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에도 어른이 있다... 이 영화가 던진 선한 충격

김성호 2023. 11. 25.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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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594] <어른 김장하>

[김성호 기자]

세대에 대한 조롱이 문화적 현상처럼 퍼져나간다. 20대부터 40대 초반까지를 포괄하는 MZ세대라는 단어의 용례가 대표적이다. 본래 뜻과는 별개로 사회초년생 중 사회통념이며 조직의 관습에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일 때가 얼마나 많던가. 뒤에 붙는 세대라는 말까지 빼놓고서 "너희 부서 MZ는 어때?"라는 식으로 젊은이들이 무례하고 이기적일 것이라 미리 짐작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라나는, 또 이제 막 성인이 된 이들에 대한 조롱에도 이면이 있다. 이해받지 못하고 환영받지도 못하는 세대의 맞은편엔 이해하고 싶지 않고 같이 자리하고 싶지도 않은 꼰대가 있는 것이 아닌가. 아주 틀린 이야기도 아닐 테다. 교과서에선 정의며 사회며 조국이며 공동체를 이야기하지만, 뉴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그와는 영 딴 판이 아닌가. 서로를 등치고 제 이익만 챙기는 이들로 가득한 풍경을, 나서면 손해보고 나누면 바보가 되는 현실을 젊은이들이라고 보지 못할 리가 없다.

어른이 없다는 자조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어디 없는 것이 어른뿐일까. 가치도, 공동체도, 그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삶도 찾아보기 힘든 것만 같다. 가치의 상실은 정치에 대한 혐오로 번지고, 정치혐오는 책임 없는 도둑놈들을 키우고, 그로부터 각자도생의 아수라장이 펼쳐지는 것은 아닌가. 우리시대가 그와 같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가 얼마 되지 않는 것만 같다.
 
▲ 어른 김장하 포스터
ⓒ 시네마달
 
다큐가 건져낸 진주의 큰 어른

<어른 김장하>는 이 같은 인식에 '아니오'라고 외치는 영화다. 아직 세상엔, 이 나라엔, 어느 도시엔 어른이라 부를 사람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어른이 실종된 세상에 어른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알리는 지표가 되어주는 작품이며, 그와 같이 살려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이야기다. 제목에서 말하듯, 김장하 선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김장하라는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거기엔 여러 이유가 있는데 그런 이에게 주목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김장하 선생 스스로가 자신이 알려지는 걸 극구 꺼려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MBC 경남이 2부작 다큐멘터리로 지난해 연말과 올해 초 방영했고, 이를 재편집해 한 편의 극장 개봉영화로 만든 것이 <어른 김장하>가 되겠다.

김장하는 1944년생으로 올해 일흔아홉이 된다. 그는 한약재로 약을 짓는 한약사로 평생을 살았다.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졸업한 뒤 삼천포에서 한약방 점원으로 일하며 공부한 끝에 한약사 자격을 얻고, 사천을 거쳐 진주에 터를 잡고 한약방을 50년 동안 운영한다. 약이 싸고 잘 듣는다고 소문이 나며 남성당한약방은 대단한 성공을 누렸다. 선생은 그로부터 얻은 이익을 바탕으로 교육과 언론, 문화 등 다방면에 폭넓은 관심을 두었다.

영화는 지역언론에서 퇴직한 기자 김주완이 선생의 이야기를 취재하는 형식으로 꾸려졌다. 과거 선생에 대한 기사를 쓴 일이 있다는 김 기자에게 김현지 감독이 연락하여 함께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지 않겠느냐 제안한 것이 그 시작이다. 수많은 언론의 인터뷰 제안을 거절해온 선생에게 말을 붙여보려 시도하지만 영 먹혀들지 않은 모양이다. 시행착오 끝에 영화가 택한 건 주변인을 인터뷰하기. 진주를 아는 사람치고 선생을 모르는 이가 많지 않으니 하나하나 찾다 보면 더 깊은 곳으로 돌입하리란 기대다.
 
▲ 어른 김장하 스틸컷
ⓒ 시네마달
 
100억원대 학교 기부한 그 어른의 은밀한 삶

계획은 대성공이다. 인터뷰를 꺼리는 선생이지만 선생을 아는 다른 이들은 사정이 다르다. 이런 사람이라면 알려야 한다고, 하나같이 발 벗고 나서서 돕는 것이다. 앞선 사람이 뒷사람을 소개하고 뒷사람이 그 뒷사람을 소개하니, 전혀 알지 못했던 미담이 고구마 줄기 캐듯 모습을 드러낸다. 선택이 곧 사람을 말하고 업이 곧 생을 말하니 김장하가 누구인지를 굳이 김장하 본인에게 들을 필요는 없었던 일이다.

그래서 김장하가 누구인가. 그는 교육인이다. 일평생 좁은 한약방에서 일만 한 것 같던 그가 1980년 100억 원이 넘는 돈을 출자하여 학교법인을 설립하고 명신고등학교를 세운다. 박리다매의 한약방이 어찌나 입소문을 탔던지 대단한 수익을 올린 모양이다. 그 돈을 고스란히 학교 사업에 들이니 신생 명신고가 진주 시내에 명성을 얻어간다.

그렇게 오래 학교법인을 갖고 있을 줄 알았는데, 선생의 계획은 전혀 달랐다. 10년 간 이사장으로 자리하며 졸업생들을 배출하고 체육관과 도서관까지 번듯한 시설을 완비한 뒤 1991년 돌연 학교를 국가에 기부한다.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일군 업을 조건 없이 나라에 돌리는 건 고생은 본인이 하고 즐거움은 사회가 누리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김장하라는 이가 어떤 사람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뿐인가. 그는 평생을 장학사업에 힘썼다. 스스로가 가난한 형편으로 중학교까지밖에 다니지 못한 한이 있어서인지, 여건이 안 되지만 공부에 뜻이 있는 이들을 지원하는 일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20대부터 이어온 장학사업이 한 평생 이어지며 그에게 장학금을 받아 공부한 이들이 1000명을 넘어서는 것으로 알려졌다.

 
▲ 어른 김장하 스틸컷
ⓒ 시네마달
 
파면 팔수록 드러나는 선행의 기록

여기까지가 예상한 것이었을 텐데, 영화가 지속될수록 생각지 못한 이야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폭압적 가부장제로부터 도망친 갈 곳 없는 여성들에게 피난처를, 극단엔 단원들이 모여 연습하고 극을 올린 공간을, 시문학엔 문학상을 유지할 수 있는 기금을 마련해주었다는 이야기가 확인됐다.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나 비석하나 없던 강상호 선생 무덤에 제 이름을 알리지 않는 조건으로 비석을 세울 비용을 댔고, 환경운동과 형평운동에도 베풂을 멈추지 않았다.

조건 없이 나누면서도 생색내는 일 없던 그에게 정치인의 관심도 이어진 모양이다. 대선후보 시절 노무현과 문재인 두 대통령이 불시에 그의 한약방을 찾아 만났다는 일화도 영화 속에 담겨 있다. 정치에도, 유명인들과 교우하는 데도 별 관심이 없던 그지만 그저 소심한 사람인 것도 아니다. 전교조 탄압으로 해직교사가 속출하던 시기, 명신고엔 다른 학교보다 많은 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있었다. 이들을 해직하라는 외압이 없었을 리 없지만 명신고에선 단 한 명의 교사도 해직하지 않는다.

뿐인가. 학교를 운영하며 교사로 채용해달라는 청탁도 끊이지가 않았다. 정치인을 비롯해 이런저런 사람들이 청탁을 해왔지만 한 건도 받아들인 일 없었다는 일화가 인상 깊다. 이처럼 외압과 청탁을 뿌리친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명확하다. 학교엔 감사가 들어왔고 서류 하나하나를 가져다 문제를 살피는 일이 벌어졌다. 마음고생이 여간 아니었을 테지만, 문제될 일을 한 적 없으니 차라리 편했다던 그의 말이 인상 깊다. 그가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방면에 걸친 관심이 말해주듯 선생의 지향은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다. 사람 아래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는 형평운동의 정신은 고스란히 선생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1920년대 백정 인권의 신장을 외치며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운동이 곧 진주의 정신이라 선생은 말한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라는 형평운동의 정신은 선생이 후원하는 극단의 연극무대를 통해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돈은 모이면 똥처럼 더럽지만 필요한 곳에 나눠 뿌리면 거름이 된다는 지론대로 선생은 제가 가진 돈으로써 사회를 보다 공평하고 애정 넘치는 곳으로 만들어간다.
 
▲ 어른 김장하 스틸컷
ⓒ 시네마달
 
선생의 오늘을 만든 실천적 유학의 가르침

여러모로 훌륭한 영화다. 그저 선생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감상을 일으킨다. 일생 귀한 뜻을 품고 살아간 이다. 흔치 않아서 더욱 귀한 가르침이 가르침인 줄도 모르게 젖어든다.

다만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시사회 자리에서 감독은 '김장하 정신이란 게 있느냐, 있다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큰 정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정신이 김장하 정신이라 생각한다고 말이다. 선함과 한약방을 빠지지 않고 열었던 성실함, 사람이라면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낙관 같은 것이 김장하를 만들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김주완 기자는 선생에게 세 명의 스승이 있었다고 말한다. 조부와 남명 조식 선생, 그리고 공자라고 말이다. 이 말을 듣고서야 의문이 풀린다. 이 답은 선생 철학의 근간에 무엇이 있는지를 그대로 내보인다. 유학, 특히 남명학파의 겸허하며 실천적인 학문이 그의 철학을 이룬 것이다. 부와 명예를 탐하지 않고 거침없는 기상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에 몰두하는 사상이 꼭 선생과 어우러지는 듯하다. 삶은 가난하다 할 만큼 가볍게 꾸리면서도 늘 스스로를 일깨우며 실천적인 수행을 거듭하는 자세가 선생의 지난날을 이루었다 할 것이다.

이를 보면 선생과 같은 이가 왜 또 나오지 않는가도 명확해진다. 가치와 사상을 세우는 유학이 오늘날 한국에선 실전되었다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감독의 편한 생각과 달리 그저 선한 마음으로는 다다르기 어려운 경지가 선생의 삶이었다 해도 좋겠다. 아마도 선생에게 속 깊은 이야기를 끌어낼 수 없었기 때문일 테지만, 영화가 이와 같은 이야기를 전혀 담지 못했단 점은 아쉽다. 학문과 사상이 뿌리 뽑힌 현실에서 그저 현상만 담는다면 선생은 어디까지나 이례적인 인간으로만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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