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인생, 재기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응원
[김상목 기자]
▲ 영화 <레슬리에게> 포스터 이미지 |
ⓒ ㈜영화사 진진 |
"Liberate tuteme(t) ex inferis 너희는 지옥으로부터 너희 스스로를 구하라!"
1997년 제작된 SF/호러영화 <이벤트 호라이즌>에 등장하는 문구다. 작품성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메이저 대작 중에서 작정하고 지옥도를 묘사한 이미지로는 비길 바가 없다는 해당 영화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던 구절이다. 영화의 줄거리를 요악하자면, 차원 항행을 시도하다 그만 미지의 우주와 접속하는 바람에 우주선 전체가 살아있는 지옥도로 변해버린 이벤트 호라이즌 호에 도착한 구조대원들의 사투를 다루는 영화다. 본 문구는 저주받은 배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 시도하던 구조대원들 앞에 이벤트 호라이즌 호의 선장이 남긴 라틴어 문장이다. 결국 구조대원들의 영혼을 끌어들이려는 미지의 우주 지옥에서 탈출하려면 스스로를 구해야 하는 법이다.
물론 이번에 소개하려는 <레슬리에게>는 호러 영화가 아니다. 미국 남서부 황량한 작은 마을에서 대부분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소소한 드라마일 뿐이다. 하지만 주인공 '레슬리'가 처한 상황은 나름대로 충분히 '지옥'이라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그리고 저 라틴어 문구는 영화의 화두로 삼기에 전혀 어색함이 없을 정도다.
전반전: 굴러온 행운을 탕진하고 몰락한 주인공의 자업자득
영화가 시작되면 곧바로 TV 뉴스화면이 등장한다. 젊은 여성이 복권에 당첨되어 리포터가 인터뷰 중이다. 환호하는 무리에 둘러싸인 그 여성은 기쁨을 만끽하며 집도 사고 아들 선물도 해주고 주변의 지인들에게 크게 한턱 쏠 거라며 들뜬 목소리로 연신 고함지르듯 소원을 외친다. 곧이어 전환된 화면에는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시점에서 해당 여성의 현재 모습이 확인된다. 복권에 당첨되어 인생역전을 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영락한 꼴이다. 방세가 계속 밀린 바람에 쫓겨나 핑크색 캐리어 하나 끌고 길바닥에 나앉고 만다.
마지막 쌈짓돈 탈탈 털어 그 여성, '레슬리'는 아들 '제임스'가 있는 도시로 향한다. 제임스는 아직 스물이 채 안 된 소년이지만 어머니가 그 지경이라 일자리를 얻어 자립해 살고 있었다. (어릴 적엔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동네 친구들이 돌봐줬다고 한다.) 제임스는 어머니의 변하지 않은 행색을 보고 답답해하면서도 금주를 조건으로 당분간만 머물도록 한다. 하지만 폐인생활에 찌든 레슬리는 아들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은 채 사고연발이다. 제임스가 일하러 간 틈에 술을 마시고 이웃의 돈을 훔치기도 한다. 결국 들통이 나는 바람에 아들에게도 버림을 받는다. 제임스는 어머니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 전한다. 다신 안 볼 기세다.
버스에서 힘없이 내리니 고향 친구 '낸시'와 남편 '더치'가 레슬리를 맞이한다. 탐탁찮아 하면서도 일단 그들은 레슬리를 자기들 집으로 데려간다. 하지만 낸시는 레슬리에 대한 불신을 숨기지 않는다. 더치 역시 아들 제임스가 안쓰러워 억지로 떠맡았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마을 사람들 역시 대부분 그를 외면하거나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릴 뿐, 살갑게 다가오거나 반가움을 전하는 이는 찾아볼 수 없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 마을은 자애로운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의 몰락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심문관처럼 레슬리를 옥죄어온다.
물론 레슬리 역시 피해자로 보이기엔 무리가 있다. 낸시와 더치가 퉁명스럽게 대하면서도 일단 마련해준 거처를 빠져나가 동네 바에서 술 한 잔을 구걸하기 일쑤다. 좁은 동네에서 그런 행태는 그렇지 않아도 떨어질 만큼 추락한 평판을 더 나쁘게 만들 따름이다. 끝내 레슬리는 거듭된 사고연발 끝에 과거의 절친 집에서도 쫓겨나는 신세로 전락한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알던 동네 사람들과 또래 친구들 모두가 그를 혐오하거나 함부로 대한다. 레슬리는 이제 마을 사람들에게 그저 인생 실패자의 상징이자 손가락질 대상으로 전락한 것처럼 묘사된다.
▲ 영화 <레슬리에게> 스틸 이미지 |
ⓒ ㈜영화사 진진 |
이제 주인공은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 동네 외곽 모텔 인근에서 자신의 모든 소유물이 든 분홍색 캐리어 하나 의지해 노숙하는 신세다. 그나마 아침 해가 뜬 직후 모텔 직원의 채근에 캐리어도 놓친 채 허둥지둥 도망치고 만다. 그런 뒷모습을 측은히 지켜보던 중년의 모텔 직원 '스위니'는 동료인 '로열'과 함께 주인공이 두고 간 캐리어를 풀어본다. 로열은 이곳 출신이라 레슬리에 대해 혐오스런 반응을 보이면서도 그의 사연을 스위니에게 알려준다.
이야기를 듣고 난 스위니는 그가 못내 마음이 쓰인다. (이유는 레슬리가 갱생을 위한 노력에 돌입한 후 스위니와 가까워지면서 하나둘 드러난다.) 엉겁결에 놓고 간 짐을 찾으러 모텔 주변을 뒤지던 레슬리를 발견한 스위니는 그에게 느닷없이 부랑자에 가까운 이들에게는 절대 제공될 리 없는 조건으로 일자리를 제안한다. 딱히 사람이 필요한 것 같지도 않은데 비록 급여는 적지만 숙식을 제공하는 조건이다. 지금의 주인공에겐 안성맞춤이다. 레슬리도 일자리 제안에 반신반의하며 이게 웬 떡이냐 싶을 정도다.
그렇게 갈 곳 없던 레슬리는 모텔에서 일하게 되지만 한번 망가진 그의 생활패턴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측은한 시선으로 스위니가 가불해준 돈으로 밤마다 술을 마시고 거듭 사고를 친다. 로열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선 사업하는 셈치고 스위니가 마련해준 편한 일자리도 성실하게 수행할 리 없다. 알람이 문제라며 늘 술에 취해 늦게 일어나고 근무태만은 기본이다. 게다가 뒤숭숭한 심정을 늘 술에 의지하다 보니 그만 술집에서 취해 인사불성이 되곤 한다. 그때마다 스위니가 찾아서 데려와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사람 좋은 스위니의 인내심도 그만 한계에 달한다. 과연 레슬리는 이대로 몰락하고 마는 걸까?
결국 각자 삶에서 결정적인 건 스스로의 의지
레슬리는 싱글 맘으로 아들 제임스를 키우며 여유 없이 살긴 했지만 복권에 당첨되는 행운을 누릴 때까지만 해도 꿋꿋하게 살아온 것으로 묘사된다. 지금은 그를 극도로 혐오하게 된 동네 친구 낸시도 이전의 레슬리는 인기도 많았고 자기 앞가림은 충분히 해내던 존재라고 인증할 정도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행운은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다. 레슬리는 일확천금을 번 덕분에 절제를 잃고 술독에 빠진다. 알코올 중독으로 판단력이 흐려져 당첨금도 날려먹고 주변에서 비난을 받자 스스로 무너져버린 것이다. 급기야 이제 갓 10대가 된 어린 아들을 버리고 야반도주하듯 고향을 떠났지만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이상 추락할 일은 없을 줄 알았던 레슬리에겐 본격적인 무저갱의 시작일 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잃은 것에서 끝나지 않고 가족과 이웃들의 신용까지 전부 잃어버린 레슬리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할지 갈피도 잡을 수 없어 그저 도망치는 것으로 일관할 뿐이다. 여기까지면 인생의 중반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채 스스로를 망치는 전형적인 군상 그 자체라 하겠다. 하지만 영화 속 상황을 보자면 레슬리는 과거, 그리고 현재에 그나마 기대고 의지할 곳이 있다. 과거엔 자신의 어머니나 한때 가족처럼 절친한 친구였던 낸시와 그의 반려자 더치 같은 이들이 분명히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게 드러난다. 어머니가 버리고 떠난 아들 제임스도 훌륭하게 자립해 어느새 어머니를 배려할 정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레슬리는 자기파괴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며 그들의 손길을 거듭 뿌리치거나 배반하고 만다. 어머니에겐 자신의 영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죽기보다 싫다. 과거엔 부랑자에 가까운 처지로 복권에 당첨된 레슬리에게 도움을 받았던 낸시와 더치 부부는 가족처럼 레슬리의 아들을 돌봐주고 그에게도 피난처를 제공하지만 불편한 마음에 독설을 거듭 내뱉는다. 서로의 신세가 역전된 것이 내심 견디기 힘든 것이다. 아들과는 잘해보고 싶지만 자격지심과 무절제로 거듭 상처를 입힌다. 그로 인해 더 이상 도움을 받을 수 없을 뿐더러, 혐오의 대상으로 추락하고 만다.
하지만 인생에서 마지막 동아줄인 것처럼 최후의 기회가 깃든다. 마치 변장한 천사와도 같은 스위니와 로열의 도움으로 길바닥에 나앉을 위기를 모면하고 자립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어긋난 자존심 탓에 번번이 굴러온 복도 차버리곤 한다. 마음이 비뚤어진 채 한번 무너진 삶을 되돌린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 세상사를 예시하듯 레슬리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주변을 물어뜯고 자신에게도 상처를 입힌다. 영화 속 레슬리의 추락은 본인의 의지력 문제와 비뚤어진 자존심에서 기인한 것임을 굳이 미화하지 않는다.
▲ 영화 <레슬리에게> 스틸 이미지 |
ⓒ ㈜영화사 진진 |
하지만 또한 영화는 미국 서남부 시골마을의 작은 사회가 갖는 속성을 감추려 하지도 않는다. 레슬리는 어릴 적부터 주변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복권 당첨으로 작은 동네에선 뉴스 토픽이 될 만큼 분에 넘치는 행운을 거머쥐었던 존재다. 그런 레슬리가 스스로를 망치고 폐인 신세로 전락하자 그에 대한 동정과 함께 자연스럽게 폄하가 뒤따른다. 갱생에 도전하는 레슬리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자기 스스로 망쳐먹은 동네의 평판과 추락한 신뢰다.
굳이 미국 남서부 황야가 아니라도 전 세계 공통적으로 규모가 작고 이동이 드문 작은 사회에선 보편적인 폐쇄적 경향이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이웃집 숟가락과 밥그릇 숫자도 꿰뚫을 법한 좁은 동네에서 한번 미움 받고 불신의 대상이 되는 순간 만회하기란 힘든 일이다. 문제는 소규모 공동체에서 쓸모없고 존중받을 자격이 없다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 삶이 힘들어진다는 점이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편견이 작은 사회에서 마치 법처럼 군림한다. 한번 찍힌 상대는 정상적인 마을의 일원이 아니니 마구 대해도 문제될 것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런 처지에 놓인 주인공에게 '왕따'에 가까운 매도가 노골적으로 진행된다.
어릴 적부터 레슬리를 선망(욕망)해왔던 동네 남자들은 이제 공공연히 쉬운 대상으로 그를 넘보기 시작한다. 레슬리가 요구를 거부하자 그를 따돌리고 박해하기도 한다. 미국 시골 마을의 폐쇄성이 그런 순간마다 가공할 폭력으로 돌변한다. 영화는 (미국 시골 배경 공포영화의 흔한 풍경과 달리) 폭력 묘사를 극도로 자제하지만 분위기만으로도 소름 돋는 순간이 적지 않다. 그런 위기에 처한 레슬리를 돕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마을의 주류질서와 벗어난 외지 출신 스위니와 히피 생활 어지간히 해온 듯 로열 등 일부에 불과하다. 영화는 절제된 톤으로 과도한 선정성이나 폭력성 묘사와는 거리를 두고 레슬리의 몰락 이후 삶을 찬찬히 보여주지만 감정이입이 잘 되는 관객이라면 오싹한 순간이 적지 않을 법하다.
나부터 바꿔야 한다는 동서고금의 보편적 진리를 설파하다
하지만 서두에 언급한 라틴어 경구처럼, 결국 레슬리는 스스로를 구해내고 그 과정을 입증함으로써 주변 이웃들의 불신을 벗겨내야만 한다. 술이나 담배를 끊는 과정이 결코 수월하지 않다는 건 (본인 혹은 주변 경험을 돌아본다면) 공감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실제 그렇게 역지사지를 발휘하기엔 요즘 우리들 일상이 녹록지 않다. '아전인수' 격으로 요즘 우리 주위만 돌아봐도 나의 실수에는 관대하고, 타인의 대응에는 쓸데없이 예민하거나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사례가 쉽사리 관측된다. 그런 편견과 이기심을 극복하기 위해 결국 자신의 태도부터 돌아보고 바꿔야만 설득과 동의를 얻어낼 상황이다. 그만큼 우리 주변의 소소한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는 탓이다. 한번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란 그만큼 어렵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모습 역시 멀리 타국의 사례라 단정하기엔 우리 주변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레슬리 역시 자존심 때문에 솔직하게 터놓고 자기반성과 재활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 탓에 상황을 악화시켰다.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고 자신을 동정하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도움을 요청해야만 했다. 하지만 레슬리는 이미 몇 번이고 그 기회를 놓쳤다. 과거의 영광에 도취되어 자신의 현실을 너무 뻔히 잘 알면서도 인정하지 못한다. 오히려 자기 파괴로 치달으며 도우려는 이들에게 더 치댄다. 그 패턴이 끊이지 않고 반복된다. 보고 있자면 정이 뚝 떨어질 정도로 사실적인 모습을 펼친다. 그래서 두 시간 분량 중 전반부 1시간 내내 레슬리가 벌이는 행태를 옹호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노릇이다.
하지만 정작 레슬리가 더 이상 무너질 수 없음을 깨닫고 갱생을 시도할 즈음부터 그를 둘러싼 마을의 불신과 혐오는 오히려 더 폭력적으로 변한다. 분명히 후반부에 들어서면 위태로운 가운데에도 주인공이 나아지려는 몸부림을 확인할 수 있다. 술을 끊기 위해 금단현상을 견디는 레슬리의 역경은 실감 그 자체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알 리도, 관심을 가질 생각도 없던 주변의 낙인은 레슬리의 재활을 가로막는 제약으로 사방에서 그를 포위한다. '변장한 천사' 스위니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아마 레슬리는 좌절한 채 폐인으로 돌아가거나 어딘가에서 객사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여기에서 결국 영화는 복잡한 사회적 쟁점이나 공적 구호제도를 들먹이기 전, 주변의 선량한 이들의 선의와 우정으로 돌파구를 마련한다. 아주 흔한 결론을 제시하는 셈이다.
▲ 영화 <레슬리에게> 스틸 이미지 |
ⓒ ㈜영화사 진진 |
영화를 보기 전이라면 <레슬리에게>가 그저 전형적인 휴머니즘 드라마로 귀결된다고 단정할 만하다. 어찌 보면 딱히 반박할 이유 없는 당연한 주제와 전개이지만 자칫 도덕주의로 빠지기 딱 좋은 이야기라 의심부터 들 법하다. 하지만 그렇게 이웃에 대한 관심과 당사자의 주체적 노력이 우리 주변의 숱한 '레슬리'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당위적 줄거리를 식상하지 않게 만드는 이 영화만의 저력이 만만찮다.
우선 첫 번째는 주연배우들의 찰싹 달라붙는 그림 같은 연기다. 구제불능의 실패한 인생에서 이를 악물고 조금씩 새 출발을 위해 용기를 내는 레슬리 역 안드레아 라이즈보로는 우리에겐 알려지지 않은 배우이지만 오랜 기간 독립영화 중심으로 쌓아올린 내공을 만개한다. 실제 있을 법한 우리 주변의 캐릭터에 마치 빙의한 것처럼 시시각각 바뀌는 인상과 몸짓이 일품이다. 어느 순간부터 주연배우의 표정 하나, 동작 하나, 주름 하나가 상황과 감정을 응축하듯 다가올 게다. 두 번째는 실제로 존재할 법한 미국 남서부 사막지대 작은 마을의 사실적 묘사다. 우리가 통속 드라마나 상업영화에서 쉽게 접하지만 그저 배경으로만 쓰이던 지역적 특성이 생생하게 구현된다. 세 번째는 그런 동네 분위기와 어우러지는 컨트리 포크뮤직의 선율 및 가사다.
특히 술에 절어있던 바에서 문득 레슬리의 심금을 울리는 윌리 넬슨의 음악은 영화 중반 이후 주인공의 위태롭지만 한발씩 전진했다 후퇴하길 반복하게 될 행보의 도화선처럼 기능한다. 가사를 유심히 살펴본다면 해당 곡이 어떤 복선으로 기능하는지 새삼 깨닫게 될 테다. 레슬리가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위로와 격려의 한마디, '괜찮은 사람'이라 불러주기를 기대하는 간절한 욕구는 그의 갱생을 위한 노력에 소박한 응원을 청하는 것이지만, 홀로 심야의 바에서 귓가에 꽂히던 노래의 가사는 레슬리가 차마 부끄러워서 고백하지 못하던 자기반성을 대신 속삭여주었던 것이다. 세상을 탓하기 전 자신의 실수와 나약함을 딛고 올라서야만 구원과 극복이 가능함을 큰 소리로 강변하지 않고 인상적인 연출로 증명하는 해당 장면과 선율은 오래 이 영화를 상징하는 찰나로 남게 될 것이다.
<작품정보>
레슬리에게 To Leslie
2022|미국|드라마
2023.11.29. 개봉|119분|15세 관람가
감독 마이클 모리스
출연 안드레아 라이즈보로(레슬리 역), 마크 마론(스위니 역),
앨리슨 제니(낸시 역), 오웬 티그(제임스 역)
수입/배급 ㈜영화사 진진
공동배급 ㈜하이스트레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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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회 시카고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 노미네이트
38회 필름인디펜던트스피릿어워드 여우주연상 노미네이트
29회 SXSW영화제 관객상 노미네이트
60회 히혼국제영화제 2관왕 (여자배우상, 남자배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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