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 획득 과정 보며 한희철과 대안 모색"

김성수 2023. 11. 22.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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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희철 40주기 추모식 준비하는 '친구' 이은희 박사①

[김성수 기자]

 앞줄 우측 한희철, 뒷줄 가운에 이은희(철도고 시절)
ⓒ 이은희
 
전두환 정권기인 지난 1983년 12월 11일, 그날은 나와 철도학교 동문인 한희철(1961.2.11.)이 군대에서 의문사한 날이다. 한희철은 1978년 12월 국립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철도청에 근무하다 1979년 3월 철도장학생으로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다. 당시 철도고는 학비가 무료였고 졸업 후 철도공무원으로 취직이 100% 보장되던 터라 특히 지역의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관련기사 : 전두환 때문에 목숨 끊은 대학생 한희철을 생각한다).

오는 12월 11일이면 한희철 이 땅을 떠난 지 어느덧 40년이 된다. 그가 죽은 날 나도 군복무 중이었다. 진실이 은폐되고, 사실이 감추어진 엄혹한 시절, 그래서 나도 당시 군대에서 그의 억울한 죽음을, 죽음의 원인을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은 거의 상투어가 되다시피 한 '자유', '민주주의', '사회정의'의 가치를 추구하다가 그는 23살의 꽃다운 나이에 망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그 희생덕분에 나는 40년이 흐른 지금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역사는 흐르고 사람은 가도 정신만은 남는다. 산자가 망자에 대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는 그가 남긴 정신과 열망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그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한희철이 온갖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지켜온 가치를 손상과 상실의 위험에서 지켜내기 위해서다. 그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돌아보는 일도 그의 삶을 영광으로 채색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 우리가 근거하고 지향해야 할 바를 그가 남긴 삶의 흔적을 통해 감별해 내기 위해서다.

이은희 박사는 한희철의 철도고 동기이자 지난 70~80년대 한희철과 함께 우리사회의 민주화를 꿈꾸었던 '절친'으로서 지금 한희철 40주기 추도식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은 지난 10일부터 21일까지 이 박사와 이메일과 페북 메신저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인터뷰 중인 이은희 박사
ⓒ 이은희
- 먼저 자기소개와 더불어 한희철과는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나는 1970년대 한희철과 함께 경기도 성남시에 거주하며 1976년 국립 철도고 업무과에 입학했다. 1979년 한희철이 서울공대에 입학했을 때 나는 성균관대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박정희의 오른팔이었던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10.26 사건 이전 나는 한희철과 마찬가지로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는 정치적으로 순진무구한 대학생이었다. 그러나 10.26 이후 한희철이 참여했던 가톨릭교회 주도의 김재규 구명운동을 접하면서 '김재규는 반역자라기보다는 박정희의 장기독재를 끝낸 의인'으로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대한민국 정치의 민주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후 1980년 봄 '민주정부 수립'을 열망하는 대학가에서의 대규모 시위, 5.18 대학생 시위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전두환 신군부정권이 수립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한희철과 함께 군부독재, 경제적 빈곤, 민족분단과 같은 우리사회 근본문제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데 공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남지역 출신의 몇몇 대학 동문들과 사회과학 연구모임을 만들었고, 내가 다니는 성균관대에서는 대학동문들과 함께 이른바 이념서클(동아리)인 '고전연구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1982년 5월 군에 입대할 때까지 대한민국의 역사, 사회경제, 정치, 민족분단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연구학습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84년 7월 군 제대 후에는 한희철이 군입대하기 전 주로 활동했던 성남 YMCA에서 지역문제와 사회과학 연구모임인 '대학 Y'를 구성해 활동했다. 대학 졸업 이후에는 성남지역의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1990년대 들어서며 노동운동 일선에서 물러나 학원강사 등 생업을 하며 한희철의 어머님과 함께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이 주도하던 의문사 진상규명투쟁에 동참했다. 1984년도 한희철 1주기 추도식부터 이어지는 성남지역과 서울대 등의 한희철 추모 모임이나 행사에 꾸준히 참여했다.

2002년부터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에서 언어학 석박사를 마치고 지난 2012년 귀국했다. 지금은 단국대에서 초빙교수로 일하면서, 아직도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한희철의 죽음에 관한 의문을 풀기 위해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추모연대)의 '군의문사대책위'에 참여하며 한희철 의문사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한희철과 철도고 동기동창인데 고교시절 한희철은 어떤 학생이었나?
"1976년에 철도고 업무과에 입학한 한희철은 무엇보다 동료학생, 학교선배들에게 웃음 많고 유머도 있으며, 붙임성과 친화력이 뛰어난 예의바른 학생이었다. 또한 돈독한 가톨릭 신앙인이며, 철저하고 꼼꼼한 완벽주의자로서 적극적이며 과제수행 능력이 매우 탁월했던 친구였다. 철도고 1학년 때에는 친구들과 철도를 이용해 부산, 경주, 충주, 수원 등 전국을 함께 유람하며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다. 학교 방과 후에는 동료학생들과 탁구나 축구 등 체력단련을 위한 스포츠 활동을 즐기곤 했다. 성남시에 거주하는 철도고 동문들과의 교류에도 적극 참여해, 철도고와 서울공고 성남시 학생모임간의 축구 대항전 등에도 나와 함께 참여했었다.

한희철은 철도고 가톨릭 학생회에 참여해 동문들과 신앙생활을 함께 하면서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는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당시 불교반이었던 나와 1년여 기간 가톨릭신앙을 소개하는 논쟁과 토론으로 나를 이끌었고, 빈번한 그의 재촉에 못 이겨 두어 번 정도 '가톨릭 학생회'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다. 고3 학력고사 이후 각 대학별 본고사를 앞둔 두어 달 동안 나와 같이 성남에 있는 한 독서실에서 본고사 준비를 할 때는 하루 서너 시간만 잠을 자면서도 새벽이 되면 성당에 나가 새벽기도를 올리곤 했다. 그의 철저하고 꼼꼼한 면모가 그의 독실한 가톨릭 신앙에서 비롯되는 것 같았다.

한희철의 탁월한 과제 수행능력은 대학입시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고교 2학년 때부터 대학입시에 뜻을 품은 그는 종로 2가 학원가에서 특수목적고인 철도고의 교과과정에서 취약했던 인문계 과목의 수업을 듣고 독서실에서 복습하며 거의 독학으로 입시 준비에 매진했다. 1979년졸업과 동시에 서울공대에 입학했다. 그의 서울공대 입학은 대학의 공대 진학에서 '동일계'의 혜택이 주어지지 않는 철도고 업무과 출신으로서 고교졸업과 동시에 서울공대에 입학하게 된 철도고 역사상 최초의 '전설적인' 성과였다(당시 일부 신문에서 "철도고에서 1, 2등을 했다" "서울공대에 동일계로 진학했다"고 보도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기자 말).
 
 왼쪽이 한희철 가운데가 이은희(철도고 시절)
ⓒ 이은희
 
- 철도고 졸업 후 대학시절에는 한희철과 주로 어떤 활동을 함께 한 것인지?
"1979년 10월 26일 이후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김재규 구명운동을 계기로 한희철과 나는 박정희 유신독재의 어두운 그늘을 깨닫게 되고, 사회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키우며 점차로 공동의 실천적 접점들을 만들어 나갔다.

1980년 5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위시로 한 신군부세력의 재집권 기도에 반대해 '민주화 일정 제시'를 요구하는 대규모 대학연합 가두시위가 서울시내 곳곳에서 벌어질 때, 한희철과 나는 여러 번 시위현장에 함께 참여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있었던 마지막 시위에서는 시위진압 경찰의 폭력적 강경진압과 검거를 피해 함께 서울역 역무원 사무실로 피신하기도 했다.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와 대학캠퍼스 봉쇄조치가 발령된 5월 17일 오전 한희철과 나는 서울대 관악캠퍼스에 가면 '학생시위에 참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서울대 입구에서 만났다. 캠퍼스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돌연 정문을 통제하던 계엄군이 '캠퍼스로 손님을 모시러 가야한다'고 항의하며 들어가게 해 달라는 택시운전수의 얼굴을 M16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무자비하게 가격해 얼굴에 선혈이 낭자하게 만드는 참상을 목격하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후 언론보도가 철저히 군부에 의해 통제된 계엄 상황에서도 광주에서 대규모시위가 일어나 군대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외신을 접하며 '광주에 직접 가보는 게 어떠냐'는 논의를 했으나 실행은 하지 못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야 나는 당시 5월 26일쯤, 한희철이 홀로 열차를 이용해 광주 부근까지 가서 광주에서 대학살이 있었다는 생생한 증언들을 듣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군부가 광주시위대를 무자비한 폭력과 학살을 통해 진압하고 1980년 5월 27일 국보위를 조직해 그 상임위원장을 맡은 전두환이 결국 정권을 획득해 나가는 과정을 언론을 통해 지켜보면서 한희철과 나는 장기적인 대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당시 천호동에 살았던 나는 한희철을 통해 그의 여러 친구들과 빈번히 교류했다.

겨울방학쯤에 한희철과 나는 성남YMCA 결성에 참여했던 그의 서울대 동문 고 이양병, 고 이수열과 함께 우리사회의 역사와 구조문제, 그 해결방안 등을 연구하기 위한 사회과학 학습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다. 안타깝게도 그 당시의 모임의 구성원 중 현재 나만 생존해 있다. 비슷한 시기에 한희철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성남시 대학생 연합회의 창립대회에도 함께 참여했다. 1982년 4월 19일에는 한희철과 수유동의 4.19 묘지를 참배했고, 그와 뜻을 같이하는 타학교의 학생들과 소개하는 자리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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