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바깥으로 나간 청년들... 갓생 없지만 급여는 확실합니다 [변방에서 안방으로 : 일하는 사람책]
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한다.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필자의 지금을 들여다보아 변방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넓혀 먹고사는 오늘의 온도를 1℃ 올리고자 한다. <기자말>
[최문희, 고정미 기자]
나의 원가족은 모두 현장직에 종사한다. 부모님은 이른 아침 1톤 트럭을 타고 배추밭과 마늘밭을 오간다. 두 동생은 대규모 산업도시에서 땀을 훔치며 매일 작업복을 갈아입는다. 반려인은 작업실에서 종일 재봉틀을 돌린다.
흔히 공부 못하면 공장에 간다느니 하는 교사의 타박은 어린 시절부터 '철없게' 들렸다. 개중에 공부가 재밌는 친구는 선생이 되었고, 기술이 재밌는 친구는 기능직 고참이 됐다. 차츰 직장에 소속되지 않는 프리랜서 친구들도 생겨났다. 교사 말대로 공부 잘해서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드라마 속 인텔리의 모습은 비슷비슷한 산업의 한 장면이었다. 입시 공부는 한철이었다.
영업직으로 살던 이십 대 초반의 어느 날이었다. 카운터에서 일하는 직원 맞은편에 계산을 하려고 선 손님이 말했다. "공부 못 하면 이런 일 하는 거야." 자기 딴엔 귓속말로 한다고 아이에게 전한 무개념 발언에 이목이 쏠렸다. 그는 내심 당혹한 채 자녀를 데리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렇구나. 예절을 못 배우면 저렇게 되는구나. 이천 년대 초반의 일이었지만, 이후로도 그런 사람은 열에 한 명은 꼭 있었다.
살아온 경로와 가치관이야 제각기 다르기 마련이지만, 존재를 깎아내리는 발언을 입밖으로 내뱉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누군가는 현장직의 자부를 안고, (노골적으로 말하면), 돈을 더 많이 벌거나 더 많은 인류애를 장착하고 기부까지 해가며 살아가므로. 더구나 타인의 업을 깎아내리면서 모종의 다짐을 하는 사람이 교양을 탑재한 경우는 본 일이 없다.
세간이 편견을 장착하고 바라보는 직종, '블루칼라'. 제조업 혹은 건설업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블루칼라라고 부른다. 작업 현장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청색 작업복을 입고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라 흔히들 인식한다. 심지어 블루칼라로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 온 양육자들조차 자녀들만큼은 블루칼라로 살지 않기를 바라온 게 현실이다. 그 현실감각이 늘 옳은 것은 아니었단 걸 자녀들은 커가면서 알게 된다.
한국에서 노동계급은 유서 깊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처럼 몇 세대에 걸쳐 견고하게 형성되지 못했다(<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중 발췌). 대학 입시교육에 치중하느라 기술교육을 풍부하게 제공할 기회가 공교육에서 워낙 적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현장실습을 하러 온 특성화고 학생들을 '알바생' 정도로 보는 기업이 흔하다. 고교 졸업 후 기업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며 기술을 익혀 장인들을 양성하는 독일의 오랜 교육제도 '아우스빌딩'과 대조적이다.
초등학교 시절, 사회 시간에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뜻을 공부한 뒤 각자 "우리 부모님은 무슨 칼라에 속하는지" 미주알고주알 토론했던 기억이 있다. 자신의 양육자가 순백의 직종 '화이트칼라'에 속하길 바라는 눈치였던 건 당연지사. 소도시에 사는 서민층인 나와 주변 친구 부모님들은 대다수 장사를 하거나 공장으로 출근했다. 대기업 사무직은 두세 명 정도.
그 아래서 자란 자녀들은 하나같이 사무직의 꿈을 먹으며 자라났다. 그러나 안정이 스몄다고 생각한 책상 위 일들은 특정한 적성이 있어야 '버틸 수 있는' 자리였음을 겪은 뒤에야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 화이트든 블루든 '노동의 색'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차츰 내 주위에도 직장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한테 맞는 일을 모색하는 또래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블루칼라 프리워커>는 그 청년들의 이야기 중 하나다. '사무실 바깥으로 나간' 여섯 사람들의 일하는 각기 다른 삶을 인터뷰한 기록이다.
일하는 청년 여섯 명의 명랑하고 유머러스한 입담이 책 곳곳에 스며 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목수, 건설·시행사 직원 등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누구에게든 '효능감'을 갖길 바라는 마음을 담백하게 털어놓았다. 그들이 매일 향하는 곳은 철재 혹은 목재가 놓인 건설 현장 혹은 도시의 거리, 논밭이다.
"직접 만나 본 블루칼라 직종의 청년들은 '기술을 배워 억대 연봉을 버는 유쾌한 MZ 세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유형의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진지하게 집중하는 사람, 꿈 없이도 확실한 급여에 만족하는 사람,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단순한 일을 선택한 사람. 우리는 이들을 '프리워커'로 정의했다." - <블루칼라 프리워커>(이현구, 이다혜, 정원진 에디터) 중에서
안전하게 일하고 소진하는 삶을 지양한다
▲ 책 <블루칼라 프리워커> |
ⓒ ⓒ 스리체어스 |
어딘가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일하는 사람. 여섯 프리워커의 인터뷰 기록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현장직 혹은 육체노동을 막연하게 신성시하지 않는다. 일한 뒤 가뿐하게 쉴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 분투해온 과정과 이를 위해 일머리를 익힌 법을 오밀조밀 알려 준다. 잡부는 '물건을 수평으로 나르는 양중'과 수직으로 나르는 '곰방'을 하는 분들을 뜻한다며, 뜻 모르고 흔히들 "노가다 잡부!" 하며 남발했던 건설 용어의 뜻도 바로잡는다.
건설 현장 정리팀에서 일하는 서은지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눈가가 시원해진다. 어쩌면 뜬금포 같을지도 몰랐을 인터뷰어의 질문 한 가지. 매일같이 작업복 차림으로 일할 그에게 한 번쯤 꾸미고 싶지 않냐는 질문에 "같이 일하는 언니들과 가끔 소고기나 장어 먹으러 가면 그뿐"이라는 답변이 호쾌하다.
인터뷰이 각각의 입담, 자유로운 질문과 답변이 매력인 이 책은 노동을 주제로 한 도서 특유의 경직된 근육을 요가 하듯 말랑하게 다림질해준다. 서은지는 형광봉을 흔드는 신호수, 운전자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도록 돕는 지게차 유도원 등 건설 현장에서도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일러 준다.
서은지를 비롯해 인테리어 디자이너 이아람, 스물아홉 목수 김민지, 환경 공무관 노다니엘, 건설 시행사 소속 정우진, 완주에서 농사를 짓는 전남현의 인터뷰는 그래서 '캐쥬얼'하다. 으레 현장직 하면 떠올리는 일용직, 노가다의 애환보다 다 같이 안전하기 위해 건설 현장에서 주의해야 할 점들이나 기술을 터득하고자 어떤 루트로 공부했는지 세세하게 조망한다.
개운하게 집중하고 타성에 젖지 않는 노동
서울시 관악구의 환경 공무관('미화원'이라는 차별적 인식이 만연해 새로 생겨난 명칭이라고 한다)인 노다니엘은 본래 기타리스트였다.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환경 공무관이 되기로 마음먹은 그는 쌀 마대를 등에 지고 동네를 뛰어다니며 체력 시험을 준비해 합격한다. 그렇게 시작한 환경 공무관의 업무는 어떤 식으로 이뤄져 있을까.
Q. '환경미화원' 하면 안 좋은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도 꽤 있다. 합격 소식을 듣고 주변의 우려는 없었는지.
A. …대다수 응원해 줬다. 또 내 입장에선 오히려 불필요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을 내 관계망에서 거를 수 있다는 점이 좋다.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굳이 내가 만날 필요는 없지 않나.
- <블루칼라 프리워커>(환경공무관 노다니엘과의 인터뷰) 중에서
유튜브 채널 <기타미화원>을 운영 중인 노다니엘의 영상을 한번쯤 시청해 보길. 단정한 환경공무관 복장으로 멋들어지게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뿐 아니라,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시작'해 어둠을 밝히는 사람들의 출근길을 생생히 볼 수 있다.
마구잡이로 쓰레기를 버리는 시민들이 밉다가도, 거리를 깨끗이 유지하고자 동료와 선배와 쓰레기를 이고 지는 일터 속 긴박함까지 접할 수 있다(최근 함부로 버려지는 '탕후루 꼬치'에 다치는 환경공무원들이 많다고 한다. 다 먹은 뒤 꼬치는 반으로 잘라서 제대로 분리 배출하자).
책 마지막 인터뷰이, 농부 진남현은 1990년생이다. "직장인이 직장 생활을 하는 멘탈을 가지듯, 농부는 농사일을 견디는 몸을 갖게 된다"고 슴슴하게 털어놓는 그는 자본을 들이지 않고 '무자본 농법'으로 쌀과 고추, 배추 농사를 지어왔다. 100만 원 든 현금 봉투와 60리터 등산 가방을 달랑 들고 시골 마을 '너멍굴'로 입성한 그는 석유는 최소한으로, 농약은 아예 쓰지 않는 신조를 갖고 밭으로 출근한다.
최근 '청년 농부' 붐이 일어난 바, 만 평 이상의 땅을 사들여 수익을 창출했다는 성공담이 유튜브에서 흔해졌다. '몇 개월만에 고수익 낸 비결', '〇〇살에 귀농해서 대기업 연봉을 버는 청년' 등 혹하게 하는 타이틀이 각양각색이다. 자연과 농촌에 대한 이해 없이 영상들을 본다면 귀농해서 먼저 할 일이 자본을 갖춰야 한다는 타성에 젖기 십상일 것이다. 농부 진남현은 그런 타성에 작은 균열을 내는 사람이다.
진남현은 인터뷰에서 농사꾼의 발소리를 듣고 작물이 자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인간이 만드는 미세한 진동이 작물의 뿌리를 더 깊게 하고, 작물이 더 많이 자랄 수 있게 하기에 자주 들여다봐야 한다고. 그는 완주 너멍굴에서 아내와 딸과 프리워커로서의 삶을 소소히 이어가는 중이다. 지나치게 치열하기보다 자연 농법으로 일하며 같이 행복해지려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안다는 것
문고판처럼 짤막하지만 한 방이 있는 이 책을 덮고 대관절 생각했다. 몸을 쓰는 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책상 자리에서 정신을 쓰는 일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중요한 건 이들 여섯 명의 프리워커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생각하게 해주었다는 것.
단지 적절한 노동의 양을 헤아려봤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의 한계를 안다는 것, 그리하여 '가까스로'가 아닌 꾸준하게 일 안에서든 일 밖에서든 나를 정비하여 내일 가뿐히 문간 밖을 나서는 내 능력의 눈금을 읽을 줄 안다는 것. 농부 진남현의 답변에서 그 힌트를 얻었다.
"육체노동은 몸과 마음을 조화롭게 만드는 일이다. 결국 농사를 지으면서 가장 많이 배우는 것은 욕심을 덜어내는 일이다. 해가 지기 전에 딱 여기까지만 한다."
- <블루칼라 프리워커>(농부 진남현과의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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