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까지 '사문난적' 몰린 선비 박세당

김삼웅 2023. 11. 27.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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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100선 27] 선비 박세당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조선시대 지식인들에게 최악의 형벌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었다. 글이나 말이 조금이라도 주자(朱子)와 의견이 다르면 "유교의 도를 어지럽히는 적"이라는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양명학이나 도교에 동조하거나 주자의 학설에서 벗어나 경전을 해석하는 것, 주자가 제시한 학문의 순서를 무시하는 것까지 이단사설로 취급되었다.

일제강점기 치안유지법과 박정희 독재시기 반공법이 항일독립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막기 위해 악용되었듯이 사문난적론 역시 다르지 않았다. 반대세력, 비판자를 제거하는 데 올무 역할을 하였다.

조선중기의 학자 윤휴(尹鑴)가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르겠는가. 주자는 나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아도, 공자와 맹자가 다시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승리할 것이다"라 했다가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여기서 소개하는 박세당(朴世堂)을 비롯하여 많은 선비·학자들이 사문난적의 올가미에 씌였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 이란 율법이 있었다. '좌도'란 유교의 종지(宗旨)에 어긋나는 다른 종교를 이르는 말이다. 조선왕조는 주자학 이외의 모든 학문과 사상·종교를 '좌도'로 몰았다.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를 좌도난정으로 단죄하여 처형하고, 수많은 천주교인들도 같은 죄목으로 목숨을 빼앗겼다.

박세당은 1629년(인조 7) 8월 19일 남원부사 박정과 양주 윤씨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조반정에 참여하고 정사공신(靖社功臣)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집안은 경기도 양주이지만 박세당은 아버지의 임지인 전라도 남원의 관아에서 출생했다.

세도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네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장형도 얼마 뒤 요절하면서 가세가 기울어져 유년 시절부터 곤궁한 생활을 하였다. 여덟 살 때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머니, 두 형과 함께 각지를 떠돌며 살았다. 열 세살 때 고모부 정사무에게 글을 배우게 되었다. 17살에 결혼하고 이후 처남 남구만과 함께 장인에게서 학문을 배워 24살(효종 3)에 유생 정시에, 8년 뒤 생원시 본시에 2등으로 합격했다. 이어서 같은 해 중광시에 장원급제하였다.

벼슬길이 순탄하여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 춘추관 기사관을 지냈다. 주로 대관직에 재직하면서 정파나 개인적 친소를 떠나 공정과 원칙의 입장에서 간쟁의 직무를 수행했다. 그의 강직한 성품이 관료들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34살이던 1663년(현종 4) 청나라 사신이 왔다. 인조의 '삼전도 굴욕' 이후 군신 관계가 된 조선은 국왕이 영은문에 나가 청국 사신을 직접 맞아야 했다. 김만균이란 관리가 자기는 할머니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청군에 피살되었으므로 임금을 수행하여 청국 사신을 영접할 수 없다고 나섰다.

이에 박세당은 탄핵을 주청하고 그는 탄핵되었다. 이 문제는 정계의 뇌관으로 작용했고 박세당을 곤경에 빠뜨렸다. 어찌보면 사소한 개인의 일탈된 행동과 같지만 뿌리는 그동안 잠재되었던 정파간의 핫이슈로 나타나게 되었다. 집권당인 서인세력은 박세당의 김만균 탄핵이 자신들의 가치인 북벌론을 훼손하는,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박세당 역시 초기에는 서인 계열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계열이 실현성이 없는 북벌론을 내세워 국정을 어지럽힌다고 비판적 태도를 보이고 결국 김만균을 탄핵한 것이다.

서인 계열은 '재조지은'의 낡은 이데올로기의 가치관에 매몰되어 현실의 시대적 변화를 배척하였다. 박세당은 비록 청국이 원수이지만, 임금도 굴욕을 참으면서 영접하는, '굴가임접(屈駕臨接)'하는 이상 신하된 도리로서 마땅히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송시열 등으로부터 '오사(五邪)'의 하나라고 지탄되었다.

그는 현실을 외면한 채 명분론적 척화의리가 강조되는 조정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마흔 살이 되던 1668년 정월 관직을 떠나 향리로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정언, 지평수찬, 이조좌랑, 교리 등을 제수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이조좌랑에도 부임하지 않아서 의금부에 끌려가 곤장을 맞고 취임했으나 곧 사직하고 말았다.

양주 수락산 서쪽의 계곡에 터를 잡고 학문을 하는 동안 1694년 갑술환국으로 소론 계열이 정권을 잡으면서 공조판서, 우참찬, 사헌부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사 등에 차례로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75살이 되는 1703년 송시열 계로부터 다시 탄핵을 당했다. 이유는 병자호란 후 이경석이 인조의 명에 따라 삼전도의 비문을 지었는데, 이로 인해 송시열 등 노론계열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경석의 사후 그의 손자가 박세당에게 신도비문의 찬술을 부탁했고, 그는 국왕이 이미 굴욕을 당했는데 신하가 춘추대의를 앞세워 군주의 명을 거역한다면 이는 군신지의(君臣之義)를 모르는 패륜적 행동이라며 이경석을 공격한 송시열을 꾸짖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서 그는 노론의 집중포화를 받게 되었다.

노론 계열은 그의 사후 주저인 <사변록>의 내용을 들어 사문난적으로 매도하였다.

당시 노론 계열에서는 조석상식이 주자가례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이를 시행해 왔다. 이 상황에서 1702년(숙종 28) 그의 예론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박세당이 주자가례의 정신을 거부하고 조례를 따르도록 유훈을 남긴 것은 곧 노론의 관행에 대한 도전이며 기존질서에 대한 거부로 인식되었다.

이에 노론계에서는 주자의 권위를 빌어 주자에 도전한 박세당과 그가 속해 있던 소론계를 공격하여 제거하여 자신들이 향유하고 있는 기득권을 지키고자 했다. 이 공격의 과정에서 송시열 계에서는 그의 <사변록>의 내용을 문제시하여 그는 사문난적으로 몰렸고 삭탈관직과 문외출송(門外出送)의 처벌을 받았다.(조광, <8월의 문화인물 박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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