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 산 자유인 허균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조선 500년사를 통털어 가장 자유롭고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일까?
삼척부사 허균은 유학자의 자제인데도 그 아버지나 형과는 달리 불교를 받들고 믿습니다. 불경을 외우고 읽으며 평소에도 중의 옷을 입고 부처에게 절을 하며 지냅니다. 수령이 되어서도 재를 올리며, 중에게 먹입니다. 많은 사람의 눈이 보는데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태연합니다.……파직을 명하시고 다시는 벼슬을 내리지 마시어 모르고 태연 합니다……. 파직을 명하시고 다시는 벼슬을 내리지 마시어 선비들의 습속을 바로 잡으소서. 허균은 밥을 먹을 때마다 반드시 식경(食經)을 외었으며, 늘 작은 부처를 모셔두고 아침마다 반드시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중의 옷을 꿰어 입고 염주를 목에 걸었으며 절을 하고 염불을 외었습니다. 이르기를 '부처를 섬기는 제자'라고 하였으니, 이런 가자 바로 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허균은 1607년 3월 삼척 부사로 부임한 지 13일 만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쫓겨났다. 시대의 초월자는 이렇게 하여 권력으로부터 적대를 당하면서 소외된 이단자의 길을 걸었다.
▲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
ⓒ 나무위키 |
소설 <홍길동전>의 작가로 더 잘 알려진 허균은 조선에 천주교를 초기에 소개한 선각자로, 실학의 대종(大宗)으로도 손꼽히는 학자이다. 이런 긍정적 측면과 더불어 그는 반역아, 패륜아라는 부정적 평가를 함께 받는다.
조선왕조 기간 허균의 이름 앞에는 '역적'이 붙어다니다가 후기에 비로소 '복권'이 가능하였다.
허균은 왕권에 반역했을 뿐만 아니라 완고하고 형식화된 성리학에 도전하여 유(儒)·불(佛)·도(道)·무(巫)의 4교와 천주교까지 수용하는 사상적으로 대단히 폭이 넓은 당대의 보기 드문 자유인이었다.
조선왕조에서 유·불·도·무에 천주교를 신앙과 지식으로 소화한 유일한 인물이 허균이다. 그가 만약 반역죄로 처형되지 않았다면 루소에 필적하는 자유사상가가 되었을 지 모른다.
모든 반역아·이단자가 그렇듯이 허균 역시 명예와 폄훼가 함께 따른다. 명문출신의 수재이면서 사림(士林)이 질겁을 한 방자한 이단자, 절제없는 경박자, 고독한 불청객, 아첨가, 모략꾼, 성격파탄을 일으킨 올빼미, 광인, 괴물, 혁명을 꾀한 풍운아이면서 한편으로 다정다감하고 세속적인 가식을 싫어하는 행동가, 성품이 호탕한 의협인, 혁명을 꿈꾼 개혁주의자, 진취적 자유주의자, 근대적인 시민 정신의 구현자, 선구적인 휴머니스트란 평가가 그렇다(김동욱 교수 평가).
32세로 이미 머리가 반백이 되고
상사의 꾸지람을 받고
선가(仙家)에 놀려고 해도 어줍지 않은 처지이고
서울의 고관들은 교산(蛟山)의 시재를 아는 터이지만
그 결점도 너무나 잘 알아 사후(伺候)하기도 어렵고,
지방에 내려가 일군(一郡)이니 맡아 원(員)으로 봉사하고 싶어도
누구 하나 기용해 주지 않는다.
허균은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이렇게 토로한 바도 있지만 글 잘하고 다방면에 재주가 있어 제대로 성장했으면 큰 재목이 될 인물이었다. 부친과 형들이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하고 있는 반가의 그는 누구보다 왕성한 학문의 탐구자였다. 이미 쇠진할대로 쇠진해진 성리학의 체제에서 벗어나 불교와 도교·천주교 등 당시로는 이단적인 종교·학문에 더 관심을 갖었다.
청년시절부터 그는 중국의 자유사상가 이탁오를 사모하면서 그의 특이한 사상과 행적에 관심을 보였다. 실제로 허균은 여러 부분에서 이탁오와 유사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남녀의 정욕은 천성(본능)이다. 이를 검속하는 것은 성인(聖人)이다. 나는 성인을 따르기보다는 본능을 따르겠다"고 하는 허균의 생각은 이탁오의 남녀평등·부부우선 사상에서 연유한다.
허균의 지적인 탐구열은 대단했다. 여러 방면의 많은 독서로 당대의 누구보다 앞선 사유의 폭을 갖고 있었다. 또 책에 대한 욕구도 남달라서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역관의 여비까지 털어 책을 사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가 지은 <화도원량귀거래사(和陶元凉歸去來辭)>는 그의 생각을 밝혀준다.
나는 처세에 졸렬하여 지금까지 반생에 머리가 다 빠질 지경에 이르렀다. 다만 독서를 좋아하여 일실을 정히 쓸고 책을 만 권을 쌓아두고 그 가운데서 즐거워한다. 수차의 옥수(獄囚), 좌천 중에도 다 낙원이었다. 그렇지 않고 속물들과 더불어 있을 때에는 시끄러워 책을 펼 수가 없다. 높은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화려한 좌석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큰 칼을 쓰고 몸이 화택(火宅)에 들어갈 것 같다.
허균이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기질을 갖게 된 것은 서얼 출신 이달(李達)에게서 받은 영향이 크다. 이달은 뛰어난 글재주를 가졌지만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 관직에 나갈 수 없었던 불우한 서생이었다. 허균은 이달을 스승으로 삼아 글공부를 했던 것이다.
허균은 성장하면서 서얼들과 자주 어울렸다. 후일 여강칠우(麗江七友)라 하여, 박응서 등 명문고완의 서자들끼리 소양강 상류에서 작당, 옛 죽림칠우에 비기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낸 소외된 지식인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이들은 의적을 자처하여 부자의 재물을 털다가 붙잡혀 대역죄로서 계축화옥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봉건군주 체제에서 이 세력과 적대한다는 것은 수난이거나 은둔의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따라서 이들은 은둔(隱遁), 고일(高逸), 한적(閑適)의 방법을 택하거나 기행으로써 간접적인 저항의 방법을 찾곤 했다.
허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홍길동전>이란 픽션을 통해 부패한 권력에 도전하는 간접 저항의 길을 찾기도 하고, 민중의 저항을 체계화시키는 <호민론>을 저술하여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
<호민론>은 민중의 역할을 수백 년 앞질러 내다본 탁견이다. 천하에 가장 무서운 존재는 오직 민중뿐이라고 단언하면서 민중을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의 세 종류로 나누었다. 항민은 관의 지시에 순종하면서 사는 부류, 원민은 관의 착취에 원성을 보내는 계층, 호민은 이심을 품고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원하는 바를 일거에 이루려고 하는 저항 계층을 말한다.
허균은 이 호민을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던 초나라의 진승(陳勝)·오광(吳廣), 한나라 말기의 황건적·당나라 말기의 왕선지(王仙芝)·황소(黃巢) 등을 들고, 조선에서는 견훤과 궁예를 들었다. 허균은 자신의 작중 인물인 홍길동전을 이런 호민으로 등장시켰으며, 스스로는 왕조 전복의 거사를 기도하였다. 그는 열혈의 혁명아였던 셈이다.
허균은 광해 10년(1618년) 8월, 50살에 모반죄명을 쓰고 능지처사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썩은 정치와 사회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귀족 출신이면서 불우한 처지의 서자 출신들과 어울려 거사준비에 나섰다. 박응서·심우영 등 십여 명을 모아 무술을 익히고 자금을 마련하는 등 은밀하게 거사준비에 나섰으나 누설되어 실패하게 된 것이었다.
함열과 부안에서의 귀양살이는 그의 생애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함열에서는 국문학사상 금자탑인 <홍길동전>을 지었다. 당시 언문이라 천시하는 한글로 이 저항소설을 써서 민중에 대한 깊은 애정을 내보였다. 부안에서는 여류시인이요 기생인 계생(桂生)과의 애틋한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그는 단순한 불평객은 아니다. 방일한 생활에서도 쉬임없이 학문에 정진하고 현실의 모순점을 혁파하고자 노력하는 선구적인 학자이고 개혁주의자였다. 특히 국방에 관심이 높았다. 장차 여진이 침입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대비책을 촉구했다. 남대문에 격문을 붙여 여진과 서양인의 침입을 경고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유언비어 죄로 구속하였다. 예언대로 그가 죽은 지 9년 만에 정묘호란과 18년 만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허균을 역적으로 몰아 처단한 조선왕조의 사서(史書)들은 그를 '경박자' '선동꾼' 등으로 몰아치고 있지만 왕조 5백년사에 있어 허균만큼 사상과 행동·학문의 스케일이 큰 인물도 흔치 않다.
허균의 인간적인 품성이나 인성관 또는 사고방식의 특징은 자화상격인 <누실명(陋室銘)>에서 잘 나타난다.
방 넓이는 손바닥만하고, 남쪽으로 두 문이 열렸네.
낮 해가 와 비치면 밝고 따스하이.
집은 비록 바람벽을 둘렀을 뿐이나,
서적은 사부서(四部書)를 쌓았네.
남은 것 쇠코잠방이 하나, 다만 농옥(弄玉)이가 옆에 있네.
차를 반 항아리 다리고 향 한 자루 피웠네.
벼슬에서 쫓겨난 건곤과 고금을 우러러보고 굽어보고…….
사람들은 누실이라 살지 못하리라 하련만
내가 보기엔 천상세계와 같네.
마음과 몸이 편안하니 어찌 누스럽다 하리오
내가 누스럽게 여기는 것은 몸이나 이름이 아울러 썩는 것…….
혹시 다북쑥이 우거져 우거하는 집이 파묻힌다 해도.
군자가 이어 거(居)하면 어찌 누하다 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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