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 뺨칠 만큼 군부대 즐비…미군 '4대 군수기지'였던 부평 [Focus 인사이드]
100년 전 일제가 만든 훈련장
현재 인천광역시 부평구와 계양구(이하 부평)는 인구가 75만인 인천 북부의 중심지다. 전통적인 굴뚝 산업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많은 제조업체가 자리 잡고 있으며 서울이 가깝기에 베드타운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부평이 군사 도시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그것도 휴전선 일대의 전방과 맞먹을 정도로 많은 군부대와 군사 시설이 있다. 부평은 용산ㆍ진해와 더불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군사 도시 중 하나다.
보안 문제로 언급을 삼가고자 재편이 이뤄지기 전인 2000년 초반의 사례를 들어 거론한다. 부평구청을 중심으로 반지름 5㎞ 이내에 1개 보병사단, 1개 동원사단, 1개 보병여단, 2개 공수특전여단, 1개 군수지원사령부, 1개 보급창, 1개 주한미군 보급기지가 주둔했다. 얼핏 군사 요충지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부평이 이처럼 많은 부대와 시설이 집결한 군사 도시가 됐던 이유는 굴곡진 현대사 때문이다.
1920년대 말 부평수리조합이 결성돼 한강 하구와 굴포천 일대에 제방이 축조되고 관계 수로가 생기기 전만 해도 부평은 산기슭에나 주민이 드문드문 살던 오지였다. 그래서 관문인 부평역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통된 7개 역 중 하나이지만 가장 늦은 1934년에나 전기가 들어왔을 정도였다. 역과 그나마 사람이 모여 살던 부평도호부(현 계산동) 사이의 거리가 직선으로 6㎞여서 이용객도 많지 않았다.
그러던 부평은 100년 전 일제가 포병부대 훈련장을 만들면서 군사 도시로서의 역사가 시작했다. 경인선 철도로 병영이 위치한 용산과 직접 연결되고 인천항을 통해 일본에서 오는 군수 물자의 조달도 용이하기에 훈련 장소로 최적지라고 본 것이었다. 실사격 훈련을 한다면 당연히 탄착점이 필요하다. 통상적으로 탄착점은 안전이나 관측 등을 고려해 사격장 정면에서 잘 보이는 능선에 설치한다.
일본군은 현재의 산곡동 일대에 포대를 방열한 뒤 효성동에 위치한 천마산 남측 사면을 향해 포를 쐈다. 처음에는 몇 달에 한 번 훈련하는 정도였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장기간 야영하며 훈련을 하고는 했다. 그런데 개발 전 부평이 비가 조금만 와도 잠기는 상습 침수지역이어서 주민이 적게 산다는 것이지 사막처럼 무인지대는 아니었다. 당연히 훈련이 많아질수록 민초들이 겪는 고통은 커졌다.
일본군은 훈련 과정 중에 수시로 민폐를 끼치고는 했다. 그러한 행위가 종종 신문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는데, 훈련을 명분으로 경작지에 들어가 작물을 훼손시켜 수시로 농사를 망친 것은 그저 그런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일본군은 사단급 훈련을 하면 군인의 숙영을 아무런 보상 없이 강제적으로 민간에 할당했다. 평균 한 집에 다섯 명의 일본군을 없는 살림에 먹이고 재워야 했다.
일본의 침략 전쟁 때문에 이처럼 이 땅의 보통 사람이 고통받았다. 검열이 자행되던 시기였음에도 신문 기사에 살풍(殺風)이라는 격한 단어를 쓴 것으로 보아 당시에 주민들이 겪었던 어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오히려 일본이 패망 직전 정점을 찍었을 만큼 시간이 갈수록 강도가 더했다. 명백한 수탈이었지만, 일제는 이를 현지 물자 조달 훈련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미화했다.
대규모 시설이 들어선 이유
하지만 고통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일제는 1939년부터 부평에 대규모 후방 군수기지인 인천육군조병창(이하 조병창)을 건설했다. 이는 일본의 8개 조병창 중 남만육군조병창과 더불어 일본 밖에 있는 중요 시설이었다. 태평양전쟁 개전 직전인 1941년 5월 5일 1차 완공이 이뤄져 소총ㆍ경기관총ㆍ군도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최종적으로 150만 평 규모로 확장할 예정이었다.
단지 훈련장만 있던 부평은 군사 요충지로 급격히 변모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승진훈련장과 창원을 합친 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부평역을 중심으로 하는 시가지가 완성됐고, 각종 지원 인프라도 속속 들어섰다. 비록 비포장이었으나 당시 보기 힘든 8차선 규모의 가도(현 부평대로)가 뚫렸으며, 전기ㆍ상하수도ㆍ통신ㆍ상설시장 등도 만들어졌고, 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부대가 주둔했다.
하지만 혜택은 당시 신도시로 건설된 부평 시내를 장악한 소수의 일본인이 누렸다. 오히려 조병창 건설 과정 중 대대로 살던 많은 원주민이 쫓겨났고, 일을 찾아왔거나 노역에 동원된 한국인들은 외곽에 사택이라 불린 쪽방촌에 주로 거주했다. 전쟁이 격렬해지자 많은 이들이 강제 동원돼 노역에 시달리기도 했다. 다음은 일제의 수탈이 어떠했는지 알려주는 글의 일부다.
" …(전략) 중학 3학년부터 공부하는 날보다 강제 동원되는 날이 많았다 … (중략) … 1945년 초에는 서울 연희 보성전문학교와 경기고 경복고 서울고 학생들 모두 인천 부평의 무기 공장에서 기관총을 만들었다. 나는 총신 칼 손잡이 부위에 구멍 뚫는 일을 배정받았다. 매일 800개씩 뚫어야 했는데 제대로 하지 못해 발길에 배를 차이고 뺨을 맞기도했다. (후략) … (아름다운 재단 이사장 박상증) "
1945년 해방 후에도 부평의 역할은 바뀌지 않았다. 38선 이남 군정을 실시한 미군이 ASCOM으로 명명한 보급창을 설치했고, 1949년부터는 국군 병기대대가 사용했다. 그러다가 6ㆍ25 전쟁을 거치면서 재주둔한 미군이 후방 기지로 이용하면서 군사적 가치는 오히려 더욱 커졌다. 1960년대 말 미국 본토의 포트 브래그, 포트 후드, 독일의 프리드리히펠트와 더불어 미군의 4대 군수기지 중 하나가 됐다.
1970년대 이후 점진적으로 규모가 줄어들어 마지막으로 올해 캠프 마켓 D 구역이 철수하며 조병창 터는 완전히 대한민국에 반환될 예정이다. 그러나 무려 100년 가까이 이어진 군사 도시로서의 역사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처음 언급처럼 많은 부대와 시설이 여전히 산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통일 이전까지 여러 이유로 숨은 군사 도시라는 부평의 위상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 같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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