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사무실 턴 영업사원, 그는 왜 그랬을까?

김성호 2023. 11. 27.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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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596] <글렌게리 글렌 로스>

[김성호 기자]

상투적인 표현으로 연기대결이란 말을 흔히 쓴다. 뛰어난 배우들이 서로의 역량을 견주듯이 한 작품 안에서 절정의 연기력을 뽐낼 때 연기대결이란 표현을 쓰는 것이다. 한국에서만 쓰는 말은 아니다. 할리우드에서도 마치 결투하듯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두고 'Acting showdown'이란 표현을 흔히 쓰고는 하니까.

대결과 결투란 말이 주는 인상은 확연하다. 이기지 못하면 패하고 마는, 승자독식의 링 위에 선 자의 날 선 긴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마찬가지, 이런 표현을 듣는 연기를 보고 있자면 보는 이조차 살이 떨리는 인상을 받게 되고는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명품연기, 있는 그대로 극중 인물이 되는 데 온 힘을 다하는 배우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배우의 역량이 가장 잘 사는 건 역시 연극무대가 아닌가 한다. 영화를 통조림이라 한다면 연극은 날것 그대로의 재료로 음식을 하는 듯, 현장성과 즉흥성이 최대치로 살아나기 때문이다. 카메라 움직임과 편집, 눈속임을 할 수 있는 각종 기술을 쓰지 못하니 관객 눈 앞에서 저의 역량을 한껏 펼쳐내야만 한다. 그중 배우의 기량은 연극이 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며 파괴적인 무기가 된다. 배우의 연기력을 극대화하는 작품이 연극 가운데 특히 많을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 글렌게리 글렌 로스 포스터
ⓒ 우진필림
 
퓰리처상 받은 연극, 영화로 다시

손꼽을 만한 연기대결이 펼쳐진 작품을 논할 때면 빠뜨릴 수 없는 영화가 있다. 1984년 퓰리처상을 받은 데이빗 마멧의 연극 <글렌게리 글렌 로스>를 바탕으로 한 동명 작품이다. 연극을 원작으로 한 작품답게 많지 않은 장소에서 수많은 대화가 오가고,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가 제 성격을 바탕으로 혼신의 연기를 쏟아낸다.

1993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당대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들이 총출동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 파치노와 잭 레먼을 필두로 알렉 볼드윈, 에드 해리스, 알란 아킨, 케빈 스페이시 등이 한 작품에 나오는 것이다. <대부> 시리즈의 알 파치노야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 1959년 작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끝내주는 연기를 펼쳤던 잭 레먼은 노구를 이끌고 중년의 배우들과 합을 맞춘다.

알렉 볼드윈, 에드 해리스, 알란 아킨, 케빈 스페이시 또한 연기로 일가를 이룬 대가들이다.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에도 이미 톱스타 반열에 올라있던 이들이 한데 등장해 강렬한 연기를 펼친다. 러닝타임 내내 가득 들어찬 연기는 보는 이를 압도할 만큼의 에너지를 뿜어내고, 영화는 그 힘을 바탕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이야기 또한 연기를 극대화하는 데 최적화돼 있다. 영화는 미국 시카고의 기획부동산 판매회사 지사 사무실을 배경으로, 실적압박에 내몰린 영업사원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이 사무실은 관리자 격인 사무실장 존(케빈 스페이시 분)과 네 명의 영업사원으로 구성돼 있다. 레빈(잭 레먼 분), 모스(에드 해리스 분), 에르노우(알란 아킨 분), 로마(알 파치노 분)가 그들이다. 매달 판매 1위를 차지하는 로마와 달리 레빈과 모스, 에르노우는 매달 할당을 채우기도 벅차다.
  
▲ 글렌게리 글렌 로스 스틸컷
ⓒ 우진필림
 
판매실적에 쫓기는 영업사원의 삶

사무실 앞에 놓인 칠판에는 이들이 이달 판매한 실적이 금액으로 표시돼 있는데, 본사 차원의 끊임없는 실적 압박에 몇은 해고 위기까지 겪고 있다. 영화는 이들의 일상 중 어느 회의 자리를 포착한다. 본사에서 내려온 잘 나가는 영업임원 블레이크(알렉 볼드윈 분)가 회의 자리에 등장해서는 제 차와 시계를 자랑하며 지사의 실적을 맹비난한다. 무능력한 패배자들은 실패를 반복한다며 어떻게든 나가서 판매를 해오라고 직원들을 몰아붙인다. 인격모독에 가까운 그의 압박에 레빈과 에르노우는 주눅이 들지만, 모스는 커다란 반감을 감추지 못한다. 영업 또한 인간이 하는 일로, 성과에 대한 압박을 하는 것이 지나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영업사원의 삶이란 쳇바퀴처럼 실적을 쫓아야 하는 일이다. 1등을 하면 캐딜락을 받고, 꼴찌를 하면 쫓겨나게 되는 치열한 경쟁 구도 가운데 사원들은 흩어져 부동산을 팔기 위해 여념이 없다.

문제는 상황이 좋지 않다는 점이다. 이들의 영업이란 부동산에 관심이 있는 잠재 고객들에게 전화를 걸어 부동산을 파는 일로, 그 명단은 본사가 분배한다. 그러나 그 명단 중 상당수는 쓸모없는 것으로 막상 만나보면 빈털터리인 경우가 태반인 것이다. '글렌게리'라 불리는 상류고객 명단은 언제나 실적 상위자에게만 주어지니 이 사무실에선 오로지 로마만이 그 명단으로 영업을 한다. 명단 때문에 실적을 올릴 수 없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사원 중 레빈의 사정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중병을 앓는 딸의 병원비 마련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몰려 있는 그다. 한때는 사무실의 자랑이었던 '글렌로스' 농장을 팔아치우고 자동차를 받기도 했던 그지만, 누구도 자랑스런 과거를 기억해주지 않는다. 치열한 자본주의 사회, 그중에서도 첨병이라 할 만한 영업부문에선 언제나 새로움이 미덕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해고 위기에 몰린 레빈은 명단을 쥔 존에게 사정사정을 해보지만, 존은 글렌게리 명단 하나에 50불의 대가와 성사비용의 20%를 대가로 요구한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다.
  
▲ 글렌게리 글렌 로스 스틸컷
ⓒ 우진필림
 
누군가 사무실을 털고 명단을 훔쳤다

영화는 한순간에 급전한다. 사원들 중 가장 불만이 많은 모스가 일을 꾸미는 것이다. 그는 동료 에르노우를 꼬드겨 사무실을 털기로 모의한다. 사무실에 있는 글렌게리 명단은 따로 팔아치워도 돈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밖에도 쓸 만한 물건들이 제법 있을 테니 가만히 있다 해고되는 일보다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범행은 실제로 이뤄진 듯, 다음날 털려 있는 사무실로 이들이 출근해 한 명씩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된다. 영업사원들에게 실적 압박을 하고, 사무실이 털려 고객명단이 사라지고, 그 용의자를 색출하는 과정이 영화의 중추를 이룬다.

영화는 그저 줄거리를 넘어 연기를 보는 맛이 쏠쏠하다. 마치 연기가 줄거리보다도 중요하다는 듯, 배우들이 수두룩 빽빽한 대사를 서로를 향해 쏟아낸다. 특히 레빈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수다스러운 인물로, 얼핏 다정해보이지만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는 상대를 향해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전세가 역전되면 쩔쩔매는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느니 험난한 세상을 오로지 책임감으로 살아가는 이 시대 가장들이 공감할 밖에 없는 캐릭터다.

레빈의 사정이야 안쓰럽기 짝이 없다. 전 시대의 유물처럼 다른 판매사원과 달리 오래된 전략에 기대는 그다. 다른 직원보다 나이도 한참 많은 데다, 고객과 어떻게든 친분을 쌓아 부동산을 팔아치우려는 모습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렇지만 그의 판매방식은 새로운 세대에겐 도저히 먹혀들지 않는 것이어서 가뜩이나 좋지 않은 명단이 더욱 어려움을 겪도록 하는 것이다. 극단에 내몰린 레빈의 선택과 그를 해소하기 위한 발버둥, 극한의 환경에서 변화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상당한 긴장을 자아낸다.

로마의 이야기 또한 인상적이다. 판매실적 1위를 자랑하는 그는 특유의 언변과 존재감으로 다른 이를 구워삶는 데 능하다. 의존적인 성향을 가진 이를 놓치지 않고 술자리에서 꼬드겨 부동산을 판 뒤엔 법의 허점을 노려 계약취소를 해주지 않는 방식을 자주 쓰는 듯하다. 경찰 수사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에 찾아온 이를 어떻게든 구슬려 돌려보내려는 그의 발버둥이 흥미진진한 재미를 더한다.
 
▲ 글렌게리 글렌 로스 스틸컷
ⓒ 우진필림
 
명배우들의 불꽃 튀는 연기대결

한국에도 여전히 성행하는 기획부동산은 염가에 부동산을 매입한 뒤 각종 호재와 엮어 사람들에게 팔아치우는 행위다. 일부는 저평가된 부동산을 제값을 받고 파는 중개이자 투자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사기와 엮일 만큼 문제가 되고는 한다. 특히 하나만 걸리란 식의 영업전화에 부동산을 산 이들은 대개 그 끝이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영화 또한 그와 같아서, 이들은 마치 제가 대단한 사람인 양 임원 직위를 사칭하기도 하고, 동료를 제 고객으로 위장하여 어느 잘 나가는 회사 임원과 거래로 바쁜 듯 꾸미기도 한다. 온갖 술수를 동원하여 부동산을 팔아치운 뒤 그 이후 나오는 불만엔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내보이는 듯하다. 고작 네 명의 영업사원과 한 명의 관리직원을 통하여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해내는 솜씨가 퓰리처상을 받은 원작을 가진 작품답구나 싶다.

여러모로 <글렌게리 글렌 로스>는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적절한 작품이다. 실적압박을 받는 사원들과 그들의 쳇바퀴 도는 팍팍한 삶, 또 상품의 질보다는 판매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기업윤리 등이 우리가 사는 오늘의 한국에도 없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전화를 통한 기획부동산 판매가 여전히 사회에 적잖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니 그 안에 깃든 인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현상을 이해하는 첩경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특히나 명배우들의 연기대결이 시종 관심을 잡아끈다는 점에서, 이들 명배우들의 전성시대를 확인하고픈 관객들에게 좋은 선택지가 되어줄 테다. 정말이지 이런 영화는 흔치가 않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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