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임꺽정’의 홍명희, 남양 화교 사회서 뭘 배웠을까

2023. 11. 24.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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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남양(南洋·동남아) 문화


김기협 역사학자
벽초(碧初) 홍명희(1888~1968)는 1914년 말에서 1917년 말까지 3년간 남양(싱가포르 등)에서 지냈다. 이 시기 그의 모습은 많이 밝혀져 있지 않다. 훗날 회고 중에도 이 시기에 관해서는 단편적인 에피소드뿐, 무엇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며 지냈는지 정색하고 밝힌 내용이 별로 없다.

27세에서 30세까지, 누구의 인생에서나 매우 중요한 시기다. 그에게는 특히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1910년 초 4년간의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했고, 몇 달 후 조선 망국에 이어 부친 홍범식(1871~1910)의 자결을 겪었다. 아버지는 유서에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나 조선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잃어진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 20대 후반을 싱가포르 등서 지내
나라 되살리는 새로운 방안 궁리

화교들의 본국 혁명 지원에 자극
무장투쟁보다 실력 양성에 눈떠

“남양은 미개지역”은 오래된 편견
‘근대=서양’ 고정관념서 벗어나야

홍명희가 탈상 직후 중국으로 떠난 것은 복국(復國)의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가 6년 후 귀국할 때까지 실제로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남양(南洋)이었다. 독립운동의 중심지 상하이에 독립운동을 위해 찾아갔던 이 청년이 남양이라는 미지의 땅으로 넘어가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홍명희에게 특별했던 신규식

충북 괴산군에 있는 역사소설 『임꺽정(林巨正)』의 작가 벽초 홍명희의 생가. 1910년 한일병합에 항거하며 자결한 부친 홍범식의 고택이기도 하다.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문화재청, 위키피디아]

홍명희의 남양 행은 신규식(1880~ 1922)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신이 홍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는 신의 타계 소식을 들었을 때 잡지의 조사(弔詞) 청탁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일화가 보여준다. 1922년 10월 1일자 ‘동명’에는 너무 애통해서 글도 못 짓겠다고 홍명희가 편집자 최남선에게 보낸 편지가 조사 대신 실렸다.

대한제국 무관이던 신규식은 합방 후 자결 시도에 실패하고 중국으로 가 동맹회에 가입하고 그곳 혁명지도자들과 친교를 맺었다. 임시정부가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을 길을 연 최대의 공로자였다.

신규식은 상하이에 온 홍명희를 매우 아꼈다. 순국의 뜻을 먼저 이룬 인물의 아들에게서 뛰어난 천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청년을 새로운 방식의 독립운동으로 이끌고 싶은 마음에서 남양 행을 권했을 것이다.

홍명희의 옛집에서 가까운 괴강가 제월대 광장에 있는 벽초 홍명희 문학비.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문화재청, 위키피디아]

자결 시도 때 한쪽 눈 시력을 잃고 ‘애꾸’란 뜻의 예관(睨觀)을 아호를 쓴 신규식은 시야가 넓은 사람이었다. 실력 양성이 외적 타도보다 독립운동의 더 중요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홍명희에게 남양 행을 권했다면 중국혁명을 지원한 화교 사회와 같은 역할을 맡을 한교(韓僑)사회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홍명희는 남양에서 3년을 지내고 상하이에 돌아온 후 곧 귀국했다. 남양 사업은 포기했으나 ‘실력 양성’의 길은 한결같이 지켰다. 귀국 후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 사업이 신간회였고, 신간회가 좌절된 후 『임꺽정』 집필에 전념했다.

그의 1918년 귀국은 해외 무장항쟁보다 국내의 실력 양성 운동으로 방향을 잡은 결과였다. 귀국 후 신간회 등 조직사업에 주력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자 소설 집필에 집중했다. 『임꺽정』 집필은 그에게 주어진 여건에서 가능한 최선의 독립운동이었다.

동남아 화교, 19세기 말에 1000만

동맹회 싱가포르 지부 간부들과 함께한 쑨원(앞줄 가운데). 1905년 일본에서 여러 혁명단체를 통합해 설립된 동맹회는 이듬해 싱가포르 지부를 만들고 쑨원의 혁명활동을 지원했다.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문화재청, 위키피디아]

신규식이 생각한 남양은 당시 중국인이 화교 사회를 중심으로 생각하던 남양이었다. 대부분 식민지 상태에 있던 동남아에서 인구의 4~5%를 점하는 화교는 준 지배계급의 위치를 누리고 있었다. 많은 인력을 현지에 데려올 수 없던 유럽인 지배자들이 높은 문화-기술 수준을 갖고 원주민과 유리된 정체성을 가진 화교 집단을 다각적으로 활용한 결과였다.

남양 화교 인구는 19세기 초 100만 명 선에서 19세기 말 1000만 명 선으로 늘어났다. 유럽인의 식민지배가 자리 잡던 기간이었다. 유럽인 지배 아래 화교는 상당한 혜택을 누리면서 현지 민중의 미움받이가 되기도 했다. 화교 박해 사태는 대개 식민지배 체제 아래 일어났다. 식민지배가 없을 때는 이주자들이 단순히 적응에 전념했으나 식민지배 아래서는 준 지배계급의 복잡한 입장에 섰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의 영역. 인접한 주요 문명권인 중국과 인도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두고 기본적 자연조건을 그 안에서 공유하는 하나의 큰 영역이다.

원래 남양 화교는 국가 정체성이 약한 집단이었다. 중국인 정체성을 지키더라도 출신 지역과 가문에 대한 소속감을 통한 것이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별로 없었다. 19세기를 지나며 변화가 일어났다. 원주민과 유럽인 지배자들 사이에 끼인 입장에서 ‘본국’의 뒷받침을 아쉬워하게 된 것이다.

당시 중국인의 위기의식은 국가의 중흥을 바라보는 ‘변법(變法)’과 국가체제의 교체를 바라보는 ‘혁명’ 두 갈래로 갈라졌다. 애초에 국가의식이 약하던 화교 사회는 혁명 쪽으로 치우쳤고, 무술변법(1898) 실패 후 본국의 조류가 혁명으로 기울자 혁명파의 지원 기지로 떠올랐다. 쑨원(孫文, 1866~1925)은 1903년 이후 아홉 차례나 남양을 방문하며 지원을 호소했고, 신규식이 가입한 동맹회는 그 지원의 통로 역할을 맡은 조직이었다.

왜 홍명희는 결국 남양을 접었나

홍명희

홍명희가 깊이 존경하던 신규식의 권유를 따르지 못하고 남양 사업을 포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이 전해 듣던 상황과 홍이 직접 겪으며 파악한 상황 사이의 간격을 추측할 수 있다.

남양에 관한 신규식의 정보는 동맹회에서 얻은 것이었다. 혁명의 지원 기지로서 화교 사회의 역할을 중시하는 동맹회 관점에서 현지 원주민은 지배-교화의 대상인 미개한 존재였다. 동남아에서 화교는 식민지배자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화교 사회 비슷한 한교 사회를 동남아에 건설할 수 있다면 독립운동의 유력한 방략이 되었을 것이다. 실현 가능성도 꽤 생각할 만한 사업이었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재력가들도 있었고 무력을 양성할 인적 자원도 있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1911) 등 중국 땅에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려는 노력과 비교한다면 동남아는 관헌(官憲)의 압력이 약하다는 점에서 좋은 조건이었다.

신규식

그러나 홍명희는 현지 경험을 통해 신규식의 막연한 전망을 넘어서는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원주민도 차츰 근대문명에 적응하며 민족주의 단계에 접근하고 있었다. 화교가 누려온 여건이 그대로 한교에게까지 보장될 형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화교와의 이해관계 충돌도 동맹회의 도움만으로 완전히 회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홍명희가 남양 사업을 포기한 결정적 이유는 목표로 하는 한교 사회 설계의 구조적 어려움에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본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입장에서 현지 식민지배자들과의 관계에 어떻게 임할 것인가. 독립운동을 위한 자원을 현지에서 확보하면서 원주민에게 가해자가 되는 길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화교와 협력관계는 어느 선까지 가능할 것인가.

근대에 대한 철저한 자기성찰 필요

홍명희가 남양을 전전하던 때로부터 1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그 지역 사정이 많이 연구되고 알려졌다. 대략 지금의 동남아다.

100년 동안 많은 연구성과가 쌓여 왔는데도 이 지역에 대한 일반적 시각은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요컨대 외래문명(중국문명, 힌두문명, 이슬람문명, 유럽문명)의 정복(또는 감화) 대상으로 보는 ‘타자화’ 시각이다. 외래인들은 이 지역에서 얻을 이득만 생각했지, 이 지역의 경험에서 ‘자기성찰’의 기회를 찾지 않았다.

교섭 상대로부터 자기성찰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상대와 나를 아우르는 ‘우리’의 입장을 세워야 한다. 상대를 ‘타자’ 아닌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통상적 기준이 ‘문명’이다. 문명을 갖지 못한 미개인은 인간의 조건을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하는 존재이므로 우선 감화(또는 정복)를 통해 문명인으로 만들어놓아야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동양’ ‘서양’과 별개의 ‘남양문명’을 상상해 본다. 문명의 주도권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동남아 같은 곳의 ‘문명’을 들먹인다는 것이 엉뚱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문명의 관념이 서양식 근대문명의 기준에 얽매여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광대한 영역의 많은 인구가 장기간에 걸쳐 한 어족(語族)의 언어들을 사용해 온 것은 사실이고, 그 후손들이 21세기 상황에서 상당 범위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근대화 뒤집기’란 제목으로 2년간 진행해 온 이 연재의 목적은 ‘근대의 반성’에 있다. 근대의 흐름 안에서만 근대를 바라보며 근대의 의미를 제대로 살피기 어려웠던 질곡을 벗어날 필요를 느낀 것이다. 이제부터 고찰을 남양(동남아)에 집중하려 한다. 근대적 변화를 줄곧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서 나름의 정체성을 지켜온 지역. 복잡다단한 근대적 변화의 의미를 폭넓게 비쳐 보여주는 좋은 거울이 될 것 같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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