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줄 퇴사, 빚은 눈덩이... 환경부 결정이 불러온 후폭풍
[노광준 기자]
▲ 21일 광화문에서 열린 1회용품 규제철회 규탄 시민사회 기자회견 (사진제공 : 소비자기후행동) |
ⓒ 소비자기후행동 |
"저희 신랑이 재활용 관련 신소재를 다루는 회사에서 근무 중인데 요즘 많이 힘들어해요."
<기후만민공동회 오늘의 기후>(OBS 라디오) 생방송 중 온 청취자의 문자 내용이다. 지난 7일 정부가 일회용컵과 플라스틱 빨대 등 일회용품에 대한 규제를 사실상 철회한 직후 정부 약속을 믿고 대안 용품을 준비해 온 업체들은 어떤 상황일까?
종이빨대의 눈물
저는 종이빨대입니다.
그래요,
조금 비싸죠.
쓰다 보면 흐물거리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분해됩니다.
최소한 바다거북의 코를 뚫고 나가지는 않습니다.
기다렸습니다.
정부가 약속했던 시간을.
그날이 오면 전국 모든 매장의 빨대가 종이로 바뀌고,
수요가 늘고 공급이 늘면 자연스럽게 저의 단가도 낮아지며
상인들의 부담도 줄어들 그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저렴한 플라스틱 빨대가 차지했던 그 넓은 공간을
저같이 새로운, 다른 무언가 친환경 소재들이 하나하나 점유해 갈 기회를.
그러나 약속은 깨지고 저는 땅바닥에 흩뿌려졌습니다.
사장님은 부도를 막을 수 없다며 절규하고 있고
직원들은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며 탄식합니다.
곳곳에서 저를 반품 처리하는 매장이 늘고 있고,
결국 저는 세종청사 앞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흩뿌려졌습니다.
그날 버려진 건 저 종이빨대뿐이 아닙니다.
신뢰입니다.
정부 약속을 믿고 친환경을 실천해 온 사람들의 마음도 바닥에 뿌려졌습니다.
저는 버려지고 싶지 않은 종이빨대입니다.
환경부 앞에 쏟아진 종이빨대들
▲ 21일 세종시 환경부 청사 앞에서 열린 '1회용품 규제철회' 규탄 시민사회 기자회견 (사진제공 : 소비자기후행동) |
ⓒ 소비자기후행동 |
지난 13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환경부 앞에 수천 개의 종이빨대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종이 빨대 제조업체 대표들로 구성된 종이빨대생존대책협의회가 정부의 플라스틱 빨대 규제 계도 기간 무기한 연장에 항의하며 종이 빨대들을 바닥에 쏟은 것이다.
'부산의 한 종이 빨대 생산업체 대표 A씨는 이달 현재까지 18억 원이 넘는 빚을 졌다. A씨는 "종이 빨대 기계 대금 등을 위해 대출을 받은 게 14억~16억 원"이라며 "직원 서너 명이 회사 운영을 위해 자발적으로 2억 원 넘게 대출을 받았다"며 눈물을 쏟았다. 그는 "계약업체들로부터 계속 반품 요청이 들어오고 있어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고 했다.' (한국일보, 2023년 11월18일)
종이빨대생존대책협의회에 따르면 10여 개 회원사들의 재고량만 약 1억4000만 개이며 회원사 이외 업체 재고량을 더하면 약 2억 개의 종이빨대 재고량이 쌓여있다며 공장마다 생산이 멈춰 거대한 종이 쓰레기 보관소가 됐다고 토로했다. <한국일보>는 한 종이빨대 업체의 경우 규제를 유예한다는 정부 발표와 동시에 직원 11명 전원이 퇴사했다고 전했다.
'이날 소상공인들은 "환경부의 이번 발표로 국내 종이 빨대 시장은 붕괴돼 현재는 영업 활동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이들은 "환경부의 일회용품 규제가 일정대로 진행됐다면, 우리 직원들은 지금쯤 열심히 제품을 생산하고 포장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을 것"이라며 "그러나 그들은 지금 휴직하거나 퇴사한 상태"라고 호소했다.' (한국아이닷컴, 2023년 11월20일)
한화진 환경부장관은 21일 기자간담회에서 관련 사안에 대해 "일회용품 감축이란 환경부의 원칙은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다만 어떻게 감축할 것인지에 대한 방식의 문제로 "강력한 규제가 아닌 '넛지형' 방식으로 현장에서 (제도가) 정착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자율 규제를 뜻하는 넛지형 방식의 구체적인 계획이나 실제 효과에 대해서는 현재 통계를 모으는 중으로 내년 상반기부터 본격적으로 검증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 21일 제주도의회에서 열린 '1회용품 규제철회' 규탄 제주시민사회연대회의 기자회견 (사진제공 : 소비자기후행동) |
ⓒ 소비자기후행동 |
21일 오전 11시 경기도와 서울, 세종, 제주 등 전국 18개 지역에서는 321개 시민환경단체가 동시 기자회견을 열고 환경부의 일회용품 사용규제를 원안대로 시행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소상공인 부담경감을 앞세운 이번 조치가 오히려 친환경을 준비해온 소상공인을 혼란에 빠지게 했다고 비판했다.
'환경부는 이번 결정을 내리면서 소상공인의 부담 경감만을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번 발표로 인해 정부 정책과 규제 시행에 발맞춰 준비해 온 소상공인은 외려 혼란에 빠지게 됐습니다.
플라스틱 빨대 규제만을 기다려온 종이 빨대 제조업체들은 정부를 믿었다가 도산 위기에 내몰렸다며 생존권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제주에서는 1회용컵 보증금제 동참 업체들이 무더기 이탈하는 결과로 이어지면서 제도 안착이 요원해졌습니다.
시민과 소비자, 소상공인 모두가 정부의 정책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습니다. 1년간의 계도기간을 거쳤지만 아쉽게도 충분한 준비에 이르지 못했다는 환경부의 발표는 준비할 의지가 없었다는 무책임한 선언과 같습니다. 또한 1회용품 감축을 규제 대신 권고와 국민의 자발적 참여에 기반한 지원으로 실현하겠다는 계획은 결국 국민에게 1회용품 사용의 책임을 전가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명백히 담당 부처의 의무와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1회용품 사용 규제 철회 규탄 경기공동행동 기자회견문, 2023년 11월21일)
시민단체들은 오는 11월 24일부터 시행하기로 했던 1회용품 사용 규제를 원안대로 시행하고, 원래는 올해부터 전국 시행하기로 했던 '1회용컵 보증금제' 역시 원안대로 전국 시행할 것을 촉구했다.
경기도 "도청에 반입되는 배달음식 다회용기 추진"
경기도는 13일부터 수원 광교 경기도청사에 반입되는 배달음식에 대해 다회용기 사용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도청사 근무 직원이 배달음식을 주문할 경우 다회용기 포장을 요청해야 하고, 다회용기는 식사 후 청사 내 설치된 수거함에 반납하고 앱을 통해 수거 요청하면 된다.
이번 사업은 지난 9월부터 수원 광교 도청사 주변 음식점을 대상으로 다회용기 사용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는 수원시와 협업해 진행되고 있는데, 경기도는 연말까지 시범사업을 실시하며 현장 소상공인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한 뒤 내년 1월부터 전면실시할 계획이다.
이 내용을 보도한 <뉴스펭귄>은 이런 기사제목을 붙였다. "정부는 안 해도 경기도는 합니다" 일회용품 줄이기. 전 세계적으로 일회용품과 플라스틱 규제가 강화되고 있는 2023년 11월의 대한민국 풍경이다.
[참고자료]
- 최은서, ["정부 믿은 게 죄"...빚과 재고 떠안은 종이 빨대 업체의 울분], (한국일보, 2023년 11월18일)
- 최나영, ["정부정책 믿었을 뿐인데…" 종이빨대업체 호소에 환경부 "조만간 계도기간 다시 발표"], (한국아이닷컴, 2023년 11월20일)
- [환경부는 1회용품 사용 규제를 원안대로 시행하라.], (1회용품 사용 규제 철회 규탄 경기공동행동 기자회견문, 2023년 11월21일)
- 박연정, ["정부는 안 해도 경기도는 합니다" 일회용품 줄이기], (뉴스펭귄, 2023년 11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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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이 내용은 지난 2023년 11월22일 OBS 라디오 '기후만민공동회 오늘의 기후' 방송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오늘의 기후'는 지상파 라디오 최초로 기후위기 대응 내용으로만 매일 2시간 편성제작되고 있으며 FM 99.9 MHz OBS 라디오를 통해 경기, 인천 전역에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방송되고 있습니다. 유튜브 라이브(OBS 라디오 채널)와 팟캐스트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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