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가벼운 삶을 향한 상승의 미학
며칠 여행을 다녀왔더니, 대문을 열어주는 옆지기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하다. 무슨 좋은 일이 있었냐고 물으니 그녀는 다짜고짜 내 손을 잡아끈다. 거실로 순순히 끌려들어 가 보니, 거실에서 안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묵은 창호지를 뜯어내고 새 창호지로 단장을 한 것.
하얀 창호지를 바른 문에는 울긋불긋 단풍이 곱게 피어 있었다. 완연한 겨울인데 문은 울긋불긋 가을. 나무 밑에 떨어진 가을 잎새를 틈틈이 모아 책갈피에 끼워두는 걸 보았는데, 그 가을 잎새들을 새 창호지를 바르며 문살과 문살 사이에 끼워 넣은 것. 자세히 들여다보니 단풍잎도 있고, 은행잎, 산수유잎, 구절초잎, 국화 꽃잎, 맨드라미 꽃잎도 보인다. 새 창호지를 바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기에 고생했다고 말하자, 겸연쩍은 듯 미소를 지으며 되묻는다. “꽃살문같이 보이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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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맞아 거실문에 새 창호지
아내가 문살 사이에 꽃잎 끼워
그 아름다움에 마음 가벼워져
새 날의 항해도 늘 경쾌했으면
」
난 호들갑스레 박수를 치며 대꾸한다. “꽃살문보다 더 아름답네요!” 사실 꽃살문은 정교한 꽃무늬로 장식된 사찰의 문. 사찰의 문들을 아름다운 꽃무늬로 장식한 것은 이승에서 극락으로 들어가는 경계이기 때문이라고. 지극한 환희가 넘치는 경계인 만큼 불가에서 최상의 법과 진리를 상징하는 꽃을 장식의 소재로 삼았다고 한다.
하여간 낡은 격자무늬 문살에 얹힌 가을 잎새들 때문에 꽃살문 못잖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것. 비록 낡은 한옥에 살지만, 식물을 좋아하고 꽃 가꾸기를 사랑하는 옆지기 덕분에 한옥살이가 넉넉하고 여유롭다. 해마다 꽃씨를 받아두었다가 봄이 오면 마당 곳곳에 뿌려 철철이 피는 꽃들을 감상하도록 해주고, 광목 같은 천에 갖가지 꽃들을 소재로 한 수(繡)도 틈틈이 놓아 방마다 걸어두어 함께 즐기게 해주니 그저 고마울 뿐.
그래서 어느 날 당신은 왜 그렇게 꽃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꽃들은 저마다 모양도 색깔도 다른데 아름답잖아요. 난 아름다운 걸 보면 마음이 가벼워져요.”
옆지기 자랑을 하면 팔불출이라지만, 그녀는 사물에 대한 집중력이 남다르다. 불가에서는 한마음으로 사물을 생각하여 마음이 하나의 경지에 정지하여 마음이 흐트러짐이 없는 상태를 ‘선정’(禪定)이라고 하는데, 꽃을 가꿀 때나 꽃수를 놓을 때 보면 선정에 든 수행자 같은 느낌. 누가 뒤에서 불러도 미동도 하지 않고 자기 일에 몰입한다. 그렇게 몰입하면 마음이 가벼워질 수밖에. 사실 누구나 아름다운 것들과 깊게 사귀면 희열이 샘솟고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지 않던가.
예술은 인간이 스스로를 극복하면서 삶을 고양하는 방편이라고 하는데, 옆지기의 꽃 사랑이나 나의 시 사랑은 곧 삶의 무거움을 극복하고 가벼워지기 위한 적극적 몸짓인 것. 인간 정신의 가벼움을 향한 상승 의지를, 프랑스의 한 예술철학자는 이렇게 풀이한다.
“정신적 삶은 커지려고 하고 위로 오르고 싶어한다. 그것은 본능적으로 높은 곳을 추구한다. 다시 말해서 시적 이미지들이란 우리를 가볍게 하고 우리를 들어올리고 우리를 상승시킨다는 점에 있어서 인간 정신의 활동이다. (…)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공기적이다.”(가스통 바슐라르, 『공기와 꿈』)
결코 만만치 않은 인생살이를 겪어본 이들은 다 아는 것이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이 무거우면 상승은커녕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울 때 우리는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일들을 감당할 수 있고 힘겨운 일들도 극복해 나갈 수 있지 않던가.
바슐라르는 존재의 4원소 가운데 우리를 가볍게 하고 우리 정신을 상승시키는 요소인 공기로 가벼움의 시학을 펼친 것. 그래서 그는 무거운 삶을 가볍게 하려면 ‘공기적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일상적 표현이 아니라서 낯설지만 꽃이나 시나 아름다운 예술작품과 자주 접촉하는 일은 곧 우리 삶을 가볍게 하는 공기적 훈련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매년 연말이 되면 우리 집에서는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송구영신(送舊迎新) 의식을 치른다. 의식이라고 무슨 대단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크고 작은 문마다 새 한지를 발라 곱게 단장하는 것. 그렇게 하고 난 후 순백으로 거듭난 나무의 영혼 같은 창호지에 은은히 스며드는 볕을 보면서 낡은 과거와 작별하고 새로운 희망의 돛을 올리는 것이다. 새날의 항해가 가볍고 경쾌하기를 비나리하며!
고진하 시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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