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가해자 편일 때... 피해자에겐 '산소호흡기'같던 곳"

부산여성회 이정화 2023. 11. 2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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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간 운영된 민간 고용평등상담실 폐지하겠단 정부... 여성노동자들 마지막 보루, 존치하라

본 연재는 전국 고용평등상담실 네트워크가 공동 기획, 집필합니다. <기자말>

[부산여성회 이정화]

"한쪽이 대단한 권력을 쥐고 있는 위압적인 현실 속에 선생님은 유일한 지지대였습니다. 세상 전체가 가해자의 편에 서서 제 목을 조이고 짓누른다 느껴질 때 제게 달린 산소 호흡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수습 기간 중 사업주로부터 직장 내 성희롱 피해를 당했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를 벗어나기 위해 사업장을 나온 것에 대해 사업주는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며 손해배상을 묻겠다고 했다. 그녀는 직장 내 성희롱 피해도 억울한데, 손해배상을 묻겠다고 하는 가해자의 협박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도움을 구하기 위해 부산여성회 고용평등상담실을 찾았다.

그녀의 직장은 △△도, 거주지는 OO도, 상담실은 부산이라는 물리적인 거리의 한계가 있었지만 어떻게든 상담실을 찾아온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입사 한 달, 수습 기간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경험한 그녀.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로부터 시작되어 때로는 눈물로 울분에 찬 목소리로 가득 찼던 그 날 그 시간 상담실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수많은 전화와 문자, 메일을 주고받으며 그녀와 소통했다. 날짜별로 상세히 기록을 했고, 가해자와의 메신저 대화내용, 통화내용, 주변인들과의 대화 내용. 동료직원들의 진술서 등 조금이라도 입증자료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정리했다.

가해자의 2차 가해는 계속되었다. 그녀의 불안 또한 점점 커졌다. 권리구제도 중요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 또한 중요했다. 그녀의 거주지 인근의 고용평등상담실과 연계해 무료심리 상담을 진행해 그녀가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왔다. 가해자가 보낸 내용증명에 대해 법률전문가의 무료법률자문을 통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검토했다. 상담실의 의견서를 작성해 노동청에 보내기도 했다.

노동청 진정 이후 조사과정에서 근로감독관에 의한 2차 가해가 있었지만, 자신의 사건 결과에 불이익한 결과로 돌아올까 걱정되어 소리 낼 수 없었던 그녀의 마음에 공감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것 또한 상담실 뿐이었다.

2022년 노동청 진정 결과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정되었다. 형사고소 건은 3년이 지난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정부가 24년간 운영해 온 민간 고용평등상담실을 폐지하고 8개 지청에서 상담실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그녀에게 전하며 그녀에게 고용평등상담실은 어떤 의미였는지를 들려 달라 청했다. 그녀는 '당연히 제가 도와야죠'라며 흔쾌히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다. 다음은 그녀가 보내온 편지 내용이다.
 
OOO선생님께.
글을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를 썼습니다.
제 글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찬 기운에 몸을 떨게 되는 요즈음입니다. 독한 감기가 유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안부를 묻고 평안을 빌고 싶은데, 그런 인사가 어울리지 못하게 된 듯해 슬프네요. 떠밀리듯 바쁘게 흘러가는 생활 속에 시간이 속절없이 지났습니다. 따뜻한 차 한잔을 앞에 두고 함께 해 주신 고마운 지난 고생을 같이 이야기하고 싶다는 마음만 섬처럼 오롯했습니다. 이제라도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몇 자 적어보려 합니다. 누군가 선생님의 귀함을 폄훼하고 누군가 우리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이 고마움과 애틋함은 선생님께 닿았으면, 그래서 작은 위로라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항의하고 맞서려던 사람은 그 지역의 유지였습니다. 언제나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과시하고 법도 우습다는 듯 말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 없다는 것을 직원들에게 주입했습니다. 저는 스스로 인식도 못 한 채 그런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부당함에 맞서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거대하고 징그러운 '용'처럼 느껴지는 그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왜 잘못한 사람은 당당하고 떳떳하게 큰소리치는 데 피해당한 사람이 마음 졸이며 눈치를 봐야 하는지 답답했습니다.
 
그 억울해 말문이 막히는 심정을 누가 알아줄까요. 고용노동부의 조사관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객관적이어야 할 자신의 직무 때문인지 억울한 마음을 알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왜 더 용감하지 못했는지. 왜 더 현명하지 못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런 질문이 업무에 필요한 것이겠지요. 사적인 감정이 없다고 해도 그런 질문이 저에게는 스스로를 책망하는 말로 메아리칩니다.
 
그때 그랬어야 했는데,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아야 했는데, 하는 말을 저도 모르게 하다 보면 당한 사람 스스로가 문제인 듯 느껴지게 합니다. 자신을 상처 냅니다. 그게 피해자들이 망가지는 이유입니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시간이 지나가기만 바라는 사람들이 눈물만 흘리는 이유입니다.
 
만약,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 억울함 속에 제가 버틸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 처지를 이해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말하는 조사관과 다르게 선생님은 저의 처지를 이해해 주셨지요. 같이 고민해 주셨습니다. 완벽한 지침이나 대응법이 있을 수도 없겠지만,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같이 고민해 주신다는 것. 그것이 저에게 가장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구나. 나의 말을 들어주고 같은 자리에 서주고 같이 고민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제 숨통을 열어줍니다.
 
조사관과의 조사인지 심문인지 모를 시간을 치르고 나와 선생님께 연락드렸습니다. 그 질문들이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이해해 주시는 분은 선생님뿐이었습니다. 어쩌면 조사관은 조사관의 일이 선생님은 선생님의 일이 다르게 주어진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두 분 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일을 할 뿐이고 그러기 위해 서로가 필요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쪽이 대단한 권력을 쥐고 있는 위압적인 현실 속에 선생님은 유일한 지지대였습니다. 세상 전체가 가해자의 편에 서서 제 목을 조이고 짓누른다 느껴질 때 제게 달린 산소 호흡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사건은 OO도에서 발생했습니다. 선생님을 뵙기 위해선 부산까지 가야 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근처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상담센터가 부산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얼마나 넓은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할지 짐작이 갑니다. 먼 길을 달려가서야 겨우 제 말을 들어주는 선생님을 만났으니 저는 당시 얼마나 많은 말을 하려고, 하고 싶어서 앉아 있었을까요. 선생님 앞에서 어느 만큼의 시간을 보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은 제 말을 재촉하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충분히 말하게 하시고 모자람이 없는지 살폈습니다. 덕분에 저는 노동청에 어떻게 하소연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사건을 진행함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이 마음을 다해주신 시간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어 사람들에게 얼마나 선생님이 필요한지 모르는 걸까요? 선생님이 곁에서 제 이야기를 듣고 같이 고민해 주셔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이 말은 숫자로 표현하기 어려워 세상은 선생님이 계셔야 함을 알지 못하는 걸까요? 저는 선생님이 해 주신 역할을 더 많은 분이 해 주시길 바랍니다. OO도에서 부산까지 갈 필요 없이 옆에서 이야기 나눌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저처럼 달려가지 못해 눈물을 삼킨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 봅니다.
 
나날이 추워지는 세상에 선생님의 평안을 빕니다. 제가 선생님께 가지는 고마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만은 선생님께 닿기를 바랍니다. 저와 같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생님이 꼭 곁에 있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 시련의 시간도 언제가 차 한잔의 담소가 될 수 있기를 빌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힘내시고 건강 잘 챙기세요. 멀리서 사랑과 응원의 마음을 보냅니다.
 

그녀의 따스한 마음이 오롯이 느껴지는 편지는 저뿐만 아니라 많은 동료 상담원들에게 울림이 되었으며, 용기가 되었다. 24년간 민간에서 고용평등상담실을 운영해오며 우리가 내담자들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오고 있었는지, 우리가 그녀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의 이야기처럼 조사과정에서 성인지적 관점이 없는 근로감독관의 말과 태도가 2차피해로 이어진 경우가 상당수이다. 직장 내 성희롱 상담은 획일화된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시간을 들여 내담자의 이야기를 듣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담자 한명 한명 밀착 상담을 지원해야 하는데 과연 전국 8개 지청에서 가능할지?

노동부에서는 상담 대표전화 및 온라인 상담창구 마련으로 민원인들의 접근성을 높이고, 지리적 여건 등을 감안, 필요 시 출장을 통해 상담 지원하는 등 상담방식을 유형에 맞게 다양화하여 지원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야간, 주말에만 상담이 가능한 내담자들까지 계획에 들어가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피해 입은 노동자들이 마음 편히 상담실을 찾기 위해서는 물리적 거리만큼 심리적 거리도 중요하다. 정부는 여성노동자들의 마지막 보루, 민간고용평등상담실 존치하라!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정화 활동가는 부산여성회 소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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