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my blue
Q : 11월 15일 개봉한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수성못〉 이후 5년 만의 장편영화예요. 하이퍼 리얼리즘이라는 장르만큼 솔직하고 내밀한 언어로 가득 차 있을 것 같더군요
A : 〈수성못〉에서 방황했던 제 20대를 돌아봤다면, 이번 작품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갈등했던 30대를 투영했어요. 주변 사람과 맺은 관계에 집중했고요. 주목받는 신인 작가 ‘재이’(배우 한해인)와 성실한 영어강사 ‘건우’(배우 이한주)에게 찾아온 뜻밖의 임신을 주제로 아이를 원하지 않는 여자와 가족의 미래를 꿈꾸는 남자, 두 주인공의 갈등을 다룬 이야기예요.
Q : 이야기의 흐름은
A : 건우의 설득으로 임신을 지속하게 된 재이는 육체적 · 심리적 변화로 신작 집필을 어려워해요. 건우는 가장으로서 책임을 지기 위해 학원 분점 원장직을 수락하지만, 점점 쌓여가는 스트레스와 어긋나는 재이와의 관계로 힘들어하고요. 출산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연인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펼쳐져요.
Q : 제목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
A : 피투성이 연인은 재이와 건우가 서로를 지칭하는 말이에요. 강렬한 어감이 주는 에너지가 영화 분위기와 잘 어울렸어요.
Q : 자전적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계기는
A : 무언가 창작할 때 자신에 대해 알려고 해요. 가장 많이 고민하는 주제나 사회 이슈에 대해 생각하죠. 이번 작품의 시나리오를 쓸 때는 결혼과 육아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예술과 영화산업에서 일하는 제 또래들이 불확실한 미래와 경력 단절에 대한 두려움으로 비혼주의자가 아닌데도 결혼을 후순위에 두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요. 저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게 때로는 작업에 방해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요. 지속된 고민과 미래가 겹쳐 보인 순간, 이 주제로 글을 써야겠다고 확신했죠.
Q : 자아실현, 남녀의 공존, 결혼과 출산, 직장 내 부당대우 등 오늘날 많은 사람이 고민하지만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는 주제들이 영화에 녹아 있어요. 개인의 욕망과 모난 감정을 촘촘히 풀어내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A : 시나리오를 쓰며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어떤 상황에 처해지느냐에 따라 사람은 바뀔 수 있으니까요.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재이와 건우가 얼마큼 변할 수 있는지, 그들의 갈등이 어디까지 치달을지 생각하며 하나씩 단계를 구상했어요. 그 사이에 건우의 학원 원장, 재이의 작가 동생 보리 같은 주변 인물이 둘에게 때로는 좋은 영향을, 때로는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했고요. 모든 것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느낌으로 영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Q : “이기적이면 안 되나요?”라는 재이의 대사는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를 담고 있어요. 커리어를 우선하는 여성의 선택이 이기심으로 치부되는 차별적인 시선에 당당히 맞서는 한마디이기도 합니다
A : 문장 앞에 괄호가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원하는 것을 하는데 그게 이기적인 거라면 “이기적이면 안 되나요”라고 묻고 싶었어요. 재이가 끊임없이 딜레마를 겪고, 변화 때문에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이 질문만은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회나 개인이 가진 관념과 압박에 의해 선택이 좌절되더라도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요.
Q : 건우의 퇴근길에 자리한 가로등이 영화에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건우가 거듭 민원 접수를 해도 고장 나 있던 가로등이 재이가 이별을 통보받은 밤, 반짝 켜집니다. 의도가 있는 연출이었을까요
A : 건우가 주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로등이 켜지면서 재이가 걸어온 길을 환하게 비추거든요. 걷다가 문득 뒤돌아서 바라본 길이 너무 아득해 보였을 것 같아요. 그동안 재이는 길이 어두운 줄도 모르고 걸어왔을 테고, 그게 매일 밤 건우의 퇴근길이기도 했을 테니까요. 복잡한 마음을 안고 다시 앞으로 돌아섰을 때, 눈물을 흘리면서도 끝까지 길을 걸어가는 재이의 뒷모습이 마냥 쓸쓸해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순간 가로등이 켜지는 것이 중요했고요. 이야기 구조상 가로등이 꺼지면서 예기치 못한 사건이 시작되고, 켜지면서 서사를 마무리 짓는 역할을 했어요.
Q : 재이가 가로등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A : 촬영 현장에서 모니터로 그 장면을 볼 때 같이 울컥했어요. 사실 해인 배우에게 어떤 표정의 변화도 요구하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쳐다보고 다시 집으로 꿋꿋이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한참 뒤돌아보다 다시 앞을 쳐다보는 그 순간에 눈물을 한 방울 흘리더라고요. 어떤 감정이었는지, 의도한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직까지 묻지 않았어요. 그건 저만의 궁금증으로 남겨두고 싶어요.
Q :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는 장면은
A : 아기 유골함을 바라보는 재이의 모습. 그 순간만큼은 재이가 영화 속 캐릭터로 보이지 않고 풍경화처럼 보였어요. 차마 유골함 가까이 앉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는 재이의 모습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어요. 그림 속 한 장면처럼 오래 바라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해가 천천히 구름에 가려지면서 유골함과 재이가 어둠속으로 잠길 때까지 가져간 긴 테이크를 편집하지 않고 그대로 썼어요. 참 아름답고 미스터리한 장면 같아요.
Q : 당시 재이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요? 모성애인지, 아니면 과거를 회상하는 건지
A : 아직도 재이의 감정을 모르겠어요. 그저 유골함과 가까이 앉을 수 없다는 것만 알 수 있었어요. 해인 배우에게 눈물이 난다면 울어도 좋지만, 유골함이라고 억지로 울 필요는 없다고 했어요. 재이라는 캐릭터는 결국 아이의 성별을 궁금해하지 않은 산모였으니까요. 이 영화는 ‘원치 않은 아이’가 중요한 영화예요. 죽은 아기가 축복받지 못한 아이로서 영화 속에서 재이, 건우와 함께 존재했기 때문에 아기와 재이의 마지막 장면도 필요했어요. 다만 저 역시 그 감정을 쉽게 헤아릴 수 없어서 계속 알아가고 싶은 장면이에요.
Q : 영화를 보면서 같이 고민하면 좋을 질문은
A : ‘삶이 내가 원하던 방향대로 흘러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진정한 욕망을 알지 못한 채로 무작정 걸어가다가 잘못된 방향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것이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인지 고민된다면 잠깐 멈춰 서서 지금의 삶을 돌아보길 바라요.
Q : 한 인터뷰에서 “〈수성못〉을 연출하던 당시의 나는 초보 운전자”라고 했어요. 한 번의 장편영화를 더 발표한 지금을 정의한다면? 여전히 초보 운전자인지, 아니면 운전에 조금 능숙해졌는지
A : 20대 때 인생의 고민이 있었듯이 30대가 돼서도 그 시기만의 난제가 있더라고요. 그때마다 힘들어하고 고민하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면 ‘넘어지는 게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것, 그때 넘어지고 지금 살아 있듯이 비슷한 확률로 지금 넘어져도 10년 뒤의 저는 또 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일희일비하지 말고, 힘든 일도 잘 이겨내자는 마음가짐을 얻은 것 같아요. 좋게 말하면 조금은 여유가 생겼고, 나쁘게 말하면 체념한 거죠(웃음). 인생과 저에 대해서.
Q : 다음 이야기의 행방은
A : 아직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있지 않지만 꾸준히 불안과 공포에 대해 쓰고 싶어요. 그로부터 비롯되는 상반된 가치관과 딜레마를 풀어내는 게 제 화두이기도 해요. 내면의 감정을 어떻게 시각화할 수 있는지 늘 궁금하고요. 앞으로도 직접 만들어보고 싶어요.
Q : 재이와 건우가 인연이었다고 생각하나요
A : 네. 인연이죠. 지금의 결말에서도 서로 최선을 다했고요. 함께 악몽 같은 시간을 겪었고, 그 꿈에서 깨어나는 걸 선택한 것도 충분했다고 생각해요. 각자의 길을 가더라도 둘은 영원히 서로를 지울 수 없을 것 같아요. 죽기 전에 다른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더라도 이 시기를 관통했던 그들은 함께였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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