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학살의 국가폭력은 왜 반복되나 [수산봉수 제주살이]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인문학을 결합한 미디어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제주인과 나의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 <기자말>
[이봉수 기자]
▲ 유대인 대학살을 그린 영화 세 편의 포스터. 왼쪽부터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피아니스트>@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씨네그루㈜키다리이엔티/(주)씨네월드, 조이앤컨텐츠그룹 |
영화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피아니스트>의 공통점은? 영화를 좋아하는 이는 다 알겠지만 홀로코스트, 곧 유대인 대학살을 그린 영화들이다. 또 하나 공통점은 감독이 모두 유대인이란 점이다. 차례로 스티븐 스필버그는 미국 국적이고, 로베르토 베니니는 이탈리아계, 로만 폴란스키는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어 원체험처럼 여겼을 법한 유대인의 애환과 탁월한 창작기법이 잘 발현된 걸작들이다. 이런 영화들이 있었기에 '대량학살은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는 세계인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가지 의문은 '가자지구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애환을 그린 영화는 왜 찾아보기 힘드나'라는 점이다. 그 요인은 영화 제작과 유통의 중심인 할리우드 등 미국 영화계를 유대자본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6대 영화사 중 워너브러더스, 파라마운트, 컬럼비아, 유니버셜, 20세기폭스, MGM 등 5개는 모두 유대자본으로 설립됐다. 감독 겸 배우인 엘리아 술레이만 같은 팔레스타인 출신 영화인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흥행한 영화는 거의 없다.
유대인은 영화뿐 아니라 세계의 미디어를 장악함으로써 이스라엘에 유리한 국제정치 환경을 조성해왔다. 소유주가 변한 데도 있지만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 LA타임스 > 등 미국의 유력지와 주요 방송사는 대개 유대자본이 설립했고, 주요 필진과 방송인 중에도 유대인이 너무나 많다. 세계 4대 통신사 중에도 미국 AP와 UPI, 영국 로이터가 유대자본으로 설립됐으니 중동 문제에 관한 뉴스와 논평이 어느 쪽을 두둔할지 짐작이 간다.
유대인이기에 친이스라엘 논조를 보일 거라고 속단하는 것은 또 다른 인종주의적 관점일 수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유착과 타국 침략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미국의 대표적 지성 또한 유대인이다. 촘스키와 작고한 하워드 진이 그 예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와 경제, 특히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는 유대인의 영향력에서 미국은 자유롭지 못하다.
나치 유대인 학살의 '팔레스타인판'
▲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4일간의 임시휴전에 합의한 22일(현지시간) 이스라엘군의 공습을 당한 가자지구에서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이날 양측에 억류된 인질과 수감자들을 맞교환하는 조건으로 일시 휴전에 들어갔다. |
ⓒ 연합뉴스 |
이번 대학살은 대규모 반정부 시위와 지지율 급락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정권이 내환(內患)을 외우(外憂)로 돌리려는 성격이 강하다. 그런데도 국제사회와 세계 대부분 언론이 기껏해야 양비론을 펴면서 사실상 이스라엘 편을 들고 있다. 근본 원인이 있는데도 현상 유지만을 뜻하는 휴전으로 고착된다면, '지붕 없는 감옥'이라는 가자지구에 인권도 평화도 없다.
▲ 제주4.3영화제 폐막식 포스터 24~25일 이틀간 영화 5편이 상영됐다. |
ⓒ 제주4.3평화재단 |
제주4.3평화재단이 지난 6월 시작한 제1회 제주4.3영화제(집행위원장 이정원)가 21편의 영화를 상영하고 25일 폐막했다. 마지막 이틀간 상영한 영화는 5편으로 <레드헌트> <레드헌트2: 국가폭력> <쉰들러 리스트> <곤도 하지메의 증언> <포수>였다. 10시간에 걸쳐 모든 영화를 다 보고 난 느낌은 학살의 원인과 양상이 유사하다는 점이다. 극우세력의 등장과 부화뇌동, 합법의 탈을 쓴 국가폭력, 언론의 외면 또는 찬양 보도는 장소와 시간을 달리해 끝없이 반복되는 역사다.
특히 <레드 헌트>와 <쉰들러 리스트>는 극우정권 등장과 제주4.3학살, 유대인 학살과 가자지구 학살이 지나간 과거사나 딴 나라 현실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친일파의 후예는 여전히 지배세력임을 과시하고 있고, 반공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한 축으로서 한국사회를 갈라놓는다. <레드 헌트>를 만든 조성봉 감독에게 혐의를 씌운 보안법은 여전히 살아있고, 서북청년단 정신을 계승했다는 이들이 제주4.3추모식 현장에 나타났다.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책임이 제대로 규명되기는커녕 트루먼과 이승만의 거대한 동상이 올해 세워졌다.
'제 몸을 찾지 못해 머리 하나에 다리 하나 팔 하나씩 끼워 맞춰 7년 만에 수습했다는 132구의 시신, 원혼들은 그렇게 뼈가 섞이며 한 몸이 되었다. 백조일손,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 살아남은 이들이 그들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 가입자, 입산자 가족들이 예비검속이라는 미명하에 바다에 수장되고, 제주비행장, 사라봉 등지에서 학살됐으며, 육지형무소에 수감됐던 4.3연루자들이 즉결처분되었다. 이것이 4.3의 마지막 학살이었다. 그러나 4.3은 과연 끝났는가? 은폐되고 왜곡된 역사를 앞에 두고 4.3은 끝났다고 말할 수 있는가?'
초토화작전에서 노획한 총 세 자루의 의미
조성봉은 초토화작전을 수행한 토벌대 지휘부의 명단을 자막으로 실었다. 김재능 서북청년단장, 탁성록 9연대 정보과장(마약복용자), 최난수 특별수사대 경감(일제 고등계 형사), 일본군 출신 홍순봉 제주도 경찰국장, 일본군 학도병 소위 출신 서종철 9연대 부연대장(육참총장 국방장관), 일본군 출신 함병선 2연대장, 일본군 지원군 준위 출신 송요찬 9연대장(육참총장 국방장관 국무총리), F.V. Burgess 9연대 미군사고문 등이 그 주역이다.
한민당을 빼고 좌우 가릴 것 없이 전국의 거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가 남한단독 5.10총선거를 반대하는 상황에서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이 본때를 보이려고 선택한 곳이 총선 거부를 단체행동으로 실천한 제주였다. 토벌대의 최고 지휘관인 로스웰 브라운 대령은 "사태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뿐이다"라고 선언했다.
5월 말까지 3천여 제주민이 검거돼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런데 노획된 무기는 고작 장총 3자루와 죽창 12개뿐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마스 본부'라며 공개한 병원에서 나온 무기도 총 11자루, 수류탄 9개가 고작이었다. 제주도와 가자지구는 전쟁터가 아니라 압도적 무력을 가진 쪽의 일방적 학살터였다.
'인종청소' 현장이 가려지는 언론 현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의 미진한 통계에 따르더라도 가자지구에서 숨진 팔레스타인 사람은 1만4500명에 이른다. 그중 어린이가 6천여명, 여성이 4천여명이나 된다. 노인도 600여명에 이르러 열에 일곱이 노약자였다. 유엔 난민구호직원 108명과 의료진도 최소 225명이 숨졌다.
언론인 희생자도 지난달 말에 벌써 34명에 이르렀다. '전쟁의 첫 희생자는 진실'이라는 말도 있지만 언론인도 무차별 공격대상이 되는 바람에 학살의 진실은 가려지고 있다. 현지시각 25일 전세계 언론은 하마스에 납치됐다가 석방된 9세 소녀의 생환을 크게 보도했다. 그에 앞서 아버지는 딸이 납치돼 숨졌다는 얘기를 듣고 "그들(하마스)이 가자지구에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는지 안다면 숨진 게 다행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전세계를 울렸다'는 상봉 뉴스에는 멀쩡하게 돌아온 딸에 관한 묘사는 찾기 힘들다.
▲ 조성봉 감독과의 대화 폐막작 <레드 헌트2: 국가범죄> 상영 뒤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왼쪽)이 조성봉 감독(오른쪽)과 관객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
ⓒ 이봉수 |
1948년 4월 3일 제주 봉기 당시 30자루 구식 장총을 가진 300명 무장대를 소탕하려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까지 3만 가까운 제주민을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학살했다. 유엔은 1948년 12월 집단학살(제노사이드) 방지와 처벌에 관한 국제협약에서 집단학살은 유엔의 정신과 목적에 위배되고 문명세계에 의해 단죄되어야 하는 국제법상 범죄임을 명시했다. 그러나 제주에서는 그 '범죄'가 일상을 넘어 토벌대의 '놀이'가 되고 있었다. 정규군끼리 전선에서 벌이는 전쟁은 내전만큼 잔인하지 않다. 이념에 경도된 내전이야말로 '복수혈전'으로 이어진다.
조성봉 감독의 1999년작 <레드 헌트2: 국가범죄>는 제주 4.3항쟁의 증언을 기록하기에 앞서 광주 5.18민주항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처참한 시신을 보여준다. 1968년 유엔총회 결의로 집단학살과 같은 비인도적인 범죄는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고 범행일시에 관계없이 처벌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학살은 계속되고 있다.
영화가 끝난 뒤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이 진행한 '감독과의 대화'에서 조성봉은 "요즘은 지리산에서 다른 다큐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가폭력이 반복되는 현장을 기록하고 싶기 때문일 터이다.
▲ 스필버그 감독은 영화 ‘뮌헨’에서 테러나 보복으로는 평화가 올 수 없다고 말한다. |
ⓒ 드림웍스 |
4.3영화제 상영작은 아니지만 스필버그 감독은 2005년에 영화 <뮌헨>을 내놓는다. 알다시피 뮌헨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살해한 '검은 9월단'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보복살해하는 영화다. 놀라운 사실은 이 영화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한쪽 편을 들기보다는 이런 식의 테러나 보복으로는 평화가 찾아올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다는 점이다.
양쪽에서 비판을 받는다 할지라도 보편성의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용기다. 사업가 쉰들러(리암 니슨)가 더 위대한 점은 그가 독일인이면서도 인도주의라는 보편성의 관점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 1100명을 죽음에서 구했다는 사실이다.
"힘이란 죽일 정당성이 있어도 안 죽이는 것"
쉰들러의 공장 일을 돕던 유대인 회계사는 탈무드를 인용해 "한 생명을 구한 자는 세계를 구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역도 성립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생명을 죽인 자는 세계를 죽인 거니까. 쉰들러는 수용소장 거트에게 "가장 큰 권력은 용서"라고 말한다. 거트는 그의 욕실을 청소하다가 얼룩을 지우지 못해 사색이 된 유대인 아이에게 "용서해줄 테니 가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수용소 마당을 가로질러 숙소로 돌아가는 소년을 저격총으로 사살한다.
유대인을 학살하는 나치의 국가폭력은 '정당성의 논리'로 포장돼 관리와 군인들은 학살을 '임무 완수'로 여기게 된다. 쉰들러는 거트에게 그런 '정당성의 논리'도 비튼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이스라엘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힘이란 죽일 정당성이 있을 때라도 안 죽이는 겁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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