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 살수록 뿌듯한 조상, 독립운동가 김이직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3. 11. 27.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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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후손들이 증언한 김이직의 일대기

[김종성 기자]

 김이직의 후손들. 왼쪽부터 안영수·김용관·이명순·김지나·김영자.
ⓒ 일제청산연구소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은 35년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다. 국권이 침탈된 1910년에 사회의 중추를 이룬 2040세대 상당수는 자기 생애 내에 나라를 되찾았다.

한국보다 31년 빠른 1879년에 일본 식민지가 된 유구왕국(류큐왕국·오키나와)은 아직도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1580년에 스페인 식민지가 돼 1816년에야 그 지배를 벗어났다. 안타까운 이런 사례들에 비하면, 한국은 비교적 빨리 나라를 회복한 셈이다. 하지만 그 35년 동안에 식민지 한국은 인류 최악의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됐다. 위험천만한 상태에서 식민 지배를 받으며 독립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한국을 지배한 일본은 1914년과 1939년에 발발한 두 차례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했다. 한국 독립군은 제2차 대전 때 일본의 적들과 손을 잡았다. 식민 지배를 겪은 기간이 역사상 최악의 전쟁들이 발발한 기간과 겹친다는 사실은 이 시기 한민족의 운명이 얼마나 긴박했는가를 보여준다.

한국은 두 번째 대전의 결과로 일본의 지배를 벗어났다. 하지만 대전 뒤에 독립운동진영이 겪은 일은 1차 때나 2차 때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재(在)러시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이 겪은 1920년 4월 참변과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가 겪은 1921년 자유시 참변 등으로 상징되듯이, 1차 대전 전승국인 일본은 러시아까지 쫓아가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

비슷한 일이 2차 대전 직후에도 있었다. 한·중 두 민족의 항일군대와 연대했던 2차 대전 전승국 미국은 전투 종료 3주 만인 1945년 9월 7일 남한에 대한 점령을 선언했다. 그런 뒤, 남한 독립운동가들을 좌파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해방 직후에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그룹은 경제력을 쥔 친일파가 아니라 대세와 명분을 쥔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이들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조직해 전국 치안을 속속 장악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불리한 처지에 놓인 친일파들과 손잡고 한국 독립운동진영을 억압했다. 그런 뒤 남한 땅을 근거로 동아시아 냉전 질서를 구축했다. 두 대전의 승패 여하를 떠나, 대전 뒤에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전승국에게 화를 입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화를 입은 대표적 인물 중에 사후 백 년이 넘도록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인물이 있다. 활동 내용으로 보나 비극적 최후로 보나 집중 조명돼야 마땅한데도, 여전히 그늘에 가려진 독립운동가가 있다. 지난 26일 경기도 하남시 초이화평교회에서 열린 일제청산연구소(소장 양진우 목사) 제6차 월례포럼에서 소개된 독립운동가 김이직(본명 김정일)이 그 주인공이다.

이날 김이직의 독립운동을 소개한 발표자는 김이직의 증손녀인 김지나씨의 남편이며, 철원 국경선평화학교 이사인 안영수 화평교회 목사다. 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 등과 함께 김이직의 독립운동을 추적 중인 그는 '김이직의 독립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의'라는 주제로 김이직 일대기를 소개했다.

김이직의 독립운동 활약상
 
 포럼에서 발표하는 안영수 목사.
ⓒ 일제청산연구소
 
역사학계에서 규명된 사실관계와 더불어 김이직 가문에서 전승되는 일화를 곁들이는 방식으로 강의한 안영수 목사는 김이직이 러시아로 망명한 동기를 강의 초반에 소개했다. 일본이 강화도사건(운요호사건)을 도발한 1875년에 지금의 평안남도 남서부 용강군에서 태어나고 대한제국 장교로 근무한 김이직이 고국을 떠나게 된 것은 일본 때문이었다.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이후의 의병장 활동으로 인해 일제의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안 목사는 설명했다.

러시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에게 레드 콤플렉스를 씌우려는 시도가 금년 하반기 들어 두드러졌지만, 김이직이 망명할 당시만 해도 러시아는 봉건국가였다. 러시아를 선택한 것은 한국과 가까우면서도 일본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곳을 항일투쟁 근거지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에 관해선, 홍범도 역시 다를 바 없다. 러시아에 사회주의정권이 들어선 것은 이들 모두에게 뜻밖의 사태였다.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사전에선 1907년에 김이직이 민란을 일으켜 지방 관헌들을 처단한 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다고 말한다. 그가 일으킨 민란이 일본과 관련된 의병 활동이었음을 보여주는 설명이다. 장교를 그만두고 항일투쟁에 뛰어 들어갔다가 일본에 쫓겨 러시아로 내몰렸던 것이다.

32세 때인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 북쪽인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간 김이직은 건재 약국인 덕창국을 공동 경영하면서 이곳을 독립운동 근거지로 만들었다. 2007년에 <역사문화연구> 제26집에 실린 반병률 교수의 논문 '4월 참변 당시 희생된 한인 애국지사들'은 "덕창국은 러시아와 중국에서 활동하던 정치 망명자들이 서신 연락을 하거나 유숙해가는 장소였으며 경제적 원조를 받는 곳"이었다고 설명한다.

포럼에서 안 목사는 이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덕창국이 독립군 부대에 식량·의복·신발 기타 군수품도 제공했다고 덧붙였다. 덕창국은 사람을 살리는 약재뿐 아니라 한민족의 독립을 위한 약재도 취급하는 약국이었던 셈이다.

독립운동을 위해 자금이나 장소를 제공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지만, 김이직의 활동은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전직 장교이자 의병장인 그는 자금과 장소를 후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자신이 직접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안영수 목사는 김이직이 1913년에 한국인 학교인 동흥학교를 세우고, 홍범도·최재형·이상설·이동휘·이동녕이 지도부로 참여한 권업회의 지회 총무가 된 일을 소개했다. 또 1918년에 러시아 교민들의 자치단체이자 독립운동단체인 전로(全露)한족회중앙총회 상설위원으로 선출된 일도 언급했다. 3·1운동 직전에는 임시정부 형태를 갖춘 대한국민의회의 상설위원으로 선임됐다고 안 목사는 말했다.

김이직의 자금력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선전하거나 지원하는 데도 활용했다. 안 목사는 김이직이 1914년에 안중근 전기를 간행하기 위해 기념사진을 판매한 일, 1919년에 지금의 서울역에서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와 함께 단체 활동을 한 일도 소개했다.

이와 더불어, 1919년 니콜리스크에서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동포들을 구제하기 위한 활동을 벌인 일도 포럼에서 언급됐다. "콜레라가 창궐하자 엄주필 선생 등과 함께 임시위원회를 열어서 구제 사업을 펼칩니다"라고 안 목사는 설명했다. 김이직이 독립운동과 약국 사업뿐 아니라 교민들의 건강과 보건에까지 신경을 쓰는 지도자적 면모를 갖추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같은 활약상은 일본이 그의 목숨을 노리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3월 러시아 땅에서 한국 독립군 약 380명이 러시아군과 연합해 일본 군인 및 관원 700여 명을 살해했다(니항사건). 그 직후 일본이 보복 차원에서 벌인 것이 한국 교민들을 겨냥한 4월 참변이다.

이때 피해를 입은 대표적 인물들이 최재형·엄주필·황경섭과 더불어 김이직이다. 4월 5일 일본군에 체포된 그는 이틀 뒤 살해됐다. 3·1운동과 니항사건에 대한 일본의 보복으로 김이직이 이 참변의 희생자가 됐던 것이다. 일본군이 그에게 분풀이를 했다는 것은 그 전까지 그가 치열한 독립운동을 펼쳤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자료다.

후손들의 자부심
 
 안영수 목사가 사용한 파워포인트 화면.
ⓒ 안영수
 
순국 직후의 김이직은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안영수 목사가 파워포인트 화면으로 소개한 1920년 5월 15일 자 <독립신문> 기사는 "동포에 대한 공헌은 말할 수 없이 많아 난곤한 동포에게 밥 먹이며 의복 입히고 잠재우고 노자 주기를 십년 일일 같이하다. 씨가 도아한 지 십여 년에 일푼 저축이 없음은 그 소득을 모다 교육·구제 등 자선사업으로 산한 고라"라고 추모했다.

사업을 크게 벌였고 사업에서 실패하지 않았으므로 돈이 많아야 마땅했다. 그런데 러시아로 넘어간 지 십여 년이 되도록 저축 한 푼을 못했다. 십년을 하루 같이 교육·구제 등의 자선사업에 재산을 모두 흩뿌린 결과라고 당시 사람들이 평가했음을 위 기사에서 느낄 수 있다.

안영수 목사의 발표에 뒤이어 연단에 선 증손녀 김지나씨는 "조상이 독립운동을 하신 것에 대해서 가면 갈수록 뿌듯하고, 마음에 어떤 때는 부담도 되고요"라고 한 뒤 "저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기준을 두면서, 희생하면서, 나라사랑과 민족사랑 했던 그 마음을 본받으려고 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또 다른 증손녀인 김영자씨는 "살아가면서 일이 생길 때마다 내가 그분들의 후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증손자 김용관씨 또한 "할아버지·할머니 정신을 받아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이직의 독립운동에 대한 후손들의 자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김이직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런 그의 목숨을, 일본은 러시아까지 쫓아가서 말살했다. 역사는 그의 죽음을 4월 참변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한다. 일제 식민지배기간에 발발한 두 차례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전승국들에 의해 짓밟힌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비극적 운명이 김이직의 생에서도 나타난다.
 
 일제청산연구소 제6차 월례포럼 포스터
ⓒ 일제청산연구소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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