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적나라할 수 없다... 배우가 찍은 배우 이야기

김성호 2023. 11. 2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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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595] <여배우는 오늘도>

[김성호 기자]

환멸이라는 감정을 아는가. 어느 순간 가진 마음이 와락 무너지고, 세상을 대하는 시선에는 기대의 편린조차도 남아 있지 않은 그런 순간의 감상을 바로 환멸이라 말한다. 그러면 그렇지가 아니라 너마저 그렇구나, 기댈 것도 기대할 것도 없음을 깨달을 때의 마음, 그리하여 소중하거나 지키고픈 무엇도 남지 않은 순간의 마음이다.

그러나 환멸은 영원하지 않다. 인간이란 적응의 동물이고, 그로부터 어떻게든 새로운 마음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뗀석기조차 없던 원시의 인간에서 진화를 거듭하고, 또 전쟁통이며 풍비박산의 위기를 넘어 인간을 오늘에 이르게 한 비결이다. 환멸은 일시적이지만, 무너진 기대로부터 다시 어떤 기대를 갖고 일어섬이 인간의 본질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환멸에 의미가 없다 할 수는 없을 테다. 어느 순간 왈칵 올라오는 이 같은 감정이야말로 우리 삶과 업에 있어 진정 의미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세상 어디에나 가치 없는 것과 가치 있는 것이 뒤섞여 있다. 누군가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붙들고 살아가고, 누군가는 몹시 귀한 것을 똥처럼 내버린다. 그 사이에서 좋은 삶과 좋은 직업인이 되기 위한 고민을 하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 아닌가 말이다.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포스터
ⓒ 메타플레이
 
실제 배우가 찍은 배우 이야기

배우 문소리가 처음으로 장편 영화를 연출한 <여배우는 오늘도>는 환멸에 대한 영화다. 환멸이 필연적으로 닿게 되는 가치와 의미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며, 그로부터 삶과 업에 대한 작품이기도 하다. 배우가 감독이 되어 영화를 찍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지만, 이야기가 무르익어 영화를 찍을 밖에 없었구나 싶은 작품은 또 그리 많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문소리의 영화가 꼭 그러하다.

<여배우는 오늘도>는 여러모로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듯 여배우의 이야기로, 감독이자 배우인 문소리가 직접 저 자신을 연기한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만들어진 극이겠으나 극이 또 완전히 만들어진 허구의 이야기인 것도 아니라는 듯, 여배우 문소리의 삶과 실제적으로 맞닿아 있는 듯이 느껴진다. 시나리오가 끊긴 불안한 사정이며 치매가 걸린 시모를 모시는 일의 버거움이며, 또 인간으로서 느낄 밖에 없는 복잡다단한 어려움들을 지극히 일상적 사건으로 드러내는 솜씨가 제법이다.

젊고 예쁜 여배우들에 밀려서, 또 한국에 굴러다니는 시나리오 중에는 쓸 만한 여자캐릭터가 없어서, 필모그래피에 올릴 만한 작품을 찍는 좋은 감독 또한 많지 않아서 여배우 문소리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하다. 어느 날인가 마음을 다독이자고 친구들과 함께 오른 산행길에서 그녀는 우연히 어느 영화사 대표와 만난다. 그는 문소리에게 좋은 시나리오가 있다고 말하는데, 배역은 그녀의 나이보다 열 살 쯤은 많아 보이는 대학생 아들이 있는 중년 여성이다. 심지어 정육점 주인이라는 말까지 들으니 그녀는 제 기대와 딴판으로 돌아가는 현실에 아연한 표정을 감출 수 없다.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스틸컷
ⓒ 메타플레이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여배우의 고단한 삶

우연은 우연과 겹쳐 그녀들의 일행은 영화사 대표의 일행과 한 자리에서 술을 마시게 된다. 이 자리에서 맞이한 진상에 가까운 일들은, 그러나 여배우의 현실에 아예 없으리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흥미로운 만큼 민망하고, 민망한 만큼 또 흥미로워지는 것이다. 이 순간부터 문소리가 맞이하는 감정은 거의 환멸이라 할 만한 것이다. 인간에 대한 기대는 무너지고, 상황에 대한 기대 역시 꺾여서, 그저 소리소리 지르며 길바닥을 내달리고 싶은 그런 기분이라는 뜻이겠다.

영화는 이내 2막으로 접어든다. 바깥에서는 화려한 배우이지만 속에서는 몇 천 만원이 없어 빚을 내야 하는 신세다. 누구는 한국을 대표하는 명배우라고 하는데, 한국에서 배우의 삶이란 남 눈치를 보고 내실보다는 외양을 그럴 듯하게 가꾸어야 하는 직업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물론 과장도 없지 않겠으나 얼굴 알려진 적잖은 배우들이 그와 같은 상황이지 않을까 싶다. 남에게는 어려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도 물속에서는 미친 듯이 발을 젓고 있는 동물처럼 말이다.

시어머니는 치매에 걸려 병원에 누워 있고, 아이에게는 엄마 노릇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이를 돌보러 집에 와 있는 친정엄마는 속 모르는 소리들만 하고 있는데, 그런 엄마의 부탁을 떠밀리듯 받아서 치과에서 홍보사진을 찍고 오는 날의 풍경은 또 환멸과 얼마나 닮아 있는가. 아빠 임플란트도 할인받아야 하면 미리 물어보게 말을 했어야지 하고 꽥 소리를 지르다가 지나가는 간호사의 모습에 황급히 머리를 매만지던 장면은 우리네 일상과 얼마나 또 닮아 있는지.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스틸컷
ⓒ 메타플레이
 
환멸나는 삶,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영화는 곧 세 번째 장으로 이어진다. 이 장은 <여배우는 오늘도>의 백미라고 불리는데, 그건 어느 외딴 장례식장의 생경한 풍경이 흔하고 자잘한 인생들과 또 많이 닮아 있어서다. 문소리는 과거 한 작품을 함께 한 감독의 부고를 듣는다. 밤중에 장례식장을 찾은 그녀가 혹시 기자가 와 있을 수도 있으니 선글라스를 끼라는 매니저의 성화에 야밤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들어섰지만 식장은 횡뎅그러니 비어 초라하기 짝이 없다.

어찌됐든 들어선 식장에서 문소리는 첫 영화 촬영을 함께 한 동료와 마주한다. 그로부터 죽은 감독과 그의 작품과 그와 얽힌 썩 좋지 많은 않은 이야기들이 카메라 넘어 관객 앞에 까발려진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그가 좋은 감독이 아니라고, 그의 작품은 가짜라고, 그밖에 민망하기 짝이 없는 진실에 가까운 사실들이 나열되는 순간은 또 무척 민망하고 잔혹하여 볼 만한 풍경을 빚어낸다.

표면 안에 깃든 이면이 실은 표면보다 추하고 악하여서 전혀 존중할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은 삶과 업의 어느 단면처럼 관객의 마음을 진탕시키기 충분하다. 과연 나는, 또 우리는, 영화 속 저들과 다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며, 그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며 우리는 여전히 환멸나는 세상 속에 우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스틸컷
ⓒ 메타플레이
 
돌고 돌아 잘 살자는 이야기

그러나 영화는 나름대로 또 다른 삶의 진실을 보여준다. 그건 환멸이 이는 삶 가운데서도 인간은 어떻게든 살 길을 찾고, 다음을 기약하고, 관계를 맺고, 나아지려 발버둥친다는 사실이다. <여배우는 오늘도>의 가장 멋진 장면 또한 이와 같아서 문소리가 연기한 문소리와 전여빈이 연기한 어느 젊은 배우지망생과 윤상화가 연기한 안 알려진 배우는 장례식장에 날밤을 까고 나와 함께 2차를 하러 가는 것이다. 죽은 감독이 진짜 좋아하던 것이 바로 2차라며, 속을 채우고 마음을 달래러 간다.

돌아보면 인생이란 것이 꼭 그와 같지 않은가. 기대는 꺾이고 삶은 엉망진창이며 업은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사람들은 마음에 차지 않고 때로는 벗조차도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든 해야만 하고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장례식장을 떠들썩하게 채우고, 곁에 있는 이와 2차를 가면서, 그렇게 통성명을 하고 헤어지면서 말이다.

<여배우는 오늘도>는 그럼에 어느 여배우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여배우, 남배우로 가르는 것조차 무용한 환멸 가득해 어찌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잘 살아보자는, 또 잘 살겠다는 그런 이야기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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