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의 영화몽상] 영화와 역사의 진혼곡

이후남 2023. 11. 28.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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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남 문화선임기자

4·19, 5·16, 10·26, 12·12, 5·17, 5·18…. 한국 현대사를 모르는 이에게는 수수께끼 문제처럼 보일 수 있는 숫자다. 각각의 숫자마다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 날짜란 건 현대사를 조금이라도 배우면 쉽게 알 수 있다.

정작 문제는 그다음이다. 각각의 사건과 그 연관을 어떻게 보느냐는 마치 생물처럼 움직이며 지금도 계속되는 역사 혹은 역사 인식과 맞물리곤 한다.

지난주 개봉한 ‘서울의 봄’은 12·12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영화다. 1979년 12월 12일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9시간에 집중해 군사 반란에 나선 군인들, 이에 맞선 군인들, 그리고 때로는 무기력하거나 책임 회피에 급급했던 위정자들을 그려낸다. 반란의 핵심 전두광 역의 황정민, 원칙에 투철한 이태신 역의 정우성을 비롯해 여러 배우가 호연을 보여준다.

영화 ‘서울의 봄’. 왼쪽이 이태신(정우성), 오른쪽은 전두광(황정민)의 뒷모습.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특히 하룻밤에 변곡점이 여럿인 전개는 역사의 큰 흐름을 이미 아는 데도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한다. 이런 전개에 당시의 실제 상황이 반영된 면면을 확인하면 더 놀랍고, 이를 영화적으로 풀어낸 솜씨는 충분히 호평을 받을 만하다. 물론 이태신 캐릭터에서도 짐작되듯, 이런저런 영화적 상상력도 더해져 있다.

한데 이런 상상력이 아예 역사를 뒤바꿔 극 중 해피엔딩이나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일은 없다. 그래서 분노하든 욕을 하든 관객이 정서적으로 반응할 여지는 오히려 커지는 듯싶다. 역사를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이른바 ‘성공한 쿠데타’의 주역들, 권력을 쥐고 부귀영화를 누린 이들을 심정적으로 응징하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영화가 그 후일담을 직접 전하는 건 아니지만, 반란 세력에 맞선 이후 치욕과 비탄의 나날을 살게 된 이들도, 당시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다. 반란 세력 진압에는 실패했을망정 이 영화가 그려내는 그들의 면면은 탐욕스러운 군인들과 대비되어 군인의 본분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정해인이 연기한 극 중 오진호 소령의 모습과 상황에서 떠오르는 실제 인물 김오랑 소령을 포함해서다.

영화 ‘서울의 봄’의 마지막에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음악은 느릿하고 장엄해서 마치 진혼곡처럼 들린다. 그 멜로디는 귀에 익은 군가(‘전선을 간다’)다. 원곡의 후렴구 가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전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전우여 보이는가 한 맺힌 눈동자’.

주말에 이 영화를 보러 간 극장은 극장가의 전통적 비수기 11월에 보기 드물게 관객들로 붐볐다. ‘서울의 봄’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침체에 빠진 한국 영화계에 ‘극장가의 봄’까지 불러내면 물론 좋을 터. 그 전에 지금의 관객 반응을, 12·12에 대한 2023년의 인식을 기억해 두고 싶다. 과거 쿠데타 세력이 자신들을 옹호하며 했던 말들을 떠올리면 더 그렇다.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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