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김겨울의 '그 시절'을 견뎌낸 기록
편집자주 - 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독서가이자 유튜버, 라디오 DJ로 활동 중인 김겨울의 산문집이다. 2016년부터 2023년까지 '씨네21' '릿터' '자음과모음' '서울리뷰오브북스' 등 여러 매체에 썼던 글을 묶었다. 기고 당시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개고를 최소화하고, 미공개 원고 몇 편도 수록했다. 여러 매체에 산발적으로 기고했던 글을 모으다 보니,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로 끼워 맞춰지진 않는다. 지금껏 여섯 권의 책을 낸 저자는 '처음으로 전체를 묶어내는 한 문장의 설명이 없는 책'이라고 했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글들이 제자리를 찾을지 고민하면서도 "오로지 김겨울로 쓰는 첫 책"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진은영의 시 '대학시절'을 곱씹으며 견뎌낸 대학시절, “단 하루도 빠짐없이 죽음을 생각하던 10여 년” 등 차가운 삶 속에서 책과 글의 온기에 천착했던 시절로 독자를 인도한다.
일도 사랑도 ― 와, 이렇게 쓰니 정말 어른이 된 것 같다 ― 힘차게 밀어보지 않고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남이 나에게 일을 주지 않으면 내가 일을 벌였고, 나를 전부 버리는 한이 있어도 상대에게 모든 걸 주려고 했다. 믿었던 일과 믿었던 사랑에게 뒤통수를 맞기도 여러 번이었지만 그 결정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어쨌든 돌아올 때는 뭐라도 배우는 게 있었다. 이를테면 무턱대고 믿음을 쏟아부으면 안 된다는 교훈이라든지(그래놓고 나는 또 속절없이 믿음을 쏟아붓곤 했다). 진자가 제아무리 제자리에 돌아온다고 해도, 진자 자체가 움직이고 있다면 돌아올 때는 늘 새로운 자리가 된다. 공전하는 지구가 실은 태양계의 움직임 때문에 매년 다른 자리에서 한 해를 시작하듯이. 그래서 아직도 매번 힘차게 밀고 힘차게 자빠진다. 나는 미련 없이 움직이는 진자다. - 「1991」 중에서
대학교에서 이중전공으로 철학을 선택하기까지 늘 철학의 영토 주변부를 맴돌았다.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는 동안에도 언젠가는 철학을 더 공부하리라고 생각했다. 나의 삶보다 큰 그 무언가에 나를 바치고 싶다는 생각, 그리하여 그 거대한 생각의 제전 속에서 웅크릴 자리를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철학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조사하고 글을 쓰는 과정은 삶의 다른 가능성을 기꺼이 잠시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황홀했고, 철학의 부름은 무슨 짓을 해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 없는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 「어쩌다 대학원」 중에서
바라건대 진심으로 경청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살고 싶다. 판단을 잠시 멈추는 사람들의 세계, 상대방의 삶에 자신의 상을 욱여넣으려고 들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 복잡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세계. 세 줄 요약만 듣고 홀연히 사라지지 않는 이들의 장황한 말을 듣고 싶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물화되지 않는 소중한 순간을 목격하고 싶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은 곧 돈이므로 우리는 고전 다이제스트와 ‘결말 포함 줄거리’와 ‘후렴구 모음’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하다못해 친구의 말조차 세 시간 이상 듣는 일이 적은 세상에서 그나마 우리 자신을 톱니바퀴로만 두지 않을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반드시 예술 경험일 것이다. - 「이상적인 경청의 세계」 중에서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을 작게 틀어둔 채 눈을 감고 내일 아침 요거트에 뭘 넣어 먹을지 생각하다가, 문득 터무니없는 행복을 느꼈다. 울며 자해를 하거나, 자다가 환청을 듣고 깨거나, 다시 잠들지 못해 새벽을 뒤척이거나, 내일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며 내일 아침의 요거트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영원처럼 반복되던 긴 시간을 버텨서 이런 날이 오기로 했다는 것이. 이것을 알려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모르고도 울기를 멈추지 않았기에 오늘이 왔다는 사실을 오늘의 나는 알고 있다. - 「삶을 좀 아는 사람」 중에서
졸업 후에 나는 알려져 있듯 책을 소개하는 유튜버가 됐다. 유튜브에서 나는 문학 책도 과학 책도 인문학 책도 소개한다. 유튜브에서는 책을 소개하고 출판인들에게는 유튜브 강연을 한다. 내가 책과 유튜브라는 각각의 경계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 혼란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전에 책의 저자 소개에 이렇게 썼다. “유튜브와 책 사이, 글과 음악 사이,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 서서 세계의 넓음을 기뻐하는 사람.” 이 세계가 이렇게 넓다는 것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 영역이 실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그 모든 게 인간이라는 것이 아주 기쁘다. - 「혼란의 추억」 중에서
말하자면 삶의 어떤 부분에서 나는 약간의 유잼이 된다. 나머지 부분이 노잼이라도 그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 갑자기 유잼 캠프 같은 곳에 들어가 유잼 훈련을 받을 수도 없고, 그저 남은 수십 년의 시간 동안 좀 더 능청스럽고 여유로운 사람이 되기를 노력하는 수밖에. 친구 사이에 내가 웃기진 못해도 많이 웃을 수는 있고 그걸 좋아해주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조금 더 환한 웃음을 짓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환하게 웃으면 친구도 환하게 웃을 테지 별 수 있나. - 「재미없는 사람」 중에서
나는 내가 신애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 그것은 결코 지울 수 없는 내 삶의 기록이기도 하다. 우리가 변화해가는 모습 역시 그렇게 남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고기를 줄이고 일회용품을 줄일지 이야기한다. 어떻게 하면 성차별을 극복할 수 있을지 이야기한다. 각자의 일을 응원하고, 나이 마흔의 삶을 그려본다. 그 즈음에는 꼭 근처에 살자고 말한다. 이렇게 곁에서 서로를 응원하고 서로를 자랑스러워하며 우리의 삶은 계속될 것이다. 그저 이렇게 죽 사는 것이 삶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든든한 친구와 10년 뒤, 또 10년 뒤를 그리며 바지런히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삶은 아름답게 마감되겠구나, 하는 그런 예감이다. - 「우리의 시절」 중에서
겨울의 언어 | 김겨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60쪽 | 1만85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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