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채로 산 1년 안아줘야지, 고생했을테니

임세정 2023. 11. 26.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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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연인’ 배우 안은진
안은진은 최근 종영한 드라마 ‘연인’에서 전쟁과 사랑을 통해 성장하는 길채를 연기했다. 그는 “작품 속 인물과 대사에서 위로 받고 용기를 얻었다. 현장에서 답을 찾으며 연기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다”고 말했다. UAA 제공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던 자신이 살아 돌아온 것을 반기기보다 정절을 지켰는지 캐묻는 남편에게 길채는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것이 내 잘못은 아니다”며 이혼을 선언했다. 몸종 종종이(박정연)에게 ‘환향녀’라며 손가락질하는 사람에겐 양쪽 따귀를 올려붙였다. 자신을 위해 몇 번이나 죽음을 불사하는 순애보를 보여준 장현(남궁민)에게 “뻔한 것은 싫다”며 길채는 반지를 건네고 청혼했다.

드라마 ‘연인’의 주인공 길채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선 보기 드문 캐릭터다. 용감하고 주체적이며 추진력이 있는, 그리고 시대가 만들어 놓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 인물이다. “사람이 밥을 못 먹어야 죽지, 욕 먹는다고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야말로 ‘깡’ 있는 사람이다.

지난 21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안은진은 아직은 길채였다. 드라마 촬영이 끝난 지 나흘이 채 되지 않은 날이었다. 그는 “정말 성공한 한 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 많이 다치지 않고 무사히 작품을 마친 나 자신에게 ‘고생했다 은진아’ 이야기하며 올해를 마무리하게 될 것 같다”며 “1년 가까이 동료 배우, 스태프들과 전국을 돌며 촬영했다. 다들 건강하게 탈 없이 마무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고 감사하다. 떠나보내려니 섭섭한 기분”이라고 털어놨다.

첫 사극에 도전하는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극 초반엔 길채에 대한 대중의 반응도 뜨뜻미지근했다. 안은진의 기존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과장이 심하다는 평가도 있었다. 안은진은 “처음으로 전체 대본 리딩을 한 날 밤 ‘아무래도 난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철없는 양가댁 애기씨 길채 캐릭터를 잡을 때 마음 고생이 있었다”며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어떻게 표현하지’ 싶었다. 전반부에서 캐릭터가 잘 잡혀있어야 길채가 그 뒤에 하는 선택에 설득력이 생기고 반전이 생기기에 김성용 감독, 황진영 작가와 따로 대본을 읽으며 연기 톤을 잡았다”고 돌이켰다. 길채가 강인한 여성으로 성장하는 후반부는 오히려 수월했다. 그는 “병자호란이 발생하고 나서는 주어진 상황에 맞게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대장간을 운영하며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고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서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며 “길채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장면들과 대사 덕분에 캐릭터가 풍성해지고 내게도 위로가 됐다. 상황은 힘들었지만 오히려 에너지를 받았다”고 돌이켰다.

드라마 ‘연인’의 안은진. MBC 제공


배우 안은진에게 가장 위로가 된 대사는 뭘까. 그는 “나뿐만 아니라 전국민이 위로 받은 ‘안아줘야지, 힘들었을테니’라는 장현의 대사다. 한없이 당당하던 길채, 사람들이 ‘환향녀’라고 할 때도 ‘그래 수군거리라고 해’라고 얘기하던 길채가 장현 앞에서는 머뭇거리며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은 순간이었다”며 “촬영하기 오래 전부터 남궁민 선배님과 그 장면에 대해 얘기를 나눴고, 현장에서도 집중해서 한 번에 찍었다”고 말했다.

드라마가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한 요인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묻자 안은진은 망설임 없이 “이야기의 힘”이라고 답했다. 안은진은 “‘연인’은 지금까지 본 적 없었던 포로들의 이야기, 자세하게 들여다보지 못했던 전쟁 이후의 삶을 그렸다. 백성들의 생명력에 대한 이야기는 시청자들이 눈물 없이 볼 수 없었을 것”이라며 “그저 재밌기만 한 드라마가 아니라 함께 가슴 아파할 수 있는, 마음에 남는 드라마가 아닐까 한다”고 자평했다.

안은진은 병자호란과 인연이 깊다. 그는 지난해 개봉한 영화 ‘올빼미’에서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 역을 맡았다. 안은진은 “그 시기에 대해서는 영화를 준비하면서도 많이 공부했지만 포로 속환에 대한 내용은 찾을 곳이 마땅치 않았는데 대본이 아주 구체적이었다”며 “대본에 적힌 포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읽으며 현장에서도 ‘어떻게 이렇게 기구할 수 있을까, 실제는 더했겠지’ 하는 얘기들을 나눴다. 살아 돌아온 포로들은 정작 갈 곳이 없었고,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부인에게 남편이 이혼을 요구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고 전했다.

시청자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건 십수년 간 이별과 재회를 반복해야 했던 장현과 길채의 애절한 로맨스다. 안은진은 “‘몹시 그리워하고 사랑한 연인’이라는 제목은 극이 끝으로 갈수록 명확해졌다. 파트2에서 장현과 재회한 이후로는 상황도 관계도 너무 애절하다보니 남궁민 선배와 서로 눈만 마주치면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며 “현대물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절절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시대적 배경 탓에 두 사람이 쉽게 이어지지 못했다. 이렇게 절절하게 사랑하고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연기를 언제 또 해볼까하는 생각에 더욱 소중하고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호흡을 맞춘 남궁민에 대해선 “왜 남궁민이 남궁민인지 알 수 있었다”는 말로 극찬을 대신했다. 안은진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고, 연기할 때도 저절로 집중이 됐다”며 “캐릭터의 밀도가 너무 완벽해서 현장에서 선배님은 ‘남궁장현’으로 불렸다. 워낙 디테일하게 연기하는 분이기에 말 한 마디, 뉘앙스 하나 하나 다르게 표현할 때 그저 눈으로 그것을 쫓기만 해도 해결되는 게 있었다”고 말했다.

장현은 길채를 성장하게 하고, 강하게 만들어 준 존재다. 길채는 전쟁이 끝난 후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대장간을 열고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배포 있게 살아가지만 심양에 포로로 끌려가면서 절망에 빠졌다.

안은진은 “남편이 자신을 찾으러 왔다가 그냥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길채는 희망을 잃었지만 다시 장현을 만나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몸을 던지는 장현을 보면서 살아갈 힘을 얻었다”며 “한양으로 돌아와 갈 곳 없는 아이들과 포로들을 거두면서 길채는 크게 성장했다. 당당하게 살아내는 길채를 보면서 나 스스로도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이번 작품이 안은진에게 준 것은 자신감이다. 안은진은 “현장에 내던져지면 거기에 해결 방법이 있다는 걸 몸으로 배웠다. ‘덜 힘들어하고 좀 더 자유롭게 재밌게 연기해도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안은진은 지금껏 출연한 작품들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민하, ‘나쁜엄마’의 미주, ‘검사내전’의 미란, ‘타인은 지옥이다’의 정화 모두 자신만의 매력을 덧입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늘 복이 있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랑받고 힘을 얻으면서 일할 수 있는 건 행운”이라며 “매 작품 건강하고 강한 사람들을 만났고 선배들에게 많이 의지했다. 작품 복, 캐릭터 복, 인복이 쏟아졌고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배우로서 안은진의 목표를 물었다. 그는 “배우는 작가가 써놓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통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어떤 캐릭터를 만나도 그 자체를 보여줄 수 있는 깨끗하고 투명한 배우로 오랫동안 잘 쓰임받고 싶다”고 말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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