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권력자들도 때론 못 본다
대통령의 생각을 엿보는 건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다. 최근 더중앙플러스(The JoongAng Plus)에 연재되는 ‘박근혜 회고록’도 마찬가지다. 오늘 얘기하려는 건 그중에서도 권력자의 맹시(盲視)다.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통령으로서 임기 첫해인 2013년 가을 진영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물러났다. 실세 장관의 난데없는 퇴장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런 취지로 설명했다.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아 내가 욕을 먹더라도 공약을 손질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관련 전문가들과 상의한 결과 소득 하위 70%의 노인을 대상으로 매달 10만~20만원의 기초연금을 국민연금 가입 기간과 연계해 차등 지급하는 것으로 조정했다. 진 장관의 거친 반발은 굉장히 놀랍고 뜻밖이었다.”
‘놀랍고 뜻밖이었다’가 튀었다. 기억과 달라서다. 취재 기록을 들췄다. 사퇴한 지 한두 달 흘러선가, 진 전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기초연금과 국민연금 연계는 안 된다고 보고했을 때 (대통령이) ‘알아서 하라’고 했다. 나중에 수석을 통해 ‘연계한다. 다른 소리가 나와선 안 된다’고 하더라. 연금 전문가들은 절대 연계 안 된다고 했다. 장관이 하는 일이 없다. 대통령이 직접 보고를 안 받으니 현장과 대화할 시간에 보고서를 (어떻게) 잘 만들지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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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전 대통령 "이유 모르겠다" 보며
권력자의 치명적 맹시 위험 절감
'솔직하고 사려 깊은 조언자' 절실
」
박 전 대통령은 전문가들과 상의했다고 했지만 사실상 장관이 배제된 채 청와대와 관료가 일했다. 장관으로선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 그만두고 싶어 한다는 얘기가 이전부터 돌았다. 직접 ‘한계’ ‘무력감’을 호소했었다. 박 전 대통령에겐 그러나 돌연한 일이었다.
박 전 대통령의 유승민 전 의원에 대한 언급도 인상적이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어느 순간부터 유 의원이 모임에 안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에 유 의원이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그 이후에 계속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정확히 그 이유를 모른다.”
유 전 의원은 2008년 이미 박 전 대통령과 거리를 뒀다. 서로에 대한 시각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박 전 대통령은 유 전 의원을 발탁했다고 여기고 유 전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을 선택했다고 여겼다. 박 전 대통령에게 유 전 의원은 ‘가신(家臣)’이었지만 유 전 의원은 스스로 ‘대통령 메이커’로 인식했다. 박 전 대통령에게 필요한 건 충성이었고, 유 전 의원에겐 용인이었다. 유 전 의원이 침묵해 덜 드러났을 뿐, 간격은 확연해졌다. 박 전 대통령이 벽을 느꼈다는 게 2012년이던데, 그 전엔 덜 인지했다는 게 신기했다.
박 전 대통령 얘기를 꺼낸 건 마침 연재된 회고록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맹시는 있다. 고급 정보가 매일 쌓이는 권력자도 예외는 아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물러나는 순간에도 부동산이 (다른 나라에 비해) 폭등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시장 데이터 대신 대통령 맞춤형 데이터를 내밀었다. 어쩌면 지금도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믿고 있을는지 모른다. 윤석열 대통령도 서울 강서구청장 보선 상황을 잘 몰랐다는 얘기가 있다.
필부필부와 달리 권력자의 맹시는 문제가 된다. 중대해질 수 있다는 사안이라면 더군다나다. 박 전 대통령의 유 전 의원 관리 실패는 둘 모두에게 파국적이었다. 부동산·비핵화 얘기만 나오면 문 전 대통령이 소환된다.
윤 대통령도 못 보는(또는 안 보는) 부분의 관리에 신경 써야 한다. 지름길은 없다. 듣고 싶거나 듣기 편한 얘기만 들어선 안 된다. 민심을 듣는 기능도 하는 민정수석실도 없으니 이전 대통령들보다 더 노력해야 보일 것이다. 500년 전 마키아벨리는 사려 깊은 조언자들을 두라며 이렇게 말했다. “진실을 듣더라도 결코 화내지 않는다는 걸 알려야 한다. 조언자의 말이 솔직하면 솔직할수록 더욱 그들의 말이 더 받아들여진다고 믿게끔 처신해야 한다. 누군가 무슨 이유에서건 침묵을 지킨다는 걸 알게 되면 노여움을 표시해야 한다.” 진리다.
고정애 Chief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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