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만원 받자" 4시간 줄 섰다…'포항 지진소송' 복사집도 호황 [르포]
22일 오후 경북 포항시 북구 포항지진범시민대책본부 사무실 앞. 시민 등 200여 명이 건물 앞에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이들은 한 손에 서류 뭉치를 들고 차례가 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소송하면 300만원” 소식에 몰려든 시민
이들은 2017년과 2018년 두 차례 지진으로 정신적 피해를 본 포항 시민들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 이후 추가로 소송에 참여하기 위해 모였다. 지진 당시 포항에 살고 있었다면 누구나 배상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포항 시민 대다수가 소송에 뛰어드는 분위기다.
줄을 서 있던 주민 김영호(64)씨는 “맨 뒤에서 사무실 앞까지 오는 데 4시간 걸렸다”며 “내년 3월까지만 접수를 하면 된다곤 하지만 벌써 사람이 몰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혹시 배상금을 받지 못할까봐 불안해 서류를 챙겨 나왔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50여m 떨어진 복사 가게도 때아닌 호황을 맞았다. 피해 소송 구비 서류에 주민등록증 앞뒤 복사본과 통장 복사본 등이 필요해서다. 복사 가게에도 바깥까지 대기열이 만들어졌다.
소송을 이끈 포항지진범시민대책본부(이하 범대본) 모성은 공동대표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판결이 나온 지 엿새가 지난 현재 추가로 소송인단에 참여하겠다는 시민이 줄을 이었다"라며 "하루 평균 3000~4000명이 접수해 22일까지 최소 2만 명이 넘었다”고 설명했다.
초본 발급건수 600건→1만2000건 급증
포항시에도 관련 문의와 민원이 빗발치고 있다. 포항시에 따르면 판결 전인 지난 13일과 14일 포항시에서 발급된 주민등록초본 발급 건수는 각각 662건, 622건에 그쳤다. 하지만 판결 이후인 20일과 21일에는 각각 1만2197건, 1만2042건으로 20배 가까이 급등했다.
소송 규모가 거대할 것으로 예상되다 보니 수임을 기대하는 지역 변호사업계도 들썩이고 있다. 5년 전 소송을 시작해 승소를 이끌어낸 범대본과 포항지역 변호사들로 구성된 포항지진 공동소송단뿐 아니라 다른 변호사 사무실들도 안내문을 배포하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역 정치권 “‘일괄배상’ 특단 조치 필요”
혼란한 분위기가 조성될 조짐을 보이자 정치권 등에선 소송으로 인해 야기되는 각종 문제를 줄이기 위해 정부가 일괄 배상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강덕 포항시장은 지난 17일 백인규 포항시의회 의장과 함께 시청 브리핑룸을 찾아 “이번 판결에 따라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 대란과 소모적인 법정 공방이 지속될 우려가 있는 만큼 정신적 피해에 대한 일괄 배상을 위해 정부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범대본은 앞으로 정부가 제기하게 될 항소에도 적극 대응하겠다고 했다. 범대본 측은 지난 20일 “피고 대한민국은 14일 내에 항소를 할 것”이라며 “1심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패소했기 때문에, 항소심에서는 엄청난 투자와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패소하지 않고 위자료가 줄어들지 않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원, 지난 16일 배상 판결
앞서 대구지법 포항지원 민사1부는 지난 16일 지진 피해를 본 포항시민 5만여 명이 국가와 포스코·넥스지오 등 업체 5곳을 상대로 낸 지진 관련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는 원고에게 위자료를 1인당 200만∼300만원씩 줘야 한다”고 선고했다. 지진이 발생한 지 5년 1개월 만에 나온 결과다.
재판부는 2017년 11월 15일 규모 5.4 포항지진과 2018년 2월 11일 규모 4.6 여진을 모두 겪은 시민에게는 300만원, 두 지진 중 한 번만 겪은 시민에게는 2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정부 등이 소송에 참여한 포항 시민에게 지급해야 할 위자료는 약 1500억원에 이른다.
재판부는 “포항 북구 흥해읍에 추진한 지열발전사업으로 인해 지진이 발생한 것으로 판단해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한다”며 “다만 국가가 피해 복구를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50만 명에 이르는 전체 포항 시민이 소송에 참여하면 위자료는 1조5000억원 규모로 늘어난다. 다만 ‘포항지진 진상조사및 피해구제 등을 위한 특별법’에 따르면 소송 시효가 5년으로 제한됐다. 이에 따라 내년 3월 20일까지 소송을 제기하지 않으면 배상을 받을 수 없다.
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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