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기의 시시각각] 체코의 선택, 윤 대통령의 자존심

김현기 2023. 11. 23.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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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1 체코 수도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은 늘 외국인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최고 핫플은 구 시청사 서쪽의 천문시계탑. 1410년 유럽에서 최고수준인 프라하대학 천문학 교수들이 공들여 만들었다. 체코 고딕 시대의 과학과 기술이 집약된 결정판이다. 매시 정각마다 장식품인 해골 인형, 기타 치는 인형, 거울 보는 인형, 지팡이 짚은 인형들이 고갯짓한다. 40초 남짓한 이 퍼포먼스를 찍으려고 관광객마다 자리다툼을 벌이고 휴대전화를 높이 쳐든다.

체코 프라하의 구 시청사 서쪽에 있는 천문시계탑 앞에서 관광객들이 휴대전화를 높이 올려 사진을 찍고 있다.

이 천문시계탑은 600년 넘게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보존돼 있다. 하지만 불과 천문시계에서 50m가량 떨어진 시청사 동쪽 편은 딴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스의 폭격을 받은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차이는 의미심장하다. 당시 체코의 동맹 영국·프랑스가 체코에 고개를 돌리고 독일과 불가침 협약을 맺으면서 체코로선 진퇴양난이었다. 그러곤 시청 동쪽 편에 폭탄이 떨어지자 체코는 이틀 만에 항복을 선언했다.

「 자존심 버리고 프라하 지킨 체코
뭐가 현명한 결정일진 결과가 증명
한동훈만으론 한계, 이준석 품어야

체코 수도 프라하의 야경을 즐기는 관광객들. 김현기 순회특파원

물론 "구질구질하게 고개 숙이지 말고 버티며 싸우자"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판세는 명약관화. 체코 대통령인 에드바르트 베네시는 승산이 없다고 보고 자존심을 버렸다. 그 덕분인지 체코는 폴란드 등 주변국과 달리 오랜 세월의 건축 유산이 거의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프라하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란 칭송을 듣는다. 인구는 1000만 명 남짓, 하지만 연간 22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외국인 관광객(한국은 올 목표 1000만 명)이 몰려들어 돈을 뿌리고 간다. 지도자, 정치인의 순간의 결단은 그래서 무겁고 중요하다. 뭐가 '현명한 결정'인지는 나중에 결과가 증명한다.


윤핵관보다 핵심은 윤석열 대통령의 자존심

#2 인요한 혁신위의 윤핵관·당 지도부에 대한 기득권 포기 요구가 진통을 겪고 있다. 장제원 의원 등 윤핵관 입장에선 복장 터질 일이다. 미국·일본에선 선거구를 옮기라고 요구하는 정당도, 타의에 의해 선거구를 험지로 바꾸는 국회의원도 보지 못했다. 승산도 거의 없다. 선거는 올림픽이 아니다. 누굴 위한 희생인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치는 후진적이고, 제도는 미흡하고, 유권자도 특이하다.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문제다. 그러니 뭐라도 해야 할 판이다. 한 명 더 당선되고 낙선하고의 싸움이 아니다. 어떻게든 총체적 바람을 일으켜 판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국면이다. "대선 승리 일등공신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나"란 자존심·분함을 내세울 때가 아니다. 다만 정말 자존심을 버려야 할 핵심은 윤핵관도 김기현도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이다. 창당 예고일(12월 27일)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는데 이준석 전 대표를 품으려는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한다. 특유의 자존심 때문일 게다.


보수를 위한, 나라를 위한 결정이란…

그러나 이 전 대표를 풀어놓고 내년 4월 총선 승리를 자신할 수 있을까. 20% 내외의 이준석 신당 지지율이 거품이 아니란 근거도 없지만, 거품이란 근거도 없다. 만약 거품이 아니면 국민의힘은 필패다. 이준석의 2030 남성표는 검증된 표다. 중년·여성 표가 중심인 한동훈 신드롬으로 막기 버겁다. 그럼 할 일은 뻔하다. ▶홍범도 흉상 이전 철회 ▶박정훈 해병대 대령 억울함 해소 ▶이태원 유족 면담의 세 가지가 이 전 대표의 신당 철회 조건이라는데, 그 정도면 윤 대통령이 못 들어줄 이유도 없다. 용산이나 한남동 관저로 불러 배포 있게 응해주고 포옹 한번 하면 오히려 "대통령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는 이준석에게 한 방 먹이는 결과가 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입당 전인 2021년 7월 25일 당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서울 광진구 한 치킨집에서 회동을 하며 건배하고 있다. 뉴시스


승산 없는 자존심을 버렸던 체코의 베네시 대통령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본다. 전쟁 직후 온전히 살아남은 프라하 시내를 내려다보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하, 너무나 아름답지 않소? 이게 다 냉정히 판단한 내 덕분이요."
윤핵관도, 대통령도 자존심을 내려놓는다면 총선 후 그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kim.hyun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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