고 설명했다. 방미엔 ‘문고리 권력’으로 꼽히는 여동생 카리나 밀레이, 차기 비서실장으로 거론되는 니콜라스 포세, 경제부 장관으로 거론되는 루이스 카푸토 전 재무장관 등이 동행했다.
달러화, 온건파 기용으로 속도 조절하나
자칭 ‘무정부주의 자본주의자’였던 밀레이는 연간 140%가 넘는 고물가, 휴짓조각으로 전락한 자국 화폐(페소), 국민 40%의 빈곤 문제 등을 해소하기 위해 중앙은행을 폐쇄하고, 페소 대신 달러를 법정 통화로 채택하는 ‘극단 처방’을 추진하고 있다. 밀레이는 9월 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 “궁극적으로 호주·아일랜드·뉴질랜드”를 미래 아르헨티나의 경제 모델로 꼽았다.
법정 통화를 달러에 의존한다는 건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통화 정책을 따른다는 의미로, 해당 국가의 통화 주권은 어느 정도 포기한다는 의미도 된다. 이 때문에 밀레이 당선은 남미에서 브라질 다음으로 '체급'이 큰 아르헨티나 경제를 한층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세계은행 추산 아르헨티나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6320억 7700만 달러(약 818조원) 수준이다. 현재 달러를 법정 통화로 쓰고 있는 에콰도르(2000년 채택), 엘살바도르(2001년 채택) 등과 비교해 GDP·인구 측면에서 아르헨티나만큼 ‘덩치’가 큰 사례는 없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줄리 코잭 대변인도 지난 9월 “아르헨티나의 달러화는 건전한 거시 경제 정책을 대체할 수 없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밀레이는 그러나 지난 19일 당선을 확정 지은 이후 온건파 경제통을 전면에 내세웠다. 2015년 집권했던 친기업 성향 우파 마우리시오 마크리 정부에서 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한 카푸토 전 장관을 최전선에 기용하면서다. 반면 밀레이의 대선 기간 달러화 공약을 집필했던 에밀리오 오캄포 아르헨티나 세마대 교수는 한발 뒤로 물러나는 모양새다. 물론 “그가 최종 중앙은행 총재로 낙점될지는 좀 더 봐야 안다”는 게 현지 언론들의 평이다.
정통 경제 관료인 카푸토 전 장관은 올해 6월 자신이 운영하는 싱크탱크 보고서를 통해 “페소 폐지는 아르헨티나 재정 적자라는 핵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마법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썼다. 물론 밀레이는 당선 이후 “중앙은행 폐쇄는 타협이 불가능한 공약”이라고 재차 확인했지만, 적어도 점진적인 방식으로 금융 개혁을 추진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정부가 돈 없어서 못 해” vs “‘장롱 달러’ 많아”
이코노미스트는 “아르헨티나는 2018년 IMF에서 빌린 440억 달러의 차관을 갚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밀레이 캠프는 국영 기업 주식과 국채 등을 해외 펀드에 매각해 자금을 조달하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그 자산을 누가 살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반면 이미 서민 경제는 달러로 전환된 지 오래여서, 실제 통화 대체가 발표되면 집에 숨은 ‘장롱 달러’가 은행으로 자연스럽게 모일 것이란 예측도 나온다. 과거 에콰도르가 그랬다.
아르헨티나 경제 매체 암비토 피난시에로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아르헨티나에 있는 달러는 2460억 달러 규모로 추정된다.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화폐의 10%로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아르헨티나 시민 1인당 달러 보유액도 4400달러로, 미국인 3083달러보다 많다. 이 돈이 시중에 유통되지 않고, 각 가정의 침대 매트리스, 마루 밑, 책 사이에 들어 있을 뿐이다.
미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시민들은 월급을 받자마자 ‘블루 달러(암시장 달러를 의미)’를 사들여 집에 모으고 있다. 페소 가치가 워낙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데다, 과거 2001년 은행 대규모 인출 사태(bank run)를 한 차례 겪은 아르헨티나인들이 은행을 신뢰하지 못해서다. 정부의 공식 환율은 1달러당 356페소지만, 암시장의 ‘블루 달러’는 1000페소를 넘어섰다. 달러화를 추진할 때 이 교환 비율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달러화 에콰도르, 두 차례 채무 불이행
밀레이는 장기간 권력을 잡아온 좌파 포퓰리스트들인 페론주의자들이 다시 집권하더라도, 달러화를 도입하면 중앙은행이 적어도 페소를 마구 찍어내는 걸 원천 차단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스티브 행키 미 존스홉킨스대 응용경제학과 교수는 “고물가, 화폐 가치 하락이라는 페론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죽음의 나선’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달러화뿐”이라고 거들었다.
반면 경제 저널리스트 로마릭 고딘은 프랑스 매체 기고에서 “엘살바도르, 에콰도르 등 달러화된 국가의 경제 규모는 비교적 작았고, 두 국가는 석유 수출과 미국에 거주하는 자국 이민자들의 달러 송금 등 안정적인 달러 흐름이 뒷받침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코노미스트도 “달러화는 아르헨티나 경제에 해법보단 저주가 될 수 있다”면서 에콰도르 사례를 들었다. 과거 에콰도르는 40%대 고물가로 인한 경제 붕괴를 목전에 두고 달러화를 선언했다. 이후 외환 시장은 안정됐지만, 만성적인 저성장에 빠졌다.
2003년 이후 에콰도르의 평균 물가 상승률은 3% 미만으로 유지됐지만, 경제 성장률도 이와 비슷하게 고정됐다. 한 국가의 ‘최종 대출 기관’인 중앙은행의 기능이 사라지면,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긴급 유동성 투입에 제한을 받게 되는 점도 문제다. 실제로 에콰도르는 달러화 이후 두 차례나 채무 불이행을 맞았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 때는 덩달아 불황의 영향을 받아야 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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