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K라면의 어떤 맛에 빠졌을까
K라면이 ‘펄펄’ 끓는다. 해외에서 더 뜨겁다. 올해가 다 가지도 않았는데 연간 라면 수출액이 사상 처음 1조원을 넘겼다. 해외 공장서 현지 생산·판매해 수출로 안 잡히는 라면까지 더하면 해외로부터 국내 라면 기업이 벌어들인 돈은 2조원을 훌쩍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1963년 국내 최초 인스턴트 라면 ‘삼양라면’이 등장한 지 딱 60년이 지난 지금. 라면은 허기를 달래기 위한 ‘서민 음식’에서 이제 ‘K푸드 선봉장’으로 거듭났다.
아직 10월인데…수출 기록 경신
라면 빅3 ‘방긋’…영업이익 2배↑
관세청에 따르면 올해 10월까지 누적 라면 수출액은 7억8525만달러다. 한화로 계산하면 약 1조200억원 정도다. 2018년 4억달러 수준에 머물렀던 수출액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급증하기 시작했다. 2020년 처음으로 6억달러를 돌파한 이후 2021년(6억7440만달러)에 이어 지난해는 7억6541만달러까지 뛰었다.
올해는 10월에 벌써 지난해 최고 기록을 깼다. 10년 전인 2013년(2억1253만달러)과 비교하면 3배가 넘는 성장세다.
수출 지역이 다변화된 것도 반가운 소식이다. 중국(1억7445만달러), 미국(1억700만달러), 일본(4866만달러) 외에도 네덜란드(4864만달러), 호주(3016만달러), 영국(2980만달러) 등 서구권 수출액이 급증했다. 10년 전만 해도 순위표에서 찾아볼 수 없던 국가들이다.
수출 호조와 해외 시장 성장에 힘입어 이른바 ‘라면 빅3(농심·오뚜기·삼양)’로 불리는 주요 기업 실적도 웃는다. 올해 3분기 기준 삼양식품 영업이익(434억원)은 전년 대비 무려 124.7% 뛰었다. 농심(557억원, 104%)과 오뚜기(830억원, 87.8%) 역시 전년 대비 2배 가까운 영업이익 증가세를 보였다.
‘제대로 된 한 끼’로 포지셔닝
라면업계 1위 농심은 미국을 중심으로 해외 매출을 빠르게 늘려가고 있다. 지난해 농심 해외 매출 중 미국 법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39.4%에 달했다. 지난해 5월 미국에 제2공장을 완공, 생산량을 대폭 확대한 데 따른 성과다. 전에는 미국 공장 생산이 한계에 다다른 탓에 국내 생산 물량까지 수출할 정도로 포화였다. 미국 2공장 가동률은 올해 3분기 기준 40% 중반을 넘어서며 빠르게 상승하는 중이다.
농심 수출 효자는 역시 ‘신라면’이다. 한국보다 해외에서 팔리는 신라면이 더 많다. 2021년 해외에서만 5000억원 매출을 기록, 국내 매출(4300억원)을 처음으로 넘어선 이후 계속 그 격차를 벌리고 있다. 2017년 업계 최초로 미국 전역 월마트 전 점포에 신라면을 입점시켰다. 덕분에 과거 교포 시장과 중국인 등 아시안마켓을 중심으로 이뤄져왔던 주요 소비층을 미국 메인스트림으로 옮겨 올 수 있었다. 이제는 국방부 같은 미국 주요 정부시설에까지 입점해 판매된다.
신라면 해외 성공 비결로는 ‘프리미엄 전략’이 첫손에 꼽힌다. 소득 수준이 높은 미국 시장을 겨냥해 고급화를 추구했다. 라면을 저가 음식으로 위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파게티나 파스타 같은 다른 면류와 대등한 음식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 기존 시장을 장악했던 일본 라면은 대부분 3~4개입 한 팩 가격이 1달러 수준인 반면, 신라면은 개당 1달러 안팎으로 상대적으로 비싸다. ‘간식’이 아닌 ‘식사’로 이미지 구축에 성공했다는 평가다. 재구매도 이어졌다. 지난해 신라면(봉지) 미국 매출은 전년 대비 32% 늘어난 8500만달러를 기록했다. 신라면보다 더 비싼 신라면블랙 역시 전년 대비 매출이 20% 올랐다. 농심 관계자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신라면은 제대로 된 한 끼 식사를 찾는 미국 소비자 니즈를 충족하며 브랜드 파워가 더욱 견고해졌다”며 “중국과 동남아 등지에서도 자국 라면 브랜드보다 품질이 더 좋은 고급 제품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얌불닭’ ‘소바불닭’ 등 다변화
삼양식품은 아예 수출이 내수보다 훨씬 더 크다. 해외 공장을 둔 농심과는 달리 수출 물량을 모두 국내에서 생산해 판매한다. 올해 3분기 누적 기준 삼양식품 전체 매출 8662억원 중 68%에 달하는 5876억원이 수출에서 나온다. 해외 매출이 국내의 두 배가 넘는 셈이다.
2010년대 들어 오뚜기에 2위 자리를 넘겨주며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던 삼양식품 운명을 바꾼 건 ‘불닭볶음면’의 등장이다. 불닭볶음면 수출이 본격화한 2016년 이후 삼양식품은 매년 최고 실적을 갈아치우고 있을 정도다. 2016년만 해도 삼양식품 해외 매출 비중은 26%에 불과했다.
불닭볶음면은 전 세계 매운 라면 열풍을 주도하며 누적 판매량 50억개를 돌파하는 등 그야말로 ‘라면계의 한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영국 남자’로 알려진 유튜브 스타 조쉬가 불닭볶음면 먹기에 도전하는 영상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매운 라면 챌린지(Fire Noodle Challenge)’ 열풍이 불어 닥쳤다. 삼양식품 관계자는 “별다른 광고를 하지 않았는데도 바이럴 마케팅 덕분에 매출이 급증했다”며 “삼양식품 해외 매출 중 80% 이상이 불닭 브랜드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반짝 인기’로 끝났을지도 모를 불닭 열풍이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한 배경에는 철저한 현지화 전략이 자리한다. 수출 초기인 2014년 전략적으로 KMF 할랄 인증을 획득, 전 세계 무슬림 인구 60%가 살고 있는 동남아 지역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맛도 최대한 현지화했다. ‘한국 맛이 가장 세계적인 맛’이라고 공언하는 농심과는 조금 다른 행보다. 미주 지역에서는 인기 핫소스 ‘하바네로’를 접목한 ‘하바네로라임불닭볶음면’을 비롯해 매운맛에 익숙하지 않은 현지인을 겨냥한 ‘콘불닭볶음면’도 선보였다.
최근에는 미국 내 아시아 인구와 아시안 요리를 선호하는 이들을 위해 ‘똠얌불닭볶음탕면’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일본 맞춤형 제품 ‘야키소바불닭볶음면’ 등 특정 국가 대상 제품을 선보이며 호응을 얻고 있다. 장지혜 DS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주요 국가별로 선호하는 육수 베이스와 향신료에 차이가 있다. 지역마다 종교 이슈도 있다”며 “현지 입맛에 맞는 제품 개발이 글로벌 시장 공략 필수로 떠올랐다”고 설명했다.
‘팔도 도시락’이 러시아 시장점유율 60%를 차지한 ‘국민 라면’으로 거듭날 수 있던 배경에도 현지화 전략이 자리한다. 팔도는 젓가락질이 서툰 러시아인을 위해 모든 도시락에 ‘포크’를 넣어 식사 편의성을 크게 높였다. 추운 날씨 탓에 열량이 높은 음식을 선호하는 성향에 주목해 마요네즈 소스를 별첨한 ‘도시락 플러스’도 호응을 얻었다.
K라면, 향후 전망은
라면 공장 늘리고 전용 제품 강화
수출 시장 전망은 밝다. K라면 성장 일등 공신 중 하나인 K컬처 산업이 계속 확장 중이다. 특유의 매운맛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현지 소비자 구매 빈도도 늘어나고 있다는 후문이다. 국내 각 기업도 시장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농심은 오는 2025년 미국 제3공장을 착공해 시장 공략에 속도를 더할 계획이다. 삼양식품은 해외 판매 법인 영업 강화와 수출 국가 다변화에 힘을 싣고 있다. 팔도 역시 러시아·베트남 법인에서 빠르게 늘어나는 현지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신공장 건축 등에 주력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K라면 인기가 뜨겁다지만 글로벌 시장점유율로 놓고 보면 여전히 일본의 저가 라면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주요 시장인 미국 내 농심 라면 점유율은 약 25%로 2위다. 1위 일본 도요스이산(47.7%)과 격차가 제법 크다.
라면 빅3 중 오뚜기는 해외 공략이 상대적으로 더딘 상황이다. 국내 시장에 보다 집중한 탓에 여타 라이벌 기업과 비교하면 해외 사업 비중이 낮다. 오뚜기 해외 매출 비중은 2023년 3분기 기준 13% 수준이다.
김정욱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해외 시장 비중이 높은 식품 기업을 아무래도 고평가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 인구 감소로 국내 시장이 계속 쪼그라들고 있는 데다 제품 마진 역시 해외가 더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오뚜기는 최근 전력질주를 하고 있다. 덕분에 진라면을 앞세워 최근 미국과 베트남을 중심으로 동남아 매출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오뚜기 베트남 법인 매출은 전년 대비 43% 증가한 646억원을 기록했다. 미국 법인 성장세는 방탄소년단(BTS) ‘진’ 효과를 톡톡히 봤다. 진라면 모델로 발탁한 이후 매출에 탄력이 붙었다.
오뚜기 미국 법인의 지난해 매출은 922억원으로, 전년 대비 39% 뛰었다. 북미 사업 확대를 위해 지난해 캘리포니아주 남부 온타리오에 자리한 물류센터를 인수하기도 했다.
‘해외 전용 제품’ 승부수도 띄웠다. ‘진라면 치킨맛’ ‘진라면 베지’ ‘보들보들치즈라면’ ‘보들보들치즈볶음면’ 등 국내에선 맛볼 수 없는 수출 전용 제품으로 글로벌 수출 국가를 60개국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오뚜기 관계자는 “라인업 다변화뿐 아니라 현지 SNS, 오프라인 매장 내 프로모션 등 적극적인 마케팅을 통해 브랜드를 지속해서 알릴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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