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된 학자들 곁 지킨 소나무... 신지도의 풍경
[완도신문 유영인]
▲ 신지도의 소나무 |
ⓒ 완도신문 |
신지면 금곡마을에는 원교 이광사 선생이 신지도 유배 시절 심지(心志)를 굳게 하기 위해 심었다는 수 백년 된 낙낙장송(落落長松) 한그루가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다.
1755년 3월 의금부. 영조는 나주벽서사건에 관련된 죄인들을 친히 국문하고 있었다.
이때 원교는 의금부의 하늘에 대고 영조 앞에서 대성통곡했다.
″전하! 내게 뛰어난 글씨 재주가 있으니 부디 내 목숨을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생각에 잠긴 영조는 원교의 집안을 잘 아는 지라 그의 통곡을 가긍히 여겨 함경도의 회령(會寧)으로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국문을 마쳤다.
- 이규상, 병서재언록 중 서가록
원교는 양명학을 받아들인 학자로, 정재두를 스승으로 모시고 양명학을 깊이 공부해 평소 인품이 높기로 소문이 자자한 선비였다. 목숨을 부지한 원교가 회령으로 귀양을 가자 그를 따르는 수십여명의 제자들이 유배지 가는 길을 스승과 같이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회령에서의 모반이 걱정돼 1762년 원교를 다시 절도안치(絶島安置)인 강진현 신지도의 금곡리로 이배(移配)시켰다.
절해고도 신지도의 금곡리에 도착한 원교는 처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마을 앞 바닷가에 해풍에 강한 한그루의 작은 소나무를 심고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그 나무가 200여년의 세월이 흘러 낙낙장송이 되었고 오늘날 원교목(圓嶠木)으로 불리고 있다.
지난 2012년 10월 완도군 보호수로 지정됐으며 수고 15m, 흉고직경 350cm, 수령은 약 210년으로 보고 있다.
수세(樹勢)는 매우 좋으나 아래쪽에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진 가지 두 개가 외과 수술을 받았다. 전체적인 수형은 외줄기가 5m이상 뻗어있고 옆으로 가지 하나가 뻗어 받침대 2개를 설치하여 안전성을 확보했다.
▲ 신지도 금곡마을 |
ⓒ 완도신문 |
이 낙낙장송은 당시에는 볼품없는 한그루의 소나무였지만 원교의 신지도 유배 생활의 고달픈 삶과, 동국진체와, 원교서결의 완성을 다 지켜보며 원교를 응원했을 지도 모른다, 설령 모른다 해도 해남 대흥사의 주지승이 대웅보전이나 침계루(枕溪樓)의 글씨를 얻고자 할 때. 강진 백련사의 주지승이 만경루(萬景樓)의 글씨를 부탁하러 찾아 왔을 때도, 화마로부터 절을 보호하고자 지리산에서 먼 길을 온 천은사(泉隱寺)의 주지승 등 근동의 모든 이들이 원교를 찾았을 그때를 다 지켜본 산 증인이다.
또 도화서 화원이었던 신지도 만호 신한평(申漢枰)이 노년의 원교를 그리기 위해 화구를 들고서 찾았을 때도 이 낙낙장송은 원교를 멀리서 지켜봤을 것이다.
소나무는 원래 지조와 절개를 나타낸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누구에게 굴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 원교 |
ⓒ 완도신문 |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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