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킬러도 어쩔 수 없는 가장 넓은 길

임성수 2023. 11. 27. 04:0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킬러문항(초고난도 문항)은 없을 거라 했지만 시험 자체가 킬러였다.

2024학년도 수능은 교육 당국 기준으로 초고난도 문항은 없었다고 한다.

킬러문항을 내지 말라고 엄중히 지시한 대통령이나 그 뜻을 받든 교육부야 '킬러는 없었다'며 안도하겠지만 수험생은 조삼모사 같은 출제 방향에 허탈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킬러문항 없는 수능은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형용모순이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임성수 사회부 차장


킬러문항(초고난도 문항)은 없을 거라 했지만 시험 자체가 킬러였다. 2024학년도 수능은 교육 당국 기준으로 초고난도 문항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수험생과 입시 전문가의 예상을 뛰어넘는 불수능이었다. 가채점에서 아직 만점자 소식이 없다. 공식 채점 결과가 발표돼야 알겠지만 재학생과 n수생을 포함해 만점자 없는 수능은 2011학년도 이후 13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교육 당국은 자의적 기준으로 ‘킬러문항은 없다’고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문제를 내는 쪽 입장이다. 문제를 풀어야 하는 수험생으로선 당국이 킬러라 부르건 말건 풀기 어려운 문제는 킬러 문제다. 수학 22번은 가채점 정답률이 1.5%에 불과했다. 100명이 도전해 채 2명도 못 푸는 문제를‘킬러’라 부르지 못하면 어떤 문제를 ‘킬러’라고 부를 수 있을까. 킬러문항을 내지 말라고 엄중히 지시한 대통령이나 그 뜻을 받든 교육부야 ‘킬러는 없었다’며 안도하겠지만 수험생은 조삼모사 같은 출제 방향에 허탈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킬러문항 없는 수능은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형용모순이다. 수능은 수험생을 ‘변별’하기 위해 실시된다. 게다가 수능은 상대평가다. 시험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쉬우면 또 쉬운 대로 그 안에서 표준점수와 백분율, 등급이 정해진다. 수험생의 선망을 받는 주요 대학은 정해져 있고 그 대학 안에서도 이른바 ‘서연고’로 시작하는 서열이 확고하다. 수험생 수가 점점 줄고 많은 대학이 문을 닫는다고 해도, 주요 대학 입시는 더 치열해진다. 대학 입시 자체가 수험생에겐 킬러와 같다.

결국 중요한 건 시험의 예측 가능성과 일관성이다. 수능 시험의 출제 기조가 예측 가능하다면 수험생 혼란은 최소화할 수 있다. 공교육 내에서든지, EBS 연계라든지 뭐가 됐든 일관된 기준과 수준이 유지된다면 수험생도 거기에 맞춰 시험을 대비할 수 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입시는 요동쳤다. 수능 난이도도 매년 물수능과 불수능으로 널을 뛰었다. 그럴 때마다 수험생과 학부모는 혼란에 빠졌고 사교육업체들은 ‘혼란’을 자극해 호황을 누렸다. 이번 킬러문항 배제 논란도 지난 6월 대통령이 공개 질책하면서 불거졌다. 수능이 불과 5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쉬운 수능’을 기대하고 시험에 재응시하는 상위권 n수생이 급증했고 그만큼 주요 대학 입학 경쟁은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선진국 중에서 대입을 결정하는 시험의 출제 기조가 이런 식으로 결정되는 나라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예상과 다른 불수능이었지만 수험생들은 꺾이지 않았다. 26일 수험생이 많이 찾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둘러보니 어려웠던 수능에 관한 토론이 더는 ‘뉴스’가 아니었다. 수험생은 불수능 원망보다는 가채점 결과 내에서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최선의 전략을 짜고 있었다. 게시글도 논술과 면접 준비 노하우, 각종 후기 위주였다.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이번 수능 필적 확인 문구로, 양광모 시인의 시 ‘가장 넓은 길’에 나오는 구절이다. 수능과 대입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는 수험생들은 이 문구처럼 씩씩하고 꿋꿋했다. 킬러문항도 어쩔 수 없는 가장 넓은 길이 이미 수험생의 의연한 태도 속에 있었다.

수능 성적은 다음 달 8일 발표된다. 수시가 끝나면 다시 정시가 시작된다. 시에는 ‘묵묵히 빗자루를 들고 눈을 치우다 보면 새벽과 함께 길이 나타날 것’이라는 대목도 있다. 수능을 마치고 이어지는 논술과 면접, 정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이야말로 묵묵히 눈을 치우고 있는 이들이다. 곧 새벽과 함께 길이 나타나길 응원한다.

임성수 사회부 차장 joylss@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