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스코어러의 계보에 도전하는 '작정현'

이준목 2023. 11. 2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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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는 고양 소노 '작은 이정현', 또 하나의 신화 만들까

[이준목 기자]

▲ 이정현 3점슛 19일 고양소노아레나에서 열린 2023-2024 정관장 프로농구 정규리그 고양 소노와 원주 DB의 경기에서 고양 이정현이 3점슛하고 있다.
ⓒ 연합뉴스
 
'고양 아이돌' 이정현이 폭발한 고양 소노가 홈에서 서울 SK의 5연승 도전을 저지하며 3연패 탈출에 성공했다. 11월 26일 고양 소노아레나에서 열린 2023-2024 정관장 프로농구 2라운드 경기에서 홈팀 소노가 SK에 84-77로 승리했다.

이정현(25점 6어시스트, 3점슛 5개)이 최다 득점을 올리며 선봉에 섰고, 부상에서 복귀한 전성현(18점, 3점슛 4개)의 외곽포와, 외국인 선수 치나누 오누아쿠(17점 14리바운드 8어시스트)가 트리플더블급 활약으로 뒷받침했다. 센터 김민욱(11점 7리바운드)도 3점슛 3방을 터뜨리며 힘을 보탰다.

SK는 에이스 자밀 워니(22점 6리바운드)와 안영준(16점 7리바운드)이 분전했지만, 베테랑 김선형(4점 3어시스트)과 오세근(1점 4리바운드)이 또다시 실망스러운 활약을 보이며 4연승 행진이 중단됐다.

소노는 지난 2022-2023시즌부터 이어진 SK전 5연패 사슬을 끊어내며 5승 8패로 7위에 올라섰다. SK는 8승 5패로 수원 KT와 공동 3위가 됐다.

소노는 직전 이정현이 11득점으로 묶였던 창원 LG전에서 무려 31점 차(49-80)로 참패하며 올시즌 팀 최소득점이라는불명예 기록을 세운 바 있다. 하루 만에 치러진 SK전에서 소노는 체력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3점슛 14방(14/34, 41.2%)을 꽃아넣는 특유의 '양궁농구'를 선보이며 SK의 수비를 침몰시켰다.

특히 각성한 이정현은 3점슛 6개를 던져 팀내 최다인 5개를 적중, 고감도 슛감을 과시하며 전날의 부진을 만회했다. 전성현이 복귀하면서 아직 완벽한 컨디션은 아니었음에게도 이정현에게 집중되었던 수비를 분산시켜주는 효과가 컸다.

프로 3년 차를 맞이하고 있는 이정현은 리그 최고의 스코어러로 거듭나고 있다. 2021-2022시즌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로 입단한 이정현은 팀을 옮긴 적은 없지만 데뷔 이후 매년 팀명과 모기업이 오리온-캐롯(데이원)-소노로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이미 고교 시절부터 탁월한 기술을 지닌 듀얼가드로 꼽혔던 이정현은, 프로 진출 이후 김승기 감독의 조련과 스피디한 양궁농구 전술 하에서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매년 급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데뷔 첫해인 2021-2022시즌 오리온에서 52경기 평균 9.7점(전체 33위, 국내 24위), 2022-23시즌 캐롯에서 52경기 15점(전체 12위, 국내 7위)을 기록했던 이정현은 올시즌에는 13경기에서 무려 21.6점을 터뜨리며 전체 5위, 국내 선수 1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올시즌 평균 20득점을 넘긴 선수는 리그를 통틀어 총 6명뿐인데 이 중 국내 선수는 이정현이 유일하다.

이정현은 올시즌 지난 10월 22일 DB와의 개막전(7점)을 제외하면 전 경기에서 두 자릿수 득점 이상을 기록했다. 이 중 20점 이상을 올린 것만 벌써 9경기이고, 30점 이상을 올린 것도 2경기나 된다. 이달 6일 KT전부터 19일 DB전까지는 5경기 연속 21+득점을 올리는 기록도 세웠다.

이정현은 경기당 3.3개의 3점슛을 무려 45.3%의 높은 적중률로 성공시키고 있으며 누적 3점슛은 43개로 전체 1위다. 또한 가로채기도 1.7개로 전체 1위, 어시스트는 6.5개로 이선 알바노(8.1개 원주 DB)에 이어 2위에 이름을 올리며 그야말로 공수 다방면에서 다재다능한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시즌 초반 외국인 선수 문제로 공격력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소노가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이정현의 외국인 선수급 활약 덕분이다.

이정현의 외국인 선수급 활약
 
▲ '다시 역전이다' 19일 고양소노아레나에서 열린 2023-2024 정관장 프로농구 정규리그 고양 소노와 원주 DB의 경기에서 고양 이정현이 역전 3점슛을 성공한 뒤 백코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러한 이정현의 활약이 대단한 것은, 국내 선수가 평득 20득점 이상을 넘기는 자체가 매우 진귀한 기록인 데다, 팀전력상 상대 집중견제를 받는 상황에서도 꾸준한 활약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농구 초창기에는 국내 선수도 평균 20점을 넘기는 경우가 자주 나왔다. 프로농구 1세대인 서장훈, 현주엽, 문경은, 조성원, 김영만, 방성윤, 김상식, 전희철 등은 국내 선수로 시즌 평균 20점을 넘긴 선수들이다. 특히 서장훈은 유일하게 20점대 평균 득점을 기록한 시즌만 무려 6차례에 이르며, 조성원은 2000-2001시즌 25.7점(전체 5위)로 국내 선수 한 시즌 최고 평균 득점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수비전술의 발전과 농구 트렌드의 변화 등으로 인하여 2000년대 중반 이후 개인 평균 득점은 계속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다. 국내 선수만 놓고보면 평균 15~16점 정도만 되어도 1위를 노릴 수 있는 시대다.

지난 2021-2022, 2022-2023시즌 2년 연속 국내 선수 평균 득점 1위를 차지했던 이대성은 각각 17점(전체 6위)-18.1점(전체 5위)를 기록했다. 2021-2021시즌 1위였던 허훈은 15.6점(전체 8위)에 불과했다. 또한 2022-2023시즌 외국인 선수까지 포함해도 개인 평득 20점을 넘긴 선수는 SK의 자밀 워니(24.2점) 단 한 명뿐이었다.

KBL 역사에서 국내 선수가 마지막으로 평균 20점을 넘긴 것과, 전체 득점왕까지 차지한 기록은 모두 문태영이 유일하다. 귀화혼혈선수인 문태영은 창원 LG에서 뛰던 2009-2010시즌 21.9점으로 득점왕에 올랐고, 이듬해인 2010-2011시즌에는 커리어 하이인 22점(전체 2위)을 기록했다.

하지만 문태영을 끝으로 12년간 국내 선수가 평균 20점을 넘긴 사례는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외국인 선수나 다름없는 귀화선수를 제외하고 오직 순수 토종 선수로만 범위를 좁히면 2007-2008시즌의 방성윤(22.1점, 전체 5위)까지 거슬러올라가야한다.

농구의 꽃은 역시 득점이다. 특히 마이클 조던이나르브론 제임스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확실한 득점을 올려줄 수 있는 '해결사'들은 팀성적을 이끌고 리그 인기를 견인하는 스타가 된다. KBL의 오랜 아킬레스건 중 하나가 외국인 선수들이 주인공을 독식하면서 국내 선수들이 조연으로 밀려난다는 문제였다.

지난해 소노의 전신인 고양 캐롯이 구단의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농구적인 면에서는 4강 돌풍을 일으키며 화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국내 선수들의 활약 덕분이었다. 캐롯 돌풍의 중심에 있던 전성현의 역대급 3점슛 기록행진과 이정현의 성장은, KBL 특유의 '외인 몰빵' 농구에 지쳐있던 농구팬들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선사했다. 지난 시즌 SK와 정관장의 챔프전이 역대급 흥행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김선형과 오세근이라는 국내 스타들이 주역이 되어 펼친 '쇼다운'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정현은 동명이인인 서울 삼성의 슈팅 가드 이정현과 구분하기 위하여 '작정현(작은 이정현)'으로도 불린다. 사실 1-2년 전까지만 해도 같은 포지션에 국가대표까지 지낸 대선배인 큰정현에 인지도에서 뒤쳐졌지만, 올해를 기점으로 작정현의 위상이 추월하고 있다.

든든한 지원군인 오누아쿠의 합류와 전성현의 가세는 그동안 많은 짐을 홀로 감당해야 했던 이정현에게 쏠렸던 부담을 덜어주는 천군만마가 될 전망이다. 작정현의 눈부신 성장은 소노가 지난 시즌의 캐롯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언더독 신화를 기대하게 만드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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