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때 의문사한 한희철... 그가 성남에서 했던 일은
[김성수 기자]
전두환 정권기였던 1983년 12월 11일, 그날은 나와 철도학교 동문인 한희철이 군대에서 의문사한 날이다. 한희철은 1978년 12월 국립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철도청에 근무하다 1979년 3월 철도장학생으로 서울공대에 입학했다.
오는 12월 11일이면 한희철이 이 땅을 떠난 지 어느덧 40년이 된다. 그가 죽은 날 나도 군복무 중이었다. 진실이 은폐되고, 사실이 감춰진 엄혹한 시절, 그래서 나도 당시 군대에서 그의 억울한 죽음을, 죽음의 원인을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은 거의 상투어가 되다시피 한 '자유' '민주주의' '사회정의'의 가치를 추구하다가 그는 23살의 젊은 나이에 망자가 됐다. 하지만 그의 희생덕분에 나는 40년이 흐른 지금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역사는 흐르고 사람은 가도 정신은 남는다. 산 자가 망자에 대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는 그가 남긴 정신과 열망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일 것이다.
▲ 이은희 단국대학교 초빙교수. |
ⓒ 이은희 제공. |
- 1970, 1980년대 당시 이은희 교수가 불교도인데도 가톨릭교도인 한희철과 종교의 벽을 넘어 함께 활동하고 가까이 지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나?
"한희철이 당시에 가톨릭교회의 범위를 넘어 활동의 폭을 넓혀 나갈 때에 나는 그의 활동의 일부를 함께했다. 한희철은 성균관대 근처에 있는 가톨릭대학생연합회(가연) 사무실과 한국에큐메니칼운동(혹은 종교일치운동)의 중심지였던 한국교회협의회(KNCC) 사무실을 자주 방문했다. 나도 여러 번 그와 동행하면서 가연과 KNCC의 선후배 학생들을 알게 됐다.
그래서 가톨릭을 비롯한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교파를 초월한 종교일치운동을 통해 우리사회의 민주화운동과 노동자, 빈민 등 경제적 약자들 지원하는 활동을 함께하며 종교일치운동의 범위를 확장해 불교, 천도교와 같은 범종교적인 종교일치운동도 모색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의 활동과정에서 나의 불교신앙을 벽으로 느끼지 않고 가톨릭이나 개신교 등 다른 종교인들과 격의 없이 함께 교류하고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일치운동에 대한 이런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대학 3학년을 보내면서 한희철, 이수열, 나는 대학 졸업 이후의 진로를 함께 논의하면서 일단 군대를 다녀오고 그 뒤에 다시 각각의 진로를 모색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대학 4학년 때인 1982년 5월 나는 동료들 중 제일 먼저 군에 입대했고, 이수열과 한희철은 성남지역에서 활동을 지속하다가 그 해 10월과 11월에 각각 입대했다."
- 한희철은 대학 입학 이후 군부대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광범위한 활동을 한 것으로 아는데 먼저 성남지역에서 주로 어떤 활동을 한 것인지?
"1984년 7월 군에서 전역하면서 나는 성남에서의 어떤 일들이 한희철 사망의 배경이 됐는지 의문을 풀기 위해 주로 내가 군입대한 이후부터 그가 입대하기 전까지의 그의 행적을 탐문했다. 이 과정에서 새롭게 만난 많은 사람을 통해 나는 10.26 이후부터 한희철이 군에 입대하는 1982년 11월까지 대략 3년 정도의 기간 동안 그가 누구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광범위한 활동을 했음을 알게 됐다.
한희철이 최초로 참여한 사회운동은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구명운동이었다. 고 이수열의 의문사위 진술서에 따르면 한희철이 10월 26일을 '자신의 제2의 생일'이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고 한다.
한희철이 순진무구했던 시절 존경하던 박정희 대통령, '그는 왜 그의 충실한 부하였던 김재규에 의해 살해돼야 했을까?' 이 모순된 사태를 접하며, 한희철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26에 대한 <뉴스위크> 등 여러 외신의 보도를 비교 검토하며 박정희가 독재자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이런 인식의 전환이 자연스럽게 한희철이 김재규 규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동기가 됐다.
▲ 서울공대 시절 한희철. |
ⓒ 이은희 제공 |
전두환이 대통령이 돼 신군부가 정권을 수립한 뒤 한희철은 대학생, 노동자, 빈민 등의 대중운동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장기적인 비전을 세우고 성남과 서울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먼저 성남시에서는 뜻을 같이하는 여러 대학의 동문들과 다수의 연구 학습모임을 만들었다. 당시 이양병, 나, 이수열을 포함한 모임은 서울 지역에서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1980년 말에 성남시대학생연합회(성대연) 준비모임이 결성되고 1981년에는 성대연이 출범하게 됐다. 1981년 겨울에는 성대연이 주최로 제1회 여명예술제를 개최했으며, 이때 한희철은 '노동자의 삶과 눈물과 희망을 담은' '나에게 이런 시절이 있었다'라는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과 동시에 1980년 겨울에는 주민교회, 지역청년 및 대학생들과 뜻을 모아 성남 YMCA 창립과정에도 적극 참여했다. 또 그 산하에 노동환경의 개선과 노동자의 권익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지역청년들의 모임인 탄천 클럽을 조직하고 한문, 국어, 생활과학, 영어 등을 가르치는 생활야학도 개설했다. 성남지역 시민운동권의 어른이셨던, 주민교회 이해학 목사, 신구대학 김준기 교수와도 잦은 교류를 하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러한 한희철의 당시 모습을 추억하며 이해학 목사는 '한희철은 참 좋은 친구였어. 나랑 친하니까. 이야기하다가 시간가는 줄 몰랐지. 내 서재에서 같이 자고 그랬어'라고 증언했다. 한희철의 뛰어난 친화력이 그의 활동과정에서도 가감 없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평소에 매주 미사를 보던 성남시 수진동 성당에서도 그의 활동은 이어졌다. 입대전에 청평역에서 역무원으로 일하던 철도노동자로서 한희철은 성남시 수진동 성당의 가톨릭노동청년회(JOC)에 가입해 노동자의 권익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또 노동자에 대한 교육과 문화활동, 노동운동지원 등을 하는 성남시 상대원동 분도수녀원 소속 '만남의집'과도 활발한 교류를 했다.
서울대 가톨릭학생회(울톨릭)에서의 활동도 김재규 구명운동이후 적극적이었다. 그가 3년 정도에 걸쳐 울톨릭 사무실에 남긴 글은 그의 사후 3회에 걸쳐 결집되어 자료집으로 나온 바 있는데, 그의 글은 그의 사상적 중심이 가톨릭 신앙이었고, 수난자 예수의 삶을 따르는 것임이 반복적으로 강조돼 나타난다.
울톨릭의 범위를 넘어 한희철의 활동은 가톨릭대학생연합회(가연)에도 이어진다. 당시 성균관대 근처의 대학로에 가연의 사무실이 있어서 그가 대학로로 나올 때에는 미리 내게 연락을 해 함께 가연 사무실을 방문해 동문들에게 인사시킨 적이 있다.
▲ 철도역무원 시절 한희철. |
ⓒ 이은희 제공 |
▲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한희철(철도고 시절). |
ⓒ 이은희 제공 |
- 사망 전 한희철의 3년여 활동 중에서 특징적인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었나?
"3년 정도의 짧은 기간임에도 그의 활동과정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은 한 마디로 그의 독실한 가톨릭 신앙이 그의 사회정치운동의 사상적 근원이었다는 점이다. 한희철이 사망 전에 남긴 글에서 보듯, 그는 항상 '하느님과 민주주의를 믿고 행하며' 살았고, '이 땅이 하느님의 공의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나라가 되기를 꿈꾸었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국민들 하나하나의 힘'이 모일 때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고 민주주의와 경제 정의가 이뤄진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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