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판결'이 드러낸 윤 정권 '과거사 퍼주기'의 허약함
[오태규 기자]
▲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과 앤서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장관이 2023년 11월 1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
ⓒ 로이터=연합뉴스 |
윤석열 정권은 문재인 정권 때 악화한 한일관계를 개선한답시고, 일본에 '과거사 퍼주기' 정책을 마구 펼쳤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 전범 기업이 강제동원 노동 피해자에게 정신적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깡그리 무시한 채 '제3자 변제'라는 꼼수를 동원해 한국 쪽이 그 돈을 대신 갚도록 한 일입니다. 정부의 영향권에 있는 공익재단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사장 심규선)을 움직여 일본의 전범 기업이 낼 위자료(윤 정권의 표현으로는 판결금)를 갚게 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이런 해법에 쌍수를 들어 환영했습니다. 일본의 주장, 즉 '식민지 지배로 인한 모든 손해 배상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해결됐으니 한국 쪽에서 알아서 해결하라'는 주장을 완벽하게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윤 정권을 강제동원 피해자를 비롯한 많은 시민의 반대에도 한일 관계 개선을 통해 중국 견제를 바라는 미국과 일본의 위세를 업고 이 방법을 힘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중국을 겨냥한 한미일 준동맹 체제를 선언한 8월의 캠프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담과 공동성명(캠프데이비드 정신)입니다. 또 한일 양국 관계에서는 올해만 윤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일곱 번이나 정상회담을 하며 밀월을 과시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 만세하는 이용수 할머니 23일 오후 서울고법 민사합의33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청구를 인용하고 위자료 지급을 명령했다. 재판이 끝난 후 위안부 피해자 중 한 명인 이용수 할머니가 기뻐하며 만세를 부르고 있다. |
ⓒ 이정민 |
그러나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 요구를 포기하고, 한미일과 한일이 힘을 합쳐 중국을 견제하자는 윤 정권의 정책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드러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서울고등법원 제33민사부(부장판사 구희근)가 23일 내린 일본군'위안부' 판결입니다.
서울고법 제33민사부는 지난 23일 이용수 할머니 등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청구 소송에서 국가면제를 인정해 피해자들의 소를 각하한 1심(2021년 4월 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5민사부 민성철 판사)을 물리치고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재판부는 이제까지 형성된 국제관습법으로 볼 때 국가면제는 인정되지 않는다면서 일본 정부가 원고에 각 2억 원씩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이에 앞서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4민사부(재판장 김정곤)는 2021년 1월 8일, 고 배춘희 할머니 등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다른 소송에서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고 원고 승소 판결을 한 바 있습니다. 이 판결은 일본 정부가 무시하고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음으로써 그대로 확정됐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용수 할머니 사건도 똑같은 자세를 취할 것이 확실합니다. 이로써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소송에 대해 혼란을 빚었던 한국 법원의 판단은 통일됐고, 일본 정부는 배상 의무를 지게 됐습니다.
서울고법의 이번 항소심 판결은 내심 원고 패소를 기대했던 일본 정부를 매우 당황케 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판결 직후 바로 가미카와 요코 외상 이름의 담화문을 내고, 윤덕민 주일대사를 불러 항의했습니다.
가미카와 외상은 담화문에서 "이 판결은 국제법 및 일한관계 합의에 명백하게 위반하는 것이고, 매우 유감이다. 단호하게 수용할 수 없다"라면서 "한국 정부가 국가로서 스스로 책임을 갖고 즉시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다시 한번 강하게 요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전에 강제노동 판결 때 했던 일본 정부 주장과 판박이입니다. 일본 정부는 26일 부산에서 열리는 한·중·일 외무장관 회담을 위해 방한하는 가미카와 외상이 박진 외교부장관에게 재차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하겠다는 방침입니다.
▲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2023년 11월 1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최고경영자 서밋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리더스 행사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
ⓒ 로이터=연합뉴스 |
윤 정권도 아직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지만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른바 한일관계에서 '과거사 리스크'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윤 정권이 안고 있는 과거사 리스크는 위안부 문제뿐 아닙니다. 제3자 변제로 한고비 넘긴 것처럼 보이는 강제동원 문제도 실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강제동원으로 배상 판결을 받은 피해자 15명 가운데 11명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마련해 준 돈을 받았지만, 4명은 여전히 수령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법원도 재단이 이들에게 지급하기 위해 낸 공탁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시간의 완급은 있을 수 있겠지만 전범 기업 재산의 현금화는 불가피한 처지에 있습니다. 시한폭탄이 재깍재깍 돌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위안부 판결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역사 문제의 청산 없는 한일관계 개선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해 준 것입니다. 여러 가지 술수로 동원해 잠시 역사 문제에서 눈을 돌리게 할 수 있지만 역사 문제를 없앨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가해자 일본'과 '피해자 한국' 사이에는 여전히 풀어야 할 과거사 숙제가 존재하고, 이 숙제를 풀지 않고는 아무리 미래를 강조하고 협력과 우애를 외쳐도 건널 수 없는 골이 존재한다는 것을 것을 이번 판결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윤 정권은 강제동원 문제 때처럼 꼼수로 과거사 문제를 피해 가려 하지 말고, 일본에 과거사 반성과 인식의 변화를 요구해야 합니다. 일본의 그런 변화가 있어야 한일관계가 더욱 단단하게 밝게 전개될 수 있습니다. 엄연하게 존재하는 과거사 문제는 어설프게 우회해 돌아갈 수 있는 암초가 아닙니다. 반드시 정면에서 뛰어넘어가야 하는 필수 과제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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