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제대인데, 스스로 목숨 끊어? 친구들이 밝혀 낸 진실

김성수 2023. 11. 26. 14: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한희철 40주기 추모식 준비하는 '친구' 이은희 박사④

[김성수 기자]

 대학시절의 한희철: 그의 뒤로 그가 연주하던 통기타가 보인다. 바쁜 일상에도 시간이 허락하면, 집에서 ‘사노라면’ ‘친구’ 못생긴 내얼굴’ 등의 민중가요를 기타연주에 맞추어 부르며 녹음하기를 좋아했다
ⓒ 이은희
 
전두환 정권기였던 1983년 12월 11일, 그날은 나와 철도학교 동문인 한희철이 군대에서 의문사한 날이다. 한희철은 1978년 12월 국립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철도청에 근무하다 1979년 3월 철도장학생으로 서울공대에 입학했다.

오는 12월 11일이면 한희철이 이 땅을 떠난 지 어느덧 40년이 된다. 그가 죽은 날 나도 군복무 중이었다. 진실이 은폐되고, 사실이 감춰진 엄혹한 시절, 그래서 나도 당시 군대에서 그의 억울한 죽음을, 죽음의 원인을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은 거의 상투어가 되다시피 한 '자유' '민주주의' '사회정의'의 가치를 추구하다가 그는 23살의 젊은 나이에 망자가 됐다. 하지만 그의 희생덕분에 나는 40년이 흐른 지금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역사는 흐르고 사람은 가도 정신은 남는다. 산 자가 망자에 대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는 그가 남긴 정신과 열망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일 것이다.

이은희 단국대 초빙교수는 한희철의 철도고 동기이자 지난 1970, 1980년대 한희철과 함께 우리사회의 민주화를 꿈꾸었던 '절친'으로서 지금 한희철 40주기 추도식을 준비하고 있다. 아래는 지난 10일부터 24일까지 이 교수와 이메일과 페이스북 메신저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한희철이 의문사한 그날 이후 이 교수를 포함한 친구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누구보다도 독실한 가톨릭 신앙과 삶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신념을 가졌던 희철이 의가사 제대를 한 달 정도 남기고 '자살' 했다는 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나는 많은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그의 사망의 배경과 원인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군입대 전 그가 활동했던 성남 YMCA, 수진동 성당의 가톨릭 노동청년회 (JOC), 주민교회 등을 방문해 희철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와 사망과정에 제기된 여러 의문에 대해 논의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들과 가까워지면서 진상규명 노력을 함께 하는 것은 물론 나는 성남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희철의 일을 이어가는 활동을 하게 되었다.

성남 YMCA에서는 대학Y라는 대학생 클럽을 조직해 우리역사와 사회문제들을 연구하며, 사물놀이와 전통연극 등 전통문화 배우기와 공연 등의 활동을 했다. 또 수진동 성당의 가톨릭 노동청년회(JOC) 회원들과 모임을 가지며 상대원동 분도수녀원 소속 '만남의 집'과도 활발한 교류를 했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성남지역 노동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성남으로 복귀한 희철과 같이 활동했던 친구들은 나에게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여주었다. 한 그룹은 나를 희철의 친구로서 희철을 만난 듯 따뜻하게 대해 주어 쉽게 친구가 되거나 가까운 선후배가 되었다. 반면 다른 한 그룹은 낯설고 위험한 사람을 만난 듯이 강한 경계심을 표출하면서 가벼운 인사만을 나누고 거리를 두게 되었다. 희철이 사망한 이후에 군에 있었던 동료들에 따르면, 그들은 각기 군 보안사의 과천분실이나 서울시내 소재한 진양분실로 강제로 끌려가 위협적인 분위기에서 희철과 함께 활동했던 일들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고 했다. 위의 후자의 그룹이 내게 표출했던 강한 경계심은 대체로 이런 경험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군에서 제대한 이후 위의 전자의 그룹에 속했던 희철의 동료들은 대학 졸업 후 성남지역에서 나와 함께 노동운동에 참여하거나, 이수열처럼 공립이나 사립학교 교사로 임용되어 전교조 활동에 참여했다. 반면 후자의 그룹은 대학 졸업 후 공무원 또는 직장인이 되거나 별도의 생업에 전념하는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갔다.

이런 가운데서도 희철을 기억하는 동료들은 '한희철 추모모임'을 구성했다. 매년 설이나 추석 명절 때면 희철의 부모님을 방문해 인사를 드렸고, 한희철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싸움에 부모님과 함께 했다. 매년 한희철의 추모행사를 개최하며, 서울대나 성남시민주화운동사업회가 개최하는 민족민주열사 합동추모행사에도 가족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특히 7주기를 맞은 1990년도 추모행사에서는 그동안 희철의 유골을 한탄강에 뿌린 관계로 묘소 없이 진행되어온 추모행사의 장소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희철의 혼을 부르는 초혼의 예식을 통해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묘소를 설치했다. 이후 희철의 묘역은 매년 열리는 추도식의 주된 현장으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7주기를 맞은 1990년도 추모행사에서는 그동안 한희철의 유골을 한탄강에 뿌린 관계로 묘소 없이 진행되어온 추모행사의 장소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희철의 혼을 부르는 초혼의 예식을 통해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묘소를 설치하였고, 이후 한희철의 묘역은 매년 열리는 추도식의 주된 현장으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 이은희
 
- 1983년 12월 11일, 한희철이 군대에서 사망한 그날 이후 희철 부모와 가족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또 희철의 친구들과 가족들의 관계는 어떠했나?

"희철의 부친 고 한상훈 예비역 소령은 6.25 전쟁 중 큰 전공을 세운 한국전쟁 유공자로서 자부심을 가진 보수적인 분이었다. 그런 이유로 희철이 생전에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것에 비판적이셨다. 희철의 사망 이후에도 보안사가 부친을 간간이 접촉하면서 희철 관련해서 주변에서 시위나 집회가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를 받아들여 부친은 '희철이 문제로 시끄럽게 문제를 일으키지 마라'는 말도 희철의 동료들에게 하곤 하셨다.

이런 분위기에서 모친과 희철의 누나, 여동생들은 희철이 불온한 사상을 가지고 좋지 않은 일을 한 것이 희철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주변사람들에게 마치 '죄인' 같은 심정으로 희철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리기도 하고, 왜 이렇게 가족들에게 큰 시련을 주고 갔는지 희철에 관한 원망도 했다고 한다.

이후 희철의 친구들이 명절 때나 추도식 때 가족들과 만나고, 특히 모친이 전국민족민주유가족 협의회(유가협)의 사람들과 만나서 희철과 같은 운동권학생들의 의문사사건들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으면서 희철이 생전에 하고자 했던 일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면서 가족들 모두가 서서히 희철의 생전 활동에 대해 이해하고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가족 대표로서 나와 함께 유가협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모친은 1980년대 후반 이후 이소선 여사(전태일 열사 모친), 박정기 선생(박종철열사 부친), 배은심 여사(이한열 열사모친) 등 민주열사의 부모님들과 함께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422일 간의 국회 앞 천막농성에 적극 참여하였다. 가족들 중 마지막으로 희철의 생전활동을 이해하게 된 부친은 희철 추도식이나 성남지역의 집회에 간간이 참여해 지지와 격려의 말씀도 하시게 되었다.
 
 앞에서 두번째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한희철 모친
ⓒ 이은희
 
세월이 많이 흘러 희철 부모님 두 분이 다 돌아가시고 (희철의 부친은 2006년에 모친은 2018년에 돌아가셔서 서울국립현충원에 충혼당에 안장됨) 희철 누님 한영희 여사가 가족을 대표해 희철 친구들과 추모모임과 함께 추모활동을 이어가셨다. 또한 누님은 유가협이나 추모연대 등 단체와 함께 의문사 진상규명운동, 민주화운동유공자법 제정운동 등에 참여하고 있다."

- 그동안 한희철 가족과 친구들이 유가협이나 추모연대 등과 함께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왔는데 그 성과는 무엇인지?

"유가협의 국회 앞 장기농성의 결과로서 지난 2000년 1월 15일 제정된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그해 10월 17일 설립된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는 1년 9개월여의 진상조사활동을 통해 2002년 6월 21일 희철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하였'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민보상위)에 '한희철 및 그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를 요청'하는 결정서를 채택했다.

의문사위의 결정서에 따라 민보상위는 지난 2003년 11월 18일 희철을 민주화운동 관련 사망자로 인정했다. 그리고 2004년 1월 6일 희철에 대한 보상금으로 부친에게 1억6029만6280원을 지급하기로 결정하고 부친은 '보상금'을 수령했다. 희철의 사망으로 어려웠던 가족들에게 일부의 도움이라도 되었겠지만, 가족들은 희철의 명예를 회복하는 또 한 번의 국가의 조치로서 더 기쁘게 받아들였다.

희철의 사망 이후 21년 이 지난 2004년 8월, 희철의 가족들은 서울대로부터 또 한 번의 기쁜 소식을 들었다. 민주화운동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 희철에게 서울대가 명예졸업장을 수여하겠다는 것이었다. 부친은 서울대가 군의문사로 사망한 희철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일조한 것 같아 여한이 없다며 가족들과 함께 기뻐하셨다.
 
 한희철의 명예졸업장을 수령한 후 찍은 가족들의 기념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는 박종철 열사의 부친인 박정기 선생.
ⓒ 이은희
 
지난 2015년 11월 서울대민주동문회가 중심이 되어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추모연대)에서 공식 선정한 34인의 민족민주열사-희생자의 영정을 모시고 개최한 제2회 서울대학교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제에서 심재환, 김용권, 이상배, 한희철의 4인 열사의 기념식수 및 표지 제막식 행사도 가족들에게는 희철의 존재를 인정받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
특히 이날 추모식에 앞서 오후 1시 30분에는 서울대 4.19추모공원에서 서울대 민주동문회와 유가족, 지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대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기념식수 및 표지석 제막식 행사가 진행됐다. 이날 한희철(기계설계학과 79)의 '염원의 나무'를 심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나와 이수열, 철도고 동기 안병국이 한희철의 누님과 여동생과 만나 축하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철도고 동기 안병국, 한희철의 여동생 영숙, 누님 한영희 여사, 서울대 동기 이수열, 이은희 박사
ⓒ 이은희
 
[관련 기사]
[인터뷰 ③] "자살 소식 듣고 현장 갔더니 말끔히 청소, 군에 이유 물으니..."
[인터뷰 ②] 전두환 때 의문사한 한희철... 그가 성남에서 했던 일은
[인터뷰 ①] "전두환 정권 획득 과정 보며 한희철과 대안 모색"
전두환 때문에 목숨 끊은 대학생 한희철을 생각한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