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폭 '서장훈식 위로' 왜 떴을까…'청년비하' 野가 되새길 때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2023. 11. 24.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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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경제는 모르지만 돈은 많고 싶어!’ 엉뚱한 곳에 투자하는 사람을 풍자하는 말인가 싶었는데, 더불어민주당의 2030세대 대상 현수막 문구라는 소리를 듣고 그저 황당했다. 그런데 문장 구조가 어딘가 익숙하다. 2018년 출간돼 50만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책을 쓴 1990년생 백세희 작가는 기분부전장애(우울증보다 경미하지만 더 만성적인 우울 질환) 상태를 솔직히 토로해 많은 청년의 공감을 받았다. 역설적인 책 제목도 인기에 한몫했다. 그 이후로 “…지만 …고 싶어” 식의 제목을 단 책이 잇따랐다. 지난해 인기를 끈 자기계발서 『꿈은 모르겠고 돈이나 잘 벌고 싶어』도 비슷한 제목을 따르고 있다. 민주당의 또 다른 현수막 문구 ‘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살고 싶어’도 이 책 제목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 민주당 현수막 ‘청년비하’ 논란
베스트셀러 제목 얄팍한 차용
요즘 청년 공감 트렌드 못 읽어
‘서장훈식 위로’가 뜬 이유 봐야

“청년들은 무책임하다” 몰아가

지난 17일 더불어민주당이 총선을 앞두고 공개했다가 역풍을 맞은 청년 대상 캠페인 현수막. [사진 더불어민주당]

이 책들은 청년의 공감을 얻었는데 민주당 현수막은 왜 당 안팎의 비난을 받으며 사과로 끝났을까. 『죽고 싶지만…』은 만성적인 우울함에 시달리면서도 ‘떡볶이’가 상징하는 소소한 행복과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청년의 복합적인 심리를 풀어낸다. 『꿈은 모르겠고...』는 거대 이상이나 사회적 지위 대신 ‘고시원 생활 탈출’이라는 경제적 목표를 여러 개의 부업을 하며 달성하는 청년의 경험담이다. 이 책들은 청년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서 카타르시스를 주면서도 책임 있는 태도를 보인다. 반면 민주당 현수막은 청년들을 욕망에만 솔직하고 무책임한 사람들로 타자화한다.

민주당은 ‘솔직해도 괜찮아’ 식의 문구가 청년 응원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해도 괜찮아’ ‘…여도 괜찮아’도 10년 전쯤부터 책 제목으로 유행해온 문구다. ‘괜찮아’ 하는 위로는 5~6년 전쯤 큰 호응을 얻은 ‘김제동식 위로’로 요약된다. 김씨가 2018년 JTBC 토크쇼 ‘톡투유’에서 한 말이 특히 유명하다. 그는 “주변에서 취업 압박이 들어오지만 뭘 해야 할지 몰라 괴롭다”는 청중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사람이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까? (…) 그렇게 있으면 돼. 괜찮아. (…) 뭘 하려면, 뭘 할 수 있는 시간을 주든가. 젊은 친구들한테 왜 취직 안 하냐고 묻지 마세요. 그러려면 자기들이 즉각 즉각 취직이 잘 되는 사회를 만들어 놓든가.”

흥미로운 것은 2~3년 전부터 ‘김제동식 위로’보다 ‘서장훈식 위로’가 뜨고 있다는 점이다. 2021년 8월에 유튜브에 올라 800만 조회수를 기록한 쇼츠 영상 ‘김제동식 위로 vs 서장훈식 위로’가 있는데, 댓글을 보면 ‘서장훈식 위로’를 지지하는 댓글이 훨씬 많다. 영상은 김씨의 앞서 발언과 스타 농구선수 출신 서씨의 2016년 ‘청춘페스티벌’ 강연 발언을 비교했다. 서씨는 이렇게 말한다.

“기성세대가 청춘, 젊은 분들한테 그냥 점수 따고 좋은 얘기 하려고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거 즐기면 다 된다? (…) 즐겨서 뭘 이루어낼 수 있는 건 저는 단연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냉정하라고 말씀드리는 거고, 여러분들을 응원한다? 물론 응원합니다. 당연히 응원하죠. 그런데 무책임하게 뭐 노력하는 자가 즐기는 자를 못 따라간다? 완전 뻥이에요.”

서씨는 강연 영상에서 자신이 정말 좋아서 하는 농구인데도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너무나 힘들었다면서 “내 꿈을 어느 정도 이뤄보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즐겨서 되는 거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즉 고통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제동식 위로는 사회주의적 위로다. 개인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 일단 감정적 유대로 위로하고 원인을 사회구조에서 찾는다. 서장훈식 위로는 자유주의적·개인주의적 위로다. 개인의 어려움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현실적·이성적 조언을 준다. 실제로 개인의 문제는 순전히 개인 탓도, 반대로 순전히 사회 탓도 아니며, 우리 사회의 시스템 또한 자유주의 기반에 사회주의가 절충된 형태이기 때문에 두 가지 위로가 모두 필요하다.

다만 트렌드 변화는 눈여겨볼 만하다. 예전에 김제동식 위로가 인기 있었던 것은 기성세대가 개인의 ‘노오력’과 ‘하면 된다’를 윽박지르고 획일화한 ‘성공’과 ‘행복’의 기준을 청년들에게 강압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반대로 요즘 서장훈식 위로가 뜬 이유는 기성세대가 ‘…해도 괜찮아’라고 달콤하게 달래주거나 ‘태산이 높다 하되 안 오르면 그만이다’라는 식의 냉소주의만 퍼뜨릴 뿐 별 해결책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반작용이다.

김제동식 위로 vs 서장훈식 위로

‘팩폭’ 조언으로 유명한 서장훈 방송인의 ‘무엇이든 물어보살’ 출연 장면. [KBS Joy 유튜브 캡처]

서씨가 출연하는 KBS Joy 상담 프로그램 ‘무엇이든 물어보살’이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는 허황된 계획이나 욕망을 지닌 상담자들에게 ‘팩폭(팩트폭력)’을 날리지만 “깊이 생각해서 뭐라도 더 도움을 주려는 게 느껴진다”는 시청자들의 반응대로 현실적인 조언을 준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만이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트렌드는 계속 변한다.

민주당의 성향에는 김제동식 위로가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현수막에는 그런 위로와 비전이 있는 게 아니라 어설픈 MZ세대 흉내 내기만 있을 뿐이다. 사회주의적 위로나 비전을 제시하려면 ‘경제는 모르지만, 돈 걱정은 안 하고 싶어’ ‘정치를 잘 몰라도 모두 함께 잘 살고 싶어’여야 했다. 반대로 자유주의 비전을 제시하려면 ‘경제는 모르지만, 일하는 만큼 벌고 싶어’ ‘경제를 더 알아서 돈이 더 많고 싶어’ ‘정치는 잘 몰라도 안전하게 살고 싶어’여야 한다.

개인적 성공을 위한 경제 공부도 안 하고 공동체를 위한 정치 참여도 안 하면서 그저 ‘나는 잘살고 싶다’는 건 ‘의무는 모르겠고 권리는 누리고 싶어’라고 불평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그런 이들에게 영합하는 것은 ‘나라가 망하는 건 모르겠고, 표는 많이 얻고 싶어’의 포퓰리즘일 뿐이다.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도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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