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원의 마음상담소] 그게 우리의 궤도일지도 몰라

2023. 11. 24.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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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라는 드라마를 힐링물로 보신 분이 다수였지만, 이를 보기가 쉽지 않았다는 분도 많았습니다. 둘 중 하나의 경우였지요. 정신건강의학과 보호병동에서 근무해보았거나 입원해보았거나. 고증이 잘 되어있어 저 역시 ‘아이고 이런 분이 입원했구나’의 느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하나 쉬운 케이스가 없었습니다. 저희 연구실의 주요한 연구 주제인 비자살적 자해가 메인 스토리에 포함된 상황에도 괴로운 마음이 컸습니다.

병동의 모든 인물은 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족의 침입적인 사랑이나 학대를 참았고, 직장 상사의 가스라이팅을 참았고, 가정과 사회에서 주어진 기대에 부응하느라 매일의 고통감을 참았고, 애착 가던 사람들의 사망에도 슬퍼하기를 참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 드라마 ‘정신병동에도…’의 아픔
고통과 슬픔 애써 참는 사람들
우연한 실패를 곱씹지 마세요
자기가 잘하는 것 자랑하세요

마음상담소

실제로 역시 걱정스러운 쪽은 소리 내지 않는 사람들, 나만 참으면 될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중 가장 마음이 쓰이던 캐릭터는 수년간의 공무원 시험 낙방 끝에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병동 생활 중 내내 어색하게 웃고 있던 서완(사진)이었습니다.

실패 경험은 우리의 자아상과 자존감을, 뭔가를 잘해낼 수 있다는 주관적인 느낌인 자기효능감을 뒤흔듭니다. 그때부터는 생각을 곱씹고 또 곱씹는 반추와의 싸움입니다. 어째서 내가 그때 그런 결정을 했을까. 왜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실패했고, 나의 궤도는 이제 뒤틀렸어. 생각은 더욱 경직되고 완고해집니다.

그렇지만 왜요. 이미 완전히 잘 존재하고 있는 당신을 왜 새삼 누군가에게 다시 설명하려 하나요. 누가 지금의 상태를 불충분하고 실패한 삶이라 판단하나요. 내담자분들께 자주 드리는 질문이지만, “그건 누구의 목소리인가요?” 사실 우리 시도의 많은 경우는 실패로 끝납니다. 못 일어날 일도 아니지요. 그때마다 불의의 사건에 나의 존재와 가치를 임의로 엮어두고는 도전이 실패할 때마다 우리를 함께 허물어지게 두지 마세요. 그 도전이 실패한 것이지 내 삶이 실패한 것이 아닌데요. 나의 우연한 불행을 두고 함부로 실패했다 말하려 드는 사람에게도, 예의를 지키라 하세요.

다만 이때 자신을 지혜롭게 등 떠미는 노력도 함께 해주세요.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바뀌지 않는 상황에 오래 머물러 다만 참고 또 참으며 버티다 보면 우리는 결국 무력해집니다. 그게 되겠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 번아웃이 오고 자기효능감이 떨어진 것입니다.

실은 심리학적으로는 여러 요소가 잘 맞아떨어질 때 자기효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첫째, 상황적 요소, 둘째, 도전적 과제를 위해 투입한 노력의 양과 노력의 지속성, 셋째, 동기나 기대와 같은 인지적 요소입니다. 즉, ‘특정한 상황’ 하에 그간 ‘노력을 기울여 개발한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대와 신념’이 자기효능감입니다.

우리가 자기효능감을 느끼고 있지 못하다면 위 세 가지 요소의 문제로 그 힘이 발휘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휘둘려 혹은 상황이 그러해서 참전했을 뿐 실은 진심으로 원하는 영역이 아니었거나 실제로 자신과 잘 안 맞는 영역임을 이미 알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라면 자기효능감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와 시간을 다시금 집중할 수 있는 새로운 목표, 새로운 환경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지금 그 방향이 아닙니다!)

혹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아서 효능감을 느낄 기회가 없었을 수 있습니다. 충분히 노력했는지 여부는 이 과정이 재미가 있어지는지로 알 수 있습니다. 노력이 쌓이면 문득 재미있는 순간이 옵니다. ‘어? 이게 재미있네?’의 지점이 자기효능감이 올라온 시점입니다. 그때까지는 노력해볼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지금의 상황과 자신의 노력을 폄하하고 스스로 더이상 기대하기를 멈추었다면 자기효능감은 발을 붙이지 못합니다. 이건 마음의 틀을 조금 바꿔주세요. 자신이 얼마나 잘 맞는 곳에서 최선의 노력을 해왔는지 동네방네 알려주세요. 나의 뇌가 듣도록, 요란하게. 그렇게 셀프로 자기효능감을 챙기기 시작하면 그 이후에 만족감도, 성공도, 자존감도 따라오는 구조입니다.

그러니 기억해주세요. 익숙하다는 이유로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참아내는 것을 그만두세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내 존재를 입증하려 하지 말고, 나의 새로운 선택으로 지금의 상태에 균열이 일어날 것이 두려워서 자꾸만 홀로 감내하는 것을 멈추세요.

내가 정말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알아봐 주고 인생에서 자신을 가장 앞에 두세요. 하지만 군대의 장수처럼 비장하게 스스로를 앞에 두지 말고, 자신이 주최한 축제의 헤드라이너처럼 사세요. 예기치 않은 실패로 길을 잃고 슬퍼지더라도, 능청스럽게 그 축제를 계속해서 이어나가세요. 어쩌면 그것까지가 모두 우리 궤도일지도 몰라요.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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