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개혁 과제와 새로운 국가지도층의 부상
한국 경제가 이만큼 성장, 발전해 온 것은 당시 시대가 당면한 도전과 과제에 나름 적절한 대응을 해왔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는 지금 다시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지금 한국 경제가 직면해 있는 과제의 성격은 과거와는 크게 다르다. 과거의 주 과제가 한국인에 내재해 있는 잠재력을 결집해 이에 걸맞은 나라발전을 이루고 소득수준을 향상하는 것이었다면, 지금 한국이 당면한 과제는 한국사회와 국민의 잠재력, 기본역량 자체를 높여 선진사회로 확고히 진입해 나가는 것이다. 전자는 국내외 자본을 동원하고 인프라를 건설하여 해외에서 도입한 기술과 설계로 공장을 짓고 투자와 고용, 생산을 늘리는 것이 핵심이었다면, 후자는 우리 사회 전반의 합리성과 효율성, 교육의 질과 기술·지식 수준을 높이고, 공정경쟁 질서와 사회적 신뢰 제고, 그리고 일하는 방식의 개선 등을 이루어내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전자는 하드웨어를 설치하는 것이 주 과제였다면 후자는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주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후자가 훨씬 어렵다. 여기에는 압축성장이라는 것이 없다.
■
「 과거와 달라진 한국 경제의 과제
‘소프트웨어’의 업그레이드 절실
개헌으로 국가지배구조 개편하고
비전·의지 갖춘 정치세력 길러야
」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최근 통계를 보면 한국 근로자의 근로시간은 여전히 회원국 평균보다 훨씬 많고, 1인당 노동생산성은 G7이나 회원국 평균수준에 크게 못 미친다. 1위인 아일랜드에 비하면 3분의 1 수준이다. 인구는 줄고 일인당 근로시간도 줄어들고 있으며 투자율도 낮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결국 우리 경제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지 않으면 성장은 정체되고 국가 위상은 추락한다.
지금 한국이 당면한 이러한 과제를 제대로 풀어갈 수 있기 위한 내부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무엇보다 정치, 사회적 여건이다. 1960년대 초와 지금을 비교해 보자. 구한말, 일본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의 신분계급이 거의 완전히 붕괴했고 해방 후 토지개혁으로 지주계급이 해체되었으며 한국전쟁을 통해 그나마 남아있던 부와 자산은 거의 파괴되었다. 1960~70년대 우리나라가 신산업을 육성하고, 기업인들을 지원하며 수출지향적 정책개혁을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남미나 인도, 필리핀 등과 달리 대지주라든가 수입대체업자 등 기득권 저항세력은 미미했다. 이것이 우리나라가 이들 국가와 달리 수입대체 정책이나 재분배 정책에 구속되지 않고 수출과 산업화를 위한 광범위한 제도개편과 정책개혁을 통해 고성장을 실현해 나갈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이 되었다. 거기에 군부에 기반을 둔 강력한 정치권력과 박정희 대통령의 유능하고 강단 있는 행정력이 이를 가능하게 해 준 것이다. 경제도약이 시작되고 반세기가 더 흐른 지금 한국사회는 재벌, 노조, 시민단체 등 강고한 기득권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 우리나라가 당면한 도전을 돌파해 나가기 위해선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기반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첫째는 국가지배구조를 개편하는 것이다. 지난 30여년 우리나라의 기득권과 사적 권력은 더욱 강고해졌으나 국가권력 구조와 행정 능력은 더 취약해졌다. 거기에 5년 단임 대통령제는 국가 전반의 시계(視界)를 짧고 좁게 하고 있다. 우리가 당면한 개혁과제를 돌파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 후자가 더 보강되고 유능해져야 한다.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국가지배구조 개편과 개헌이 필요하다.
둘째는 우리 사회 문제점에 대한 정확한 분석에 기반을 둔 비전과 이를 실천하려는 강한 의지를 갖춘 새로운 국가지도층의 부상이다. 디지털 혁명, 급변하는 국제정세 흐름을 통찰하는 능력과 비전,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춘 지도자 그룹 또는 정당이 형성되어야 한다. 통합과 협치를 이룰 포용성을 갖추면 더 좋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는 그 뿌리가 매우 깊고 서로 얽혀 있다. 어느 한두 분야의 정책, 제도개편으로는 오늘날의 문제를 치유할 수 없다. 지금 한국의 혁신은 현실에 대한 정치한 분석과 종합적이며 체계적 접근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 인재의 흐름과 성공의 방식을 지배해온 인사제도와 보상유인 체계를 전반적으로 재편해 나가야 한다. 우리 국민은 어떤 인센티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추구하는 능력에서 세계 어느 나라 국민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왔다.
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개혁을 10~20년, 또는 한 세대에 걸쳐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밀고 나갈 정치적 세(勢), 국가권력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주먹구구식 논쟁, 지역 정서와 팬덤에 기대어 오로지 정권쟁취를 위해 대립을 위한 대립을 이어가는 오늘의 정치지형에서 벗어나 지역을 초월하고 냉철한 현실분석과 미래 비전에 기반을 둔 정당이 나오길 기대한다. 기존 정당의 환골탈태도 좋고, 신당의 출현도 좋다. 어떤 경우든 그 비전을 일관성 있게 장기간 추진해 나갈 수 있으려면 이제는 보다 젊은 세대가 주도그룹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국대 손준호 6개월째 구금…中, 클린스만 호소에도 "법대로" | 중앙일보
- "남편, 돈 대신 제주땅 받아와"…그 교사 120억 날린 사연 | 중앙일보
- 팩폭 '서장훈식 위로' 왜 떴을까…'청년비하' 野가 되새길 때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
- “의사 양반, 나 죽기 싫어요” 존엄 지킨다던 노인의 본심 | 중앙일보
- 강남 청약 30평대 사라졌다…몰래 남겨둔 '29가구의 비밀' [부동산? 부동산!] | 중앙일보
- "서울 안가길 잘했네" 울산서 일사천리 암치료…'원팀' 덕이었다 [지역의료, 희망있다] | 중앙일
- "몸에 안좋다?" 라면은 억울하다…'이것' 넣고 끓이니 건강 한끼 [Cooking&Food] | 중앙일보
- [단독]김기현 10억 이재명 18억…107억 원한 '쪽지예산'도 있다 | 중앙일보
- 이번엔 사무실 근무중 단추 풀었다, 7급 공무원의 노출 방송 | 중앙일보
- 난데없이 형수 등장했다…'불법촬영·협박' 황의조 스캔들 전말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