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도, 듣지도, 말도 말라" 백범 손자로 살아온 애환

박도 2023. 11. 27.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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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 칼럼] 백범 손자, 김진 광복회 부회장을 만나다 ②

[박도 기자]

 백범 휘호 액자 밑에 서다(오른쪽 김진 광복회 부회장, 왼쪽 기자).
ⓒ 광복회 홍보팀장 임소희
 
(지난 기사 "저의 할아버지 백범은 민족밖에 모르는 촌부였습니다"에서 이어집니다)

주중 대사를 원했던 아버지

- 백범 손자로 살아오신 애환을 들려주십시오.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로부터 무척 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행여 할아버지 상관된 일은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내 마음을 다른 이에게 솔직히 드러내지도 말라'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시 친구들에게 도무지 말이 없는 '내성적인 아이'로 비쳤답니다."

백범 서거 후 당신 집은 24시간 도청을 당했단다. 거의 매일 대문 앞에는 엿장수, 양은장수, 땜장이 등으로 변장한 감시(정보)원들에게 출입자 감시 등 요시찰대상으로 거미줄과 같은 촘촘한 감시망 속에 살았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 제가 들은 바로는 백범 서거 후, 우남장(이승만 대통령)께서 아버님(김신)에게는 상당한 호의를 베푸셨다고 하던데요.

"제가 아버님에게 듣고, 지켜 본 바로는 할아버님 시해사건 이후 우남어른께서 '아버님에게 미국으로 이민을 가라'고 하셨답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오로지 당신이 맡은 바, 군무에만 묵묵히 충실하셨답니다. 공군참모총장이 되신 것은 4.19 이후 장면 정권 때였고, 주중대사가 된 것은 제3공화국 박정희 정부시절이었습니다."

- 그때의 얘기를 아시는 대로 좀 더 자세히 들려주십시오.

"아버님이 공군 참모총장으로 예편한 뒤였습니다. 어느 하루 박정희 대통령이 불러서 청와대로 찾아뵙자, 국방부를 맡아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저는 적임자가 아닙니다'라고 사양하셨답니다. 그러자 다른 희망 보직을 묻기에 '주중대사(당시 장개석 정부)를 맡겨주신다면 신명을 다해 양국의 친선과 우의를 돈독히 하겠다'고 말씀 하셨답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이 '주요 5개국 대사도 아닌, 왜 하필 중국이냐'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지난날 나라 없는 백성으로 이 나라 백성 및 임시정부가 중국땅으로 망명하여 풍찬노숙하는 망국민의 어려움을 장개석 총통이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와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제가 주중대사로 부임하여 조금이라도 갚는 게 결초보은의 도리다'라고 말씀 드렸답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발령을 내주시더랍니다.

중국정부(당시 장개석 자유중국 정부)도 그 이튿날로 곧장 아그레망을 보내주셨답니다. 그래서 당시 저는 이대부중에서 한 학기를 다니다가 아버님을 따라 대만(중화민국) 국제중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백범 휘호
ⓒ 박도
 
대의명분에 죽고, 민족정기에 산다

- 백범이 살아계셨다면 6.25전쟁을 몸으로 막으셨을까요?

"할아버지의 우직한 성품으로 봐서, 아마도 인민군 탱크 앞에서 두 팔을 드셨을 겁니다. 하지만 인민군들은 할아버지를 다른 곳(아마 경교장 같은 곳)으로 연행, 격리 시키고 그대로 밀고 내려왔으리라고 생각됩니다."

- 1948. 3. 25. 백범 북행 이야기를 간단히 들려주십시오.

"당시 독립지도자들은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면 분단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해방된 조국이 어느 날 느닷없이 이미 38도선으로 분단이 되었고, 1948년에 이르자 분단된 채 서로 다른 체제의 단독정부를 세우려하는 낌새를 보시고 할아버지는 대경실색하셨나 봅니다. 그때 할아버지는 조국 분단은 필경 오래 지속될 것이고, 곧 동족상잔의 전쟁을 몰고 올 것으로 예단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민족의 비극을 가만히 앉아 지켜만 볼 수 없다고 분연히 일어나 북행길에 오르신 겁니다.

그때 경교장을 찾은 많은 분들의 북행 반대에도 할아버지는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 남(강대국)들이 갈라놓은 38선 위에 단독정부가 선데도 동족끼리 말도 한 번 제대로 못해 보고 마는 미욱한 민족이라는 말은 결코 들을 수 없다'고 죽음을 무릅 쓴 결의로 경교장 뒷담을 헐고는 북행하셨답니다.

미국과 소련의 외세를 등에 업은 남북 단독정부 수립 추진 세력들은 이미 구상한 스케줄 대로, 그들이 강행 하기 전에 남북의 지도자들이 만나 한 번은 진지하게 통일정부 수립 논의를 나눠봐야 한다는 그런 애끊는 충정어린 단심(丹心)으로 떠나셨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북행 길은 민족의 지도자라면 반드시 '가야 하는 올바른 길'이었습니다. 후세인들이 '백범의 북행'과 같은 일도 없이 강대국이 원하는 대로 조용히 그들에게 굽신거리며 남북에 단독정부가 세워졌다면 자존심도, 애국애족의 마음도 없는 못난 겨레라고, 자굴지심이 매우 클 테지요."

광복회 부회장실 실내 한쪽 벽에 백범 휘호 액자가 걸려 있었다. 내가 그 글을 뜨덤뜨덤 읽으며 풀이를 하자 김진 선생이 명쾌하게 풀이해 주셨다.

"'대의명분에 죽고, 민족정기에 산다'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백범이야말로 이 나라의 진정한 '국부(國父)'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더 깊게 각인됐다.
    
 백범 장례식날 운구 행렬로 서울 남대문로를 지나고 있다(1949. 7.).
ⓒ NARA / 재미동포 주태상 발굴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 교육이 부족했던 탓

- 최근 '독립영웅 흉상 이전' 논란에 대해 한 말씀을 부탁 드립니다.

"그런 현상의 근본 원인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대한 우리나라의 역사 교육이 매우 부족했던 탓입니다."

군더더기 없는 명쾌한 답변이었다. 그 말씀을 듣고 보니 바로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대학재학 시절 날마다 등하교 길에 서울 동대문에서 신설동까지 왕산로(旺山路)를 지났다. 그때 그 도로명은 동대문 옆 창신동 뒷산 이름이 '왕산'이라서 그렇게 붙은 줄 알고 무심히 지나다녔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그 도로명이 내 고향 구미시 임은동 출신의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선생을 기리고자 명명된 사실을 알고 난 뒤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훈장으로서 얼마나 부끄러웠던가.

1999년 제1차 항일유적답사 길에 옥수수 밭으로 변한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 옛 신흥무관학교를 찾았다. 그날 현지 조선족 동포로부터 고증을 듣고는 또한 교사로서 신흥무관학교도 잘 몰랐던 독립운동사에 무지한 데 대해서 낯을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귀국 후 이화여자대학교 중앙도서관을 샅샅이 뒤져 여러 석학들이 남긴 선열들의 거룩한 피의 자취인 독립운동사 책장을 넘기게 됐다.

"오늘의 시선으로 과거를 재단하지 말라" "국제 관계는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는 등의 말이 있다.

오늘의 잣대로 한 세기 전의 독립 전사들의 모습은 무기도 죽창이나 낫 등으로 하찮아 보이고, 그 차림새도 바지저고리로 어딘가 엉성해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그분들은 당신의 목숨을 헌 짚신짝처럼 버린, 대단한 애국심과 나라를 되찾겠다는 뜨거운 충성심의 발로로 분연히 일어서셨다. 성공 실패는 생각지 않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으로.

또 다른 예를 들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소련은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자를 쓰러뜨리기 위해 같은 연합국 일원으로 싸웠다. 그 공동의 적인 일본이 항복을 하자, 미소 두 나라는 그때부터는 곧장 서로 세계 패권국이 되고자 냉전 관계, 곧 적대국으로 변했다.

100년 전 우리 독립군들은 악독한 일제와 맞서기 위해 중국과 소련의 영토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공동의 적, 일제와 맞서 싸웠다. 그런저런 우리나라의 근현대사 및 세계사를 보다 깊고 넓게 알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었다면 당국자들은 좀 더 신중하게 처신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평지 풍파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고, 관련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나 뜻있는 백성들의 가슴에 염장을 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저런 얘기를 격의 없이 토로하면서 이는 '독립운동사 교육 부재의 결과'라는 거듭된 진단의 말로 이즈음 논란을 명쾌히 매듭지었다.
  
 백범 존영
ⓒ 백범 기념관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는 나라가 되라

- 할아버지 백범의 행장 중에서 자랑하시고픈 점을 마무리로 들려주십시오.

"저도 박 선생께서 대담 모두에 줄줄 외신 백범일지 속의 '나의 소원'을 무척 좋아합니다. 보시다시피 저쪽(왼편) 벽에 그 말씀을 액자에 담아 두고 늘 할아버님 말씀을 귀 기울이며 듣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 김구 <백범일지> '나의 소원' 중에서
  
 광복회 부회장실에 게시된 백범의 '나의 소원' 한 구절
ⓒ 박도
 
"할아버지는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에 앞을 내다보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K팝', 'K 문화' 등이 세계에서 '한류'로 주목 받는 걸 할아버지는 그때 이미 예견을 하신 탁견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할아버지는 우리 민족은 '우수하다' '겁 없다' '독립정신이 강하다' 등을 이미 한 세기 전부터 체득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나라가 반 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것은 우리 민족이 대단히 우수하고, 겁 없고, 독립정신이 매우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날 우리나라보다 수십 배나 크고 강한 수나라, 당나라군사들과도 맞짱을 뜨면서 굿굿하게 이 나라를 지켜왔습니다. 사실 그런 정신이 우리 국군의 뿌리가 돼야 합니다. 저희 할아버지도 그런 굳센 기질을 선천적으로 타고 나셨기에 황해도 산골 무지렁이 촌부가 겁도 없이 독립운동의 최선봉에서 당신의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버리고 앞장서 활약하신 걸로 생각됩니다.

여러모로 많이 부족한 제가 마무리 말로 국내외 동포들에게 감히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예나 이제나 이 나라 백성들이 저의 할아버지 백범 김구에 대한 줄곧 변함 없는 성원과 희생, 그리고 신뢰와 충성심입니다. 그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 낯설고 물 선 중국 땅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꾸려나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국내외 동포들의 헌신적 물심 양면의 지원 덕분이었습니다. 삼가 그 선열 어른과 후손들에게 백 번의 절을 드려도 부족합니다."

긴 대담을 마치고 나서자 당신이 앞장서서 광복회 정문까지 나와 정중히 배웅 인사를 했다. 나는 돌아오는 길, 이번 대담을 통해 대한민국 '진품 국부는 백범이다'라는 신념이 더욱 깊게 각인됐음을 느꼈다.

아울러 "저희 할아버지는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가가 아니라 오로지 민족밖에 모르는 우직한 촌부(시골할아버지)였습니다"라는 김진 광복회 부회장의 말씀이 내도록 공명돼 내 폐부에 촉촉히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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