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시사회서 터져 나온 탄식... 기억해야할 군인 둘
[김도균 기자]
▲ 지난 16일 밤 <서울의 봄> 시사회에서 정훈채 목사(오른쪽)와 김준철씨(가운데)가 김성수 감독(왼쪽)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날 김 감독은 무대 인사에서 12.12 쿠데타 당시 반란군을 저지하다 전사한 고 김오랑 중령과 고 정선엽 병장에 대해 안타까움과 함께 특별한 존경의 마음을 밝혔다. |
ⓒ 김도균 |
지난 16일 밤, 서울 삼성동 메가박스 코엑스점에서 열린 <서울의 봄> 시사회. 스크린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정훈채 목사는 두 눈을 잠시 감더니, "아"하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영화는 1979년 12월 12일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을 주축으로 한 정치장교들의 사조직 '하나회'가 일으켰던 군사쿠데타를 다루고 있다. 쿠데타 세력은 자신들을 방해할 것으로 예상되는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을 부하 장교 진급 축하연을 빙자해 연희동의 한 요정으로 유인한 다음 정승화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을 불법 연행했다.
이렇게 시작된 쿠데타는 다음날 새벽 반란군이 수도경비사령부를 장악할 때까지 9시간가량 진행됐다. 12월 13일 자정을 넘긴 시각, 쿠데타에 동원된 육군 특수전사령부(특전사) 예하 제1공수여단 병력이 국방부 B-2 벙커 점령을 시도할 때 끝까지 저항하던 한 초병이 반란군들의 총기 난사에 쓰러지는 장면에서 정 목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영화에서는 가명으로 처리됐지만, 당시 반란군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은 병사는 국방부 제50헌병중대 소속 고 정선엽 병장, 바로 정 목사의 친동생이다. 광주 조선대학교를 다니던 정 병장은 당시 제대를 석 달 정도 남겨 놓고 있던 말년 병장으로, 1979년 12월 13일 새벽 국방부 B-2 벙커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정 목사에게 선엽은 집안을 책임질 믿음직한 동생이었다. 어려운 형편 탓에 비록 자신은 상고를 나와 은행원으로 근무하고 있었지만, 착하고 똑똑했던 동생의 뒷바라지는 능력이 닿는 한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숨지기 일주일 전 통화에서도 "유학을 가고 싶다"며 전역 후 진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았던 동생이었다(관련 기사 : "전두환 반란군과 싸우다 죽은 동생, '전사'로 바로잡아야" https://omn.kr/1wcre).
그날 새벽 반란군에 목숨 잃은 정선엽 병장·김오랑 중령
대법원의 12.12 군사반란 판결문에 따르면 박희도 1공수여단장(육사 12기)은 12월 13일 새벽 오전 1시 35분경 국방부와 육군본부(육본)가 있던 용산 삼각지에 도착한 후 먼저 육본 근무 헌병들을 무력으로 제압한 후 무장을 해제시켰다. 이후 국방부 청사 점령과정에서 경계 병력과 반란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신군부는 쿠데타 성공 직후 작성한 상황일지에서 지하벙커 입구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헌병 근무자 2명 중 1명을 체포했지만, 나머지 1명은 "반항 사격과 함께 벙커로 도주 중 사살됨"이라고 기록했다. 그가 정선엽 병장이다. 가슴 부위에 3발, 목에서 머리로 관통한 1발 등 모두 4발의 총탄을 맞고 정 병장이 현장에서 숨진 시각은 13일 새벽 2시께. 이날 새벽 반란군에게 목숨을 잃은 군인은 한 사람 더 있었다. 바로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이었던 고 김오랑 중령(당시 소령·육사 25기)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육군 특수전사령부를 장악하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최세창 3공수여단장(육사 13기)은 예하 병력을 동원해 특전사령부 외곽을 포위했다. 13일 새벽 0시 15분께, 3공수여단 15대대 병력이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를 시도했다.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육사 23기)이 이끄는 10여 명의 체포조가 특전사령관 집무실로 난입할 때 권총 한 자루로 반란군에 맞서 상관을 지키려던 김 중령은 목 아래와 복부, 허벅지 등에 6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정 사령관 역시 왼쪽 팔에 총상을 입은 채 주저앉았다. 반란군은 부상당한 정 사령관을 끌고 갔다. 피를 흘리며 현장에 쓰러져 있던 김 중령은 한동안 그대로 방치되었고, 뒤늦게 의무대로 후송됐지만 끝내 절명했다.
43년 만에 바로잡힌 그날의 진실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배우 정해인씨가 김 중령을 모티브로 한 오진호 소령 역을 맡아 비극적 장면을 재연했다. 김오랑 중령의 평전 <역사의 하늘에 뜬 별 김오랑>을 쓴 김준철(학군28기·특전사 대위 전역)씨는 목격자들의 진술을 근거로 김 중령의 맥박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면서 좀 더 신속한 조치가 취해졌다면 그를 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고 아쉬워했다.
'참군인 김오랑 기념사업회' 사무처장(현 대한군인기념사업회장)을 맡아 김오랑 중령에 대한 추모사업을 진행하던 김준철씨는 지난 2000년 초부터 여러 해 동안 국회를 쫓아다니며 군사반란에 끝까지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던 두 군인에 대한 명예회복 운동을 벌였다. 이런 노력으로 지난 2013년 4월 '고 김오랑 중령 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후 정부는 국무회의를 거쳐 고 김오랑 중령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하는 영예 수여안을 의결했다.
2014년 4월 1일 특전사 창설 56주년을 맞아 열린 훈장 전수식에서 고인의 형님인 태랑씨는 '훈장이 너무 늦게 수여된 것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디고 느려 보이지만 이렇게라도 동생의 의로운 죽음을 알아주는 세상이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관련 기사 : 특전사, 고 김오랑 중령에 훈장 전수 https://omn.kr/7ndl).
아울러 고 정선엽 병장의 추모사업도 진행하던 김준철씨는 막다른 벽에 부딪쳤다. 정 병장 모교인 조선대학교에 요청해 명예졸업장 수여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김오랑 중령과는 달리 장교가 아닌 병사 신분이었던 정 병장의 공적기록이 없어 좀처럼 진전이 없었던 것이다. 고민하던 김씨는 지난 2021년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에 정 병장 사망의 진상을 규명해 고인과 유가족의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는 취지로 진정했다.
그동안 정 병장의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계엄군과의 오인사격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하지만 위원회 조사 결과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몸싸움을 벌이면서 벙커 진입을 막았던 정 병장이 '상관의 명령 없이는 총기를 내어줄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티자 반란군이 M-16 소총을 발사했다는 목격자 진술을 확보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반란군은 이미 총탄을 맞고 쓰러져 있던 정 병장의 목 부위에 권총을 쏴 확인 사살까지 했다는 새로운 사실도 확인했다(관련 기사 : '오인사격 사망' 12·12 국방부 초병, 실제론 권총 확인사살됐다 https://omn.kr/1xzzy).
▲ 지난 2022년 9월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고 김오랑 중령의 사망구분을 순직에서 전사로 변경해 달라고 국방부에 요청했고, 국방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현행 군인사법은 '전사자'를 "'적과의 대항 또는 적의 행위로 사망한 사람', '무장폭동, 반란 또는 그 밖의 치안교란을 방지하기 위한 행위로 인하여 사망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
ⓒ 김준철씨 제공 |
위원회는 지난 2022년 3월과 9월, 각각 정선엽 병장과 김오랑 중령에 대해 사망구분을 순직에서 전사로 변경해 달라고 국방부에 요청했고, 국방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현행 군인사법은 '전사자'를 "'적과의 대항 또는 적의 행위로 사망한 사람', '무장폭동, 반란 또는 그 밖의 치안교란을 방지하기 위한 행위로 인하여 사망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반란군에 대항하다 목숨을 잃은 김오랑 중령과 정선엽 병장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는 결론이었다.
두 사람이 반란군의 총격에 숨진 뒤 43년만이자, 지난 1997년 대법원이 12.12 사건을 군사반란이라고 명확히 규정한 지 25년 만의 일이었다.
▲ 정선엽 병장의 묘비 뒷면에는 지난 2022년 국방부가 사망구분을 바로잡은 데 따라 전사로 수정되었다. |
ⓒ 김도균 |
김준철씨와 함께 지난 14일 오후 국립 서울 현충원을 찾았다. 8묘역 38315번은 육군 병장 정선엽의 묘다. 묘비 뒷면에는 그가 "1979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리고 있다. 지난해 국방부가 정 병장의 사망구분을 순직에서 전사로 바로잡은 데 이은 후속초치다. 그런데 29번 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고 김오랑 중령의 묘비는 아직 수정되지 않은 채 여전히 순직으로 남아있다.
▲ 고 김오랑 중령의 묘비. 뒷면에는 여전히 그가 1979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순직한 것으로 나와 있다. |
ⓒ 김도균 |
'군인의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하는 문제는 필연적으로 '역사를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란 물음과 맞닿아 있다.
지난 2020년 12월 국방부는 중앙 전공사상심사위원회를 열어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작전에 투입됐다가 숨진 군인 22명을 '전사자'에서 '순직자'로 변경했다. 당시까지 서울현충원 28묘역과 29묘역에 안장된 진압군 22명의 묘비에는 '1980년 5월 OO일 광주에서 전사'로 표기되어 있었다.
정부가 40년 만에 이들의 사망 구분을 전사에서 순직으로 바로잡은 가장 큰 이유는 5.18 당시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행위가 아니라 헌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였다는 1997년 대법원 판결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사망한 진압군을 '전사자'로 규정하는 건 광주시민을 사실상 '적'으로 간주한 것이라는 지속적 문제제기도 큰 몫을 했다.
지난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전두환씨 등 주요 피고인들에게 원심과 마찬가지로 반란 및 내란죄를 적용, 성공한 쿠데타라 할지라도 처벌할 수 있다는 판례를 남겼다. 대법원의 선고는 12·12는 '군사반란'으로, 5·17 비상계엄 확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은 '국헌 문란 목적의 연속된 폭동'으로 규정했던 원심 판결을 유지한 역사적 판결이었다.
쿠데타 관련자들에게 법의 심판이 내려지긴 했지만, 대법원 확정 판결 후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관련자 전원에게 특별사면·복권이 이뤄짐으로써 정치적 거래라는 비판을 자초했다. '사면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자들에게 정치적 부활의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우려는 결코 기우가 아니었다. 전두환씨는 아무런 반성 없이 줄곧 역사 왜곡에 앞장섰고, 사죄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반란가담자 중 일부는 지금까지도 법원 판결을 부인하면서 12.12쿠데타와 5.18유혈진압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김준철씨는 몇 해 전 육사와 국방부 앞에서 김오랑 중령의 추모비를 육사 교정 안에 설치할 것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육사 생도 신조처럼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 김 중령의 죽음이 군인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역사를 부정하려는 이들의 작태를 그저 바라만보면서, 후세의 평가에 맡기자는 목소리는 무책임하다고 했다. 정의와 불의, 진실과 거짓을 가리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쿠데타를 일으켰던 정치군인들의 행태와 대척점에 서 있었던,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했던 두 군인의 죽음을 제대로 기억해야 할 이유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서울고법 "한반도 내 위안부 동원 불법 인정... 일본, 배상하라"
- "소변 폐지" "교류 아님"... 연세대 총학선거에 지방캠 혐오 봇물
- 서울 복판서 "각하, 5.18 진압 잘했다"... 전두환 기린 전직 군인들
- 다음 포털뉴스 검색매체 제한 논란... "현 정부에 유리한 환경 만들어"
- 사무실 바깥으로 나간 청년들... 갓생 없지만 급여는 확실합니다
- 9·19합의 파기 첫날에 접경주민들 "약속 어겨" "앞뒤 안맞아"
- 윤 대통령 처남 측 강력 반발 "이런 기소, 단군 이래 최초"
- [박순찬의 장도리 카툰] 살려주세요
- 인요한의 최후통첩..."당 변화 없으면, 강한 메시지 담을 것"
- 이복현 금감원장, 은행 횡재세 도입 정면 반박... "거위 배 가르자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