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억 기부했던 그의 양복은 낡았다…"돈은 똥" 말한 '어른'
진주 지역에 100억대 재산 환원
사회‧문화예술‧장학생 대가 없이 후원
“돈은 똥과 같아, 뿌리면 거름 돼”
‘꼰대’란 단어가 더 익숙한 요즘, 제목부터 눈에 띈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감독 김현지)는 경남 진주에서 한약방을 하며 평생 지역사회‧문화예술인‧피해여성‧사회운동‧장학생을 후원해온 김장하(79‧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 선생의 이야기다.
그는 자신이 가난 탓에 못 배운 한을 40대에 전재산을 털어 고등학교를 지은 걸로 달랬다. 1991년 110억원 가치의 건물·땅과 함께 학교를 국가에 헌납했다.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문형배 헌법재판관을 비롯해 서울대 출신 과학자, 의대 교수 등 1000명은 족히 넘는 장학생을 배출했다. 오죽하면 “살아 움직이는 사회보장제도”(김현지 감독)란 별명이 붙었을까. 정작 자신은 헤진 양복, 오래된 찻잔 등을 수십년간 쓰는 검소함이 몸에 뱄다.
언론 인터뷰는 물론 상도 거절해온 탓에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선행을 지역 언론인 김주완(59) 기자(전 경남도민일보 국장)가 30년 시도 끝에 4년 전부터 취재했고, MBC경남 PD 김현지(42) 감독이 합류하며 다큐로 완성했다. 지난해 말 MBC경남에서 첫 방영된 뒤 입소문을 타며 올해 설 특선으로 전국에 방송됐다. 지역 방송국 다큐론 드물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교양 작품상을 받았다.
감독 "선생, 살아있는 사회 보장제도"
15일 극장판 개봉 후엔 엿새 만에 독립예술영화 마의 고지인 1만 관객을 넘어, 26일까지 누적 1만7000명이 관람했다. “이런 어른이 있다는 것 만으로 가슴이 따뜻하다” “나 자신은 세상 헛살았구나 라는 생각에 부끄러웠다”(이상 CGV‧메가박스 예매앱 관람평) 등 호평이 잇따른다.
극장판 개봉 다음날 서울 용산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현지 감독은 “창원MBC가 통합되며 진주로 옮겨온 뒤 2019년 우연히 ‘김장하’라는 낯선 이름과 믿지 못할 선행에 대해 들었고 좋은 우연이 겹쳐 다큐를 만들 수 있었다”면서 “이런 사람이 진짜 어른이구나, 생각했기에 첫 기획서 제목부터 ‘어른 김장하’였다. 널리 알리고 싶어서 처음부터 극장판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지역민들도 뿌듯해 하신다”고 했다. “어른이라는 단어 자체가 기대고 싶고 따뜻한 말인데, 자꾸 잊는 것 같다. 다큐를 보고 위로 받고 우는 관객이 많다”면서다.
“돈 모아두면 똥 되고 흩어버리면 거름 돼”
자꾸 찾아오는 취재팀에게 김장하 선생이 내건 조건은 ‘절대 본인을 우상화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선생이 카메라 앞에 여간해선 앉지 않아, 매일 아침 8시 30분 불편한 걸음을 성실히 옮기는 출근길을 뒤쫓듯 촬영했다. 선생이 직접 말하는 오디오가 부족해 약 짓는 손님 전화 받는 목소리까지 넣었다. 다큐에 흔히 넣는 본인 인터뷰, 생애사 요약이 빠진 이유다.
같은 해 사천에 연 한약방은 갓 스무살 원장이 실력 좋고 정직하단 소문이 나 전국에서 손님이 밀려왔다. 많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1973년 진주로 이전해 어려운 이웃, 학생들을 후원했다.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백정의 해방운동이자 한국 최초 인권운동인 형평운동 기념사업회 초대이사장을 맡아 ‘진주 정신’을 알리는데 힘을 쏟았다.
아낌없이 베푼 그의 철학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다. 불학에서 기대 없이 베푸는 것을 뜻한다. 다큐에 나온 장학생 출신 김종명씨가 “선생님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되어서 죄송합니다”라고 했더니 선생이 그러더란다.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야.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야.”
김장하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한다”
김장하 선생은 자신의 조부를 평생 스승으로 삼고 있다. 이웃 돕기를 솔선수범한 그의 조부는 선생에게 "약방에서 지은 약을 먹고 오래 살라, 나서지 말고 제 역할을 하라"는 뜻의 ‘남성(南星)’이란 호를 지어줬다.
한약방 시대가 저물면서, 운영난도 겪었다. 그럼에도 한약방을 비우면 안 된다며 대통령 당선인의 식사 초대도 거절했다. 그만큼 정치와는 거리를 뒀다. 2000년 출범한 남성문화재단을 2021년 12월 해산하면서, 남은 재산 34억원은 경상국립대에 기증했다.
그는 “2021년 11월 촬영을 시작할 때 약방을 닫으려고 하시던 상황이었는데, 옛날만큼 북적이진 않았지만 약 포장하고, 손님 전화를 받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지난해 폐업할 때까지 감사를 표하려고 찾아오는 시민‧장학생의 발길이 잇따랐다.
김 감독은 “자신의 매일을 평범하지만 성실하게 사시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고 했다. “100억원대 돈을 번 사람이 60년 간 매일 한약방에 출근한다는 게 대단했다”면서 “자기 연민을 내려놓고 그 빈자리에 다른 사람을 연민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비로소 어른의 시작점에 선다는 걸 김장하 선생에게 배웠다”고 덧붙였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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