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100년 산책] 인생은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2023. 11. 24.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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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중학교 4학년 때, 철학을 공부해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굳혔다. 대학에서 철학과를 선택했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사회적 환경이 허락지 않았다. 대학 후기에 학도병 문제로 대학을 떠났다. 해방과 더불어 다시 태어나는 희망은 얻었으나 학문을 계속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북한 공산 치하는 모든 희망을 빼앗았다. 탈북해서 7년 동안 중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도 철학 공부는 놓지 않았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내 인생의 계획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 6·25로 중단된 ‘정신지도자’ 꿈
철학과 현실 사이 간극에 고민
일반인 위한 수필 작가로 활동
되돌아가면 철학에 전념할 것

실천철학을 전공한 까닭

김지윤 기자

33세 때 대학 3곳의 시간강사로 다시 학문을 시작하다가 연세대에 부임하였다. 다시 철학을 향한 출발을 한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있었다. 한국철학이나 동양철학 대신 서양철학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근대 이후에는 서양철학이 세계를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문은 나를 위한 내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론적인 철학은 지식으로 받아들이되 전공 분야는 실천철학 분야를 택했다. 윤리학·종교철학·역사철학, 그리고 그 당시 세계적 연구 대상이었던 실존철학 등을 연구하였다. 철학 방법의 기초가 되는 인식론도 실천철학의 영역에서 재해석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인식과 진리에 관한 실천적 과제를 정리해 보고 싶었다. 한국철학회에서는 ‘시간의 실천 철학적 구조’를 발표했고 ‘시간의 종말론적 구조’라는 논문도 발표했다. 그러면서 『철학의 세계』 『윤리학』 『역사철학』 『종교의 철학적 이해』라는 네 권의 책을 남겼다.

그 당시의 철학과 현실 사이의 간격은 너무 심각했다. 마치 대학 철학이라는 기관차는 한강 북쪽에 머물면서 사회적 현실인 객차는 강남에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기관차가 뒤로 돌아가 객차를 끌어오지 않고 따라오라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그 간격을 메워야 하는데 교수들은 철학 상아탑에 안주하려는 자세였다. 나같이 중고등학교 경험과 사회실정을 잘 아는 누군가가 그 책임을 감당해야 했다. 그래서 철학적 사상을 현실과 생활개념에 연결 짓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반에 『고독이라는 병』과 『영원과 사랑의 대화』가 그 결과로 태어났다. 기대보다 독자들의 호응이 좋았다. 그렇게 20~30년의 세월이 지났다. 나도 모르게 철학 교수보다 수필작가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김태길 교수도 비슷한 길을 택했다. 법학을 공부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철학(윤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우리 사회에 도움을 주는 학문이 필요했을 것이다. 수필과 수상집을 남겼다. 그가 남겨준 ‘철학과 현실’ 계간지는 지금도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고 있다. 철학계의 3총사로 불리는 안병욱 교수도 철학의 대중성과 사회적 가치관으로 유도해 주었다.

나의 스승 안창호와 조만식

나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철학도가 되기 이전에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자랐다. 기독교 교리는 교회와 더불어 소중하나, 기독교 진리로서의 가치관은 교회 밖 민족과 현대인의 인생관으로 승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산 안창호와 고당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지도자를 통해 얻은 신앙관이다.

그래서 교회 영역 밖에서 혼자 신학 공부를 계속해 왔다. 지금은 어떤 목회자 못지않게 학문과 사상의 진리로서 신학을 추구해 왔다고 자부한다. 미국에 머무를 때는 세계적 종교학자인 M 엘리아데의 강의를 들었고, 하버드대에서는 P 틸리히와 R 니버의 강의도 경청하는 특전을 얻었다. K 바르트가 미국에 왔을 때는 두 차례 강연에도 참석했다.

그런 과정을 밟았기에 기독교 대학인 연세대에 머물면서 전국 대부분의 기독교 대학과 중고등학교를 위한 신앙 운동에 도움을 주었다. 숭실대에서는 개교 70주년 기념부흥회 강사로 초청받았고, 새문안교회의 100주년 역사에 최초로 평신도가 책임 맡아 부흥회를 도왔다. 내 책의 독자들인 신부가 성당에서도 신앙적 강연 요청을 하는 때가 있다. 명동성당도 그중의 하나이다. 미국과 캐나다의 대표적 한인교회에서도 30여년 동안 초청을 받았다.

기독교에 관한 저서도 여러 권 남겼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 기독교계에서는 내가 철학 교수인 동시에 기독교 사상가로 인정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지금은 내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를 묻게 된다. 세 가지 영역에 참여하는 동안에 철학 연구를 떠나 수필가나 기독교 사상가가 된 것 같기도 하고, 그 어느 하나에도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후회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라고 할까 섭리가 주어졌던 것 같은 일생을 보냈다.

자유와 인간을 위한 휴머니즘

그래도 그것이 나였다. 사람은 제각각의 인생을 살게 되어 있다. 성공과 실패는 사회가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철학으로 출발했던 내가 어느 사이엔가 인문학의 한 사람으로 남게 된 것은 사실이다. 인문학적 사유가 철학적 사고를 포함했던 것 같고, 철학은 인문학의 소중한 위치에 있으나 인문학의 영역 안에 머문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철학은 인문학과 공존하면서 그 특수성을 차지한다고 본다. 인문학은 어떤 학문인가. 자유와 인간애를 위한 휴머니즘의 학문이다. 그래서 역사와 사회의 주역을 담당한다. 인문학이 종교·철학·역사·문학 모두를 포함하면서 그 학문의 방향과 해답을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인문학이 철학을 포함한 인간과 사상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 대학으로 돌아간다면 철학도가 될 것이다. 인문학적 사유와 과제를 근원적이면서 전체적으로 다시 해석하는 것이 철학 본래의 과제이다. 인간적 삶의 가치관과 역사적 이해의 세계관은 철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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