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오칠, 두려움을 동력으로 [D:인디그라운드(170)]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의 일상을 빼앗았고, 많은 사람이 그 상실감으로 불안을 느꼈다.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 속에서 다시 찾은 일상은 그래서 더 소중하게 다가왔다. 코로나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연과 기후 위기, 전쟁과 혐오 등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것을 매일 잃어가는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잃고 사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혼성 2인조 밴드 오칠(OHCHILL)(기타·보컬 윤준홍, 드럼·코러스 김설)은 현재를 사는 스스로를 둘러싼 것들에 주목했다. 불타고 폐허가 된 도시에서 홀로 살아남은 자가 들려주는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 ‘더 버닝 시티’(The Burning City)는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시작된 앨범이라는 점에서 더 생생한 현재 오칠의 고민, 같은 시간을 사는 우리의 고민이 담겼다.
-2014년 팀을 결성한 이후 올해로 9년, 곧 10년차 밴드가 되네요?
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러서 9년 차 밴드가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둘이서 첫 공연한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죠. 저희 두 사람은 고향이 전주예요. 당시에 준홍 오빠는 전주에서 4인조 펑크 밴드를 하고 있었는데요. 팀이 와해되고 드러머를 찾던 와중에 공연을 자주 했던 클럽에서 일하고 있던 저에게 밴드를 하자고 제의했고 그렇게 만나서 지금까지 흘러오게 되었습니다.
-‘오칠’이라는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설) 이름 자체에는 큰 의미는 없어요. 결성 당시에 둘 다 엄청 빠져있던 스코틀랜드 밴드 ‘비피 클라이로’의 1집 수록곡에 ‘57’이라는 곡이 있었거든요. 단순하게 그 이름에서 가져온 거예요. 처음에 활동했을 때는 숫자 57로 밴드명을 표기했는데, 1집 발매를 기점으로 영문 ‘OHCHILL’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숫자 57로 표기해주시는 분들이 있는데, 57도 OHCHILL도 저희입니다.
-밴드 오칠의 9년을 돌아보자면요?
설) 처음에 밴드 제안을 받았을 때 ‘2년만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10년 차 밴드를 앞두고 있네요. 9년이라는 시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고 힘들기도 했고 감사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밴드를 하면서 인간적으로 더 성장하고 있어서 밴드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입니다.
준홍) 지나온 9년이라는 시간은 성장과 성숙의 시간이었습니다. 음악적으로도 그렇고 인간적으로도 그렇고요.
-두 사람이 한 팀으로 활동하면서 싸운 적은 없나요?
설) 아주 많이 싸웠고요, 다행히 지금은 싸우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밴드라는 일이 멤버들 간에 오피셜한 계약서를 쓰고 도장을 찍고 시작하는 일이 아니라 정해진 룰도 없고 계약 기간도 없죠. 그러다 보니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일까지 해결해야 하는 일이 참 많아요. 이렇게 불안정한 상황이다 보니 다투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의견 조율을 현명하게 잘하는 것이 밴드가 장수하는 핵심 요소라고 생각해요. 이걸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이제는 의견 조율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같은 마음과 방향성을 가지고 달리고 있어요. 시간의 힘이죠.
-둘이어서 좋은 점, 혹은 불편한 점이 있다면?
설) 저는 가끔 다른 밴드들을 만나면 조금 부러워요. 멤버가 많은 밴드를 보면 멤버들끼리 뭔가 복작복작 시끌시끌 재밌어 보이거든요. 저희는 둘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아니라서요. 그렇지만 둘이라서 좋은 점이 더 많아요. 저희한테는 멤버가 서로밖에 없기 때문에 존재의 소중함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서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예요. 인생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 하나 건지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저희는 건졌네요(웃음).
준홍) 아무래도 둘이라서 의견 조율이 빠른 부분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둘이라서 불편한 점은 딱히 없는 것 같아요.
-다가올 10주년을 어떻게 준비하고, 보낼지도 궁금합니다.
설) 음, 10주년은 많이 특별할 것 같지는 않아요. 올해 연말에 2집을 발매했으니까 내년에는 이 앨범을 가지고 왕성히 활동할 것 같긴 합니다. 한동안 못 나갔던 해외 투어도 다시 나가보고 국내에서도 분기별로 기획해서 성실하게 활동할 생각이에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아무래도 10주년 기념 공연은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한테 의미가 있는 곡으로 10주년 기념 싱글도 내려고 해요. 이제보니 특별한 10주년이 될 것 같네요. 하하.
-오랜 시간 밴드를 이어오고 있는 만큼, 밴드의 정체성도 확고해졌을까요?
설) 누군가 무언가를 10년 동안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게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정말 존경스럽고 대단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밴드를 10년 동안 하고 있네요. 저도 좀 대단한 것 같아요(웃음). 특히 저는 데드라인 직전까지 일을 미루고 미루다가 겨우겨우 마무리하는 성향의 사람인데요, 그렇게 게으른 제가 인생에서 무언가를 10년 동안 꾸준히 하고 있다는 자체가 참 놀라워요. 게다가 지치지도 않았고 앞으로 10년은 거뜬히 달릴 수 있을 거 같은 게 더 놀랍습니다. 한 가지 의문인 점은 10년이면 강산이 변하고 무언가를 깨달아서 현자가 되고 어른이 되어 있을 것 같았는데 저는 그렇지는 않아요. 10년 정도 하면 팀의 색깔도 정체성도 확고해져서 고민하는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고민도 많고 질문도 많은 상태입니다. 어쨌든 저희 두 사람이 함께 계속해서 만들어 가는 음악과 무대들 속에 오칠의 정체성이 있을 것 같아요.
준홍) 오칠은 김설과 윤준홍 두 명의 존재가 정체성이고 오칠의 색깔입니다. 두 존재가 부딪히며 만들어 가는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새 앨범 ‘더 버닝 시티’(The Burning City)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어떻게 시작된 앨범인가요?
설)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시작됐어요. 2019년도에 1집을 발매하자마자 코로나가 터졌고, 당시에는 아주 심각한 상황이었잖아요. 이상한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해마다 비는 많이 오고, 갈수록 더워지고, 믿을 수 없는 전쟁이 나고. 내가 노인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어요. 이 세상이, 이 평화가, 이 일상들이 당연한 게 아니구나 느꼈고 그냥 뭔가 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불안함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앨범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 같아요.
준홍) 코로나19의 기간 동안 불안과 고통이 준 선물입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하고 방황해도 결국 자리에 앉아 음악을 만들고 있고, 결국은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자는 생각으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4년 만의 새 앨범인데요, 이것도 코로나의 영향일까요?
설) 잘 모르겠어요. 1집 앨범을 발매하고 계속 작업을 했는데 완성이 될 때까지 시간이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1집 발매했을 당시에 코로나가 심각했고 이후로 2년 동안은 좀 우울하게 지냈던 것 같아요.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곡 작업들도 좀 진전되었던 것 같은데 4년 만에 새 앨범이네요. 올림픽도 4년마다 열리는데 왜 이렇게 오랜만인지 미스테리네요.
-이번 앨범은 오칠을 둘러싼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요. 여러 이야기 중 이건 꼭 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있다면?
설) 전반적으로 암울한 이야기들 속에서 희망의 메시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번 앨범에서 유일하게 희망을 노래하는 ‘쿠마’가 이 앨범에서 가장 중요한 곡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이 당장 내일 망하더라도, 우리는 오늘 사랑하는 사람을 챙기고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준홍)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은 시대상들에 대해서 담고 싶었습니다.
-주변의 것들을 담는 과정을 통해 기존과는 다르게 새롭게 본, 새롭게 느껴졌던 것들도 있을 것 같아요.
설) 조금 모순적이고 극단적인 말이 될 것 같은데요, 저는 저를 포함해서 인간들이 우주에서 가장 필요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먹고 자고 하는 것도 지구에 별 도움이 되지 않고 무얼 하든 간에 지구에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철 좀 들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앨범을 만들고 가사를 쓰면서 좀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그래도 잘 살아보려고 고군분투하잖아요. 그런 것들이 좀 짠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어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이 이제는 경이로워 보이기까지 해요, 아닌 사람들도 많지만. 어쨌든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잃어버렸던 인간애를 조금 되찾았습니다.
준홍) 제가 만든 노래에 설이의 가사가 입혀졌을 때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설이가 쓴 가사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 공유하고 이야기 나눌 때 제가 명확하게 바라보지 않고 깊게 생각하지 못했던 영역들까지 조금이나마 눈과 귀를 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홀로 살아남은 사람을 앨범의 화자로 설정을 하셨는데요. 여기에도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설) 다들 이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되는 것을 상상해 봤으면 좋겠어요. 혼자 남게 되었을 때 누가 가장 보고 싶은지, 뭐가 가장 먹고 싶은지, 무엇이 가장 후회되는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 시절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했는지 깨달을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앨범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장치들이 있다면?
설) ‘더 버닝 시티’라는 큰 주제 아래 10곡의 이야기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어요. 이 스토리들이 가장 효과적인 장치라고 생각해요.
준홍) 설이의 목소리입니다. 이번 2집은 설이가 노래를 많이 하는데요, 이야기의 주인으로서 감정의 표현에 집중할 수 있는 중요한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신곡 작업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점이나 어려웠던 점이라면?
설) 이번 앨범의 타이틀곡 ‘Something's Wrong’을 만들기까지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수록곡 중에 비교적 초반에 만들기 시작한 곡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마지막까지 수정한 곡이기도 해요. 벌스와 코러스의 차이가 극명한 곡이라서 코러스 멜로디를 붙이는 게 가장 어려웠습니다. 너무 다양한 멜로디들이 나와서 단 하나의 멜로디를 고르기가 까다로웠거든요. 결국에는 가장 처음에 만들었던 멜로디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쿠마’에 관련된 에피소드도 있는데요, 앨범 수록곡 중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한글로 쓴 가사에요, 가사를 쓰다 보면 한 번에 쭉 써지는 곡이 있는 반면에 끝까지 안 나오는 가사가 있는데요, ‘쿠마’가 후자의 곡이었어요. 녹음실에 갈 때까지 ‘쿠마’의 가사를 쓰지 못했어요. 그러다 갑자기 녹음실에서 가사가 나왔어요. 홀린 듯이 가사를 완성해서 무사히 녹음을 할 수 있었습니다.
준홍) 정말 짧은 시간 한 번에 쓴 곡이 ‘Dead Letter’인데요, 통기타로 가이드를 가볍게 녹음하고 별다른 수정 없이 녹음까지 한 곡입니다. 이 외에 곡들은 많은 편곡을 반복했고 심지어는 완성해놓고 중간에 뺀 곡들도 있고요, 올해 초에는 기존에 만들어두었던 후보곡들을 뒤엎고 생각보다 많은 곡을 새롭게 만들어 앨범에 실었습니다. 여러모로 힘들었지만 결국에는 이런 작업 덕분에 최근에 감정들까지도 잘 녹아있는 앨범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부분에 집중해서 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까요?
설) 앨범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셨으면 좋겠어요. 곡마다 전하는 이야기들이요.
준홍) 저도 앨범 전체의 흐름에 귀 기울여주셨으면 좋겠어요.
-요즘 시대엔 수록곡들이 대중의 귀에까지 닿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은데요, 수록곡 중에 꼭 소개해주고 싶은 곡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설) 저는 2번 트랙 ‘The Grey Area’를 소개하고 싶어요. 아무래도 곡의 분위기도 그렇고 가사도 우울하고 욕도 나와서 즐겨 찾는 곡에 들어갈 곡은 아닌 거 알고 있는데요, 그래도 이 앨범에 꼭 필요한 곡이고 중요한 메시지도 담고 있어서 한 3번 정도는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준홍) 저는 ‘쿠마’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뭔가 들었을 때 오칠스러운 노래는 아니지만 분명 저희 안에 있는 감정과 성향들입니다.
-오랜만에 정규 앨범인 만큼, 콘서트를 기대해봐도 되겠죠?
설) 정말 오랜만에 하는 단독공연이에요. 12월 16일 생기 스튜디오에서 앨범 발매 단독 공연을 준비하고 있어요. 이번 앨범은 다채로운 사운드가 매력적인 앨범이라서, 라이브 공연에서도 그 사운드를 실현하기 위해서 세션분들과 함께 만들 예정이에요. 평소처럼 둘이서 부수는 무대는 물론입니다. 또 이번 공연에는 게스트 밴드를 초대하지 않았는데요, 저희 둘의 긴 호흡을 기대해주세요.
-마지막으로, 밴드 오칠의 공통된 목표를 들려주세요.
설) 저희 앨범 재킷 사진에 힌트가 있어요. 1집도 그렇고 2집 앨범 재킷 사진에 저희가 나오는데요. 저희는 나이가 들어도 계속해서 음악을 하고 싶어요. 중년 밴드, 노인 밴드를 꼭 하고 싶어요. 앞으로도 그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앨범 재킷에 저희 사진을 계속해서 넣을 생각이고, 시간이 흘러 그 앨범 재킷을 다 모아서 보면 10년, 20년이 지난 오칠의 모습이 담겨 있겠죠? 일종의 아카이브에요. 앨범 재킷 사진에 그 세월이 드러날 정도로 오래 음악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이 세상이 망하더라도 아주 아주 천천히, 너무 잔인하지 않게 잘못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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