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철한 승부사의 놀라운 질주, 中 딩하오 삼성화재배 우승
2023 삼성화재배 결승 최종전 결과
28일 경기도 고양시 삼성화재 글로벌 캠퍼스에서 열린 2023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결승 3국에서 딩하오 9단이 셰얼하오 9단에 흑 300수 만에 불계승했다. 중·중 형제 대결로 치러진 결승 3번기 최종국에서 승리하면서 딩하오는 결승 전적 2승1패로 삼성화재배를 들어올렸다.
2023 삼성화재배 결승 3번기는 문자 그대로 창과 방패의 대결이었다. 강력한 힘 바둑을 구사한 셰얼하오가 휘몰아치면 냉정한 승부사 딩하오가 되받아치는 대결이 결승 3번기 내내 펼쳐졌다. 결승 1국에서는 딩하오의 카운터 펀치가 셰얼하오를 쓰러뜨렸고, 결승 2국에서는 셰얼하오의 완력이 딩하오를 무릎 꿇렸다.
결승 최종국에선 딩하오의 세련된 국면 운영이 돋보였다. 좌상에 침투한 셰얼하오의 백 대마를 추궁하면서 하변에 집을 만들어 우세를 확보했고, 불리한 형세를 느낀 셰얼하오가 반격을 감행하자 정확한 응수로 되레 격차를 벌렸다. 경기 막판 반집 승부까지 미세해졌으나 형세가 뒤집어지지는 않았다. 300수를 끝으로 흑 반집승이 확정된 상황, 셰얼하오가 계가를 포기하면서 결승 최종국은 흑 불계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시상식에 참석한 딩하오는 “우승은 예상하지 못했다”며 “결승전을 아슬아슬하게 이겨 지금도 얼떨떨하다”고 우승 소감을 밝혔다. 이어 딩하오는 “앞으로 우승을 몇 번 더하는 것이 목표”라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때문에 구체적인 목표는 세우지 않았다”고 말했다.
3년 만의 중국 우승으로 마무리된 2023 삼성화재배를 돌아본다. 2023 삼성화재배는 4년 만에 대면 대국으로 열리면서 어느 대회보다 관심이 높았으나, 한국 선수가 우승은커녕 결승에도 오르지 못하면서 어느 대회보다 아쉬움이 큰 대회로 남게 됐다. 한국 바둑이 다시 중국에 밀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는 상황이다.
첫 출전 대회에서 우승까지, 승부사의 쾌속 질주
딩하오는 2000년생으로 당대 최강 신진서 9단과 동갑내기다. 신진서보다 2년 늦은 2014년 입단했다. 2021년 중국 국내 기전 3개를 잇달아 우승하며 주목을 받았으나 세계 대회에서는 두각을 보이지 못했었다. 삼성화재배 이전에 딩하오가 우승한 세계 대회는 올 2월 끝난 LG배가 유일했다. 신진서는 2000년 LG배를 우승했었다. 삼성화재배는 올해 이전 기록이 없다. 본선 진출이 처음이어서다. 그 첫 대회에서 우승컵까지 거머쥐었다. 딩하오의 삼성화재배 첫 출전 우승은 2017년 구쯔하오에 이어 대회 두 번째 기록이다.
딩하오의 바둑은, 약점이 없다는 점에서 박정환 9단을 닮았다. 기본기가 탄탄하고 형세 판단이 탁월하다. 항우 장사 같은 힘을 보여줬던 셰얼하오의 공세에 밀리지 않았을 정도로 수읽기도 약하지 않다. 중국에서는 노력파 기사로 유명하다. 인공지능과 4000번 넘게 대국하며 훈련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딩하오의 최대 강점은 강철 같은 마인드다. 박정환과의 4강전에서 특유의 장점이 빛을 발했다. 초반 대형 정석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아 팽팽한 형세로 되돌렸다. 1분 초읽기 상황에서는 초인적인 집중력을 보여줬다. 박정환이 10집 정도 우세했고 시간도 여유가 있었으나, 초읽기에 몰린 딩하오가 기어코 바둑을 뒤집었다.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도 딩하오는 박정환과의 4강전을 “가장 힘들었던 승부”라고 꼽으며 “운이 좋았다”고 털어놨다.
삼성화재배마저 거머쥐면서 딩하오는 올해 세계 대회 2관왕에 올랐다. 2023년 유일한 2관왕이다. 그렇다고 딩하오의 시대가 열렸다고 단정하기에는 이르다는 평가다. 바둑TV 해설자 박정상 9단은 “딩하오가 삼성화재배와 LG에서 눈부신 성적을 보였지만, 다른 세계 대회에선 모두 초반에 탈락했었다”며 “아직은 당대 1인자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신진서와 딩하오의 상대 전적은 신진서가 6승3패로 앞서 있다.
4년 만에 돌아온 바둑 축제, 한국은 역대급 부진
올해는 경기도 고양시 삼성화재 글로벌 캠퍼스에서 전 경기가 치러졌다. 2주일간 선수들이 합숙 생활을 하다 보니 일화도 많았다. 시합이 없는 날 족구·탁구 등을 즐기며 긴장을 푸는 선수도 있었고, 연수원 곳곳을 산책하는 선수도 있었다. 15일 열린 개막식에서 최정 9단은 “삼성화재배는 밥이 맛있다”며 “많이 이겨 맛있는 밥을 오래 먹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해 준우승자 최정은 그러나 본선 1회전에서 이번 대회 준우승자 셰얼하오에게 패하고 초반 탈락했다.
대회는 흥겨운 분위기에서 시작했으나, 한국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올해 대회 본선에 한국은 모두 17명이 출전했다. 신진서·박정환·변상일·신민준 등 국내 랭킹 1위부터 7위까지 최정예 기사가 총출동해 최강 전력을 구축했다는 평을 들었다. 반면에 중국은 9명이 출전했다. 커제·양딩신·리쉬안하오·미위팅 등 전통의 강호도 중국 예선에서 탈락해 보이지 않았다.
대회를 앞두고 한국의 우승이 유력하다는 전망이 나왔으나 결과는 참패에 가까웠다. 2019년 탕웨이싱 대 양딩신의 결승전 이후 4년 만에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중·중 대결이 성사됐다. 4강에 진출한 한국 선수도 박정환이 유일했다. 한·중 맞대결 결과는 5승15패로 더 참담했다. 지난 대회에선 한국이 4강을 싹쓸이했던 터라 올해의 부진이 더 아팠다.
한국 바둑이 다시 중국에 밀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바둑계에서 바로 나왔다. 그러나 아직은 섣부른 판단이라는 평이 대세다. 올해 열린 메이저 세계 대회 결과를 보자. 한국이 2승3패로 열세이긴 하지만, 일방적으로 몰린 건 아니었다. 특히 중국은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남자 개인전과 남자 단체전 모두 은메달에 그쳐 거센 비난 여론에 시달렸다. 한국은 남자 단체전에서 우승했다. 한국이 중국보다 선수층이 얇다고 하지만,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한국 바둑엔 불세출의 영웅이 출현했었다. ‘신진서 이후’를 고민하기에는 신진서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올해 중국이 우승컵을 가져가면서 중국은 12번째 삼성화재배 우승을 달성했다. 한국은 14회, 일본은 2회 우승했다.
2023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는 중앙일보가 주최하고 삼성화재해상보험이 후원하고 한국기원이 주관한다. 상금은 우승 3억원, 준우승 1억원이다. 모든 대국은 정오에 시작한다. 흑 6집반 공제. 각자 제한시간 2시간, 1분 초읽기 5회가 주어진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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