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미국 ‘해저케이블 진입장벽’에 막힌 중국, 한국 전력망 노린다

황민혁 2023. 11. 26.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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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경제]
직원들이 LS전선의 강원도 동해사업장에서 철제 턴테이블에 해저케이블을 선적하고 있다. 뒤편으로 높이 172m에 이르는 생산 탑(VCV타워, 수직연속압출시스템)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LS전선 제공

중국 해저케이블 기업들이 한국 전력망을 노리고 있다. 풍력 발전용 해저케이블 수주를 위해 재작년부터 국내 시장의 문을 적극적으로 두드리고 있다. 대규모 시장인 유럽·미국 진출이 여의치 않자 우선 지리적으로 가깝고, 해저케이블 산업 성장성이 높은 한국 시장에서 수주 경험을 쌓겠다는 구상이다. 국내에서 중국 업체가 수주한 사례는 아직 없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한 저가 견적서를 앞세워 납품 단가를 깎으려는 움직임이 포착돼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중국 초고압 해저케이블 생산 기업인 형통광전과 ZTT는 한국에서 발주하는 민간 해상풍력 발전 사업에 꾸준히 견적서를 제출하고 있다. 견적서 제출은 입찰 참여 전 단계로, 중국 전선 기업들이 한국에서 활발하게 영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형통광전은 지난 2021년 중국 전선 업계 처음으로 한국에 지역 사무소를 차리기도 했다. 자유무역협정(FTA) 규정에 따라 공공사업엔 외국 업체가 해저케이블을 공급할 수 없지만, 민간에서 발주하는 사업엔 중국 기업도 참여할 수 있다.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한국 해상풍력 시장은 해저케이블 수요를 견인하고 있다. 해상풍력단지 건설 비용의 5~10%를 차지하는 해저케이블은 바다 위에서 생산한 전력을 육지로 끌어오거나, 발전소 내부에서 전력을 이동시키는 필수 설비다.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는 2020년 34GW 불과했던 전 세계 해상풍력 용량이 2030년 228GW, 2050년 1000GW를 넘어설 것으로 추산했다. 덩달아 해저케이블 누적 설치량도 지난해 1만6000㎞에서 2050년 24만5000㎞로 급증할 전망이다.(블룸버그뉴에너지파이낸스)

업계에서는 중국 전선 업체들이 한국을 우회로 삼아 ‘진입장벽’이 높은 미국과 유럽의 풍력용 해저케이블 시장 진출을 도모하고 있다고 본다. 중국 전선 업체들이 세계 1위 규모를 자랑하는 자국 해상풍력 시장을 보유하고도 비교적 규모가 작은 한국 영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다. 유럽과 미국은 입찰을 희망하는 해저케이블 업체에 높은 수준의 기술 개발 성과뿐 아니라 선진국 전력망 사업 참여 및 운영 경험을 요구한다. 그런데 중국은 기술력, 해외 사업 경험 모두 부족하다.

지난 5월 LS전선이 수주한 2조원대 사업의 발주처인 네덜란드 국영 전력회사 테네트는 입찰 전 단계에서 약 10개사에 ‘초대장’을 보냈다. 대상은 일정 수준 이상의 기술력을 갖춘 해저케이블 기업이었다. 중국 기업은 목록에 없었다. 전선 업계 관계자는 이를 두고 “중국 해저케이블이 유럽 풍력 프로젝트가 요구하는 기술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방증”이라고 주장했다.

중국 전선 기업들은 파키스탄·방글라데시 등 가격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개발도상국에서만 제품 공급 사례가 있다. 선진국 전력망 사업에 참여한 경험은 없다. 특히 해상풍력단지를 건설하거나, 국가 간 전력망을 연결할 때 쓰는 대용량·초고압 해저케이블 해외 수주 사례는 전무하다. 업계 관계자는 “세계 시장에서 수준 미달로 취급받는 중국산 해저케이블이 한국 전력망 일부에 들어올지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2021년 0.124GW에 그쳤던 해상풍력 발전량을 2030년 12GW, 2034년 20GW로 늘릴 계획이다.

중국의 저가 공습은 시장 생태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풍력 발전 사업자들이 중국 전선 회사에서 받은 견적서를 국내 전선 업체에 내밀며 “왜 이만큼 싸게 만들지 못하냐”며 압박하는 경우가 늘고 있어서다. 제품 원가에도 못 미치는 납품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저렴한 중국산 제품을 기준으로 시장 가격이 형성되면 국내 기업이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입찰에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수주에 성공한 기업도 저렴한 낙찰가에 맞춰 원가를 조정하다 보면 품질이 낮은 전선을 공급할 우려도 있다. 중국 기업의 ‘저가 견적서 뿌리기’가 한국 전력망의 품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반면 한국 해저케이블 기업의 중국 시장 진출은 쉽지 않다. 김형원 LS전선 부사장은 지난달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중국 업체는 우리나라 시장에 많이 들어오는데 우리는 못 간다”며 “중국 정부에서 막는 것도 있지만 아예 입찰 기회를 주지 않는다든지, 발주 사실 자체를 알리지 않는다든지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많다”고 지적했다. 김 부사장은 “우리 정부도 보호를 두텁게 해주면 어떨까 하는 욕심이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전력망에 들어오는 해외 업체엔 기술적, 제도적 장벽을 세운다. 전선은 유기적으로 연결된 전력 체계를 구성하는 ‘대동맥’으로서 안보적 성격을 띤다. 이에 세계적으로 전선 산업에는 보호주의 기조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일본은 전력망 사업 추진 때 국제 입찰을 아예 하지 않는다. 대만은 2018~2023년 5년간 161㎸, 345㎸급 고압케이블을 수입제한 품목으로 지정했다.

풍력 업계 관계자는 “국산 우대가 아니더라도 국내 생산 우대 같은 게 필요하다”며 “해외 기업이라도 한국에 생산 거점을 두고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기업엔 인센티브를 주는 식으로 제도를 설계하면 국내 기업 육성뿐 아니라 풍력 생태계 육성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황민혁 기자 ok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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