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강조의 쿠데타, 드라마가 놓친 숨은 의미
[김종성 기자]
▲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 KBS |
쿠데타는 패가망신을 초래할 수 있는 일이므로 이런 일을 계획하는 사람은 오랫동안 고민을 하거나 준비를 하기 마련이다. 1994년에 쓴 회고록 <세기의 격랑>에서 친일군인 이한림은 친구인 박정희가 5.16정변 15년 전인 1946년부터 자신에게 은근히 쿠데타를 제의한 사실을 소개했다. 이런 박정희와 달리, 결정적 순간에 다분히 얼떨결에 쿠데타를 하게 된 인물이 있다. KBS <고려거란전쟁>에 나오는 강조가 그 주인공이다.
목종(재위 997~1009)은 허수아비 임금으로 살고, 어머니 천추태후가 애인 김치양과 함께 실권을 행사하면서 둘 사이의 아들을 차기 주상으로 밀었다. 미래의 임금인 현종은 목종으로부터는 보호를 받고 천추태후·김치양으로부터는 살해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009년에 평양도순검사 강조가 쿠데타를 일으켜 목종을 몰아내고 현종을 즉위시켰다. 강조는 자신을 호위해달라는 목종의 왕명에 따라 군대를 움직였다가 목종이 죽었다는 사실을 접했다. 그랬다가 목종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도 왕명과 무관하게 군대를 움직여 천추태후와 목종을 폐하고 김치양 부자를 처형했다.
임금의 뜻을 무시하고 정변을 일으킨 일로 인해 강조는 <고려사> 반역열전에 올랐다. <고려사> 반역열전 내에서 강조열전은 김치양열전 바로 다음이다. 자신이 죽인 김치양과 결국에는 같은 부류로 취급됐던 것이다.
▲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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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강조가 쿠데타를 결행하는 과정에 관한 <고려거란전쟁>의 스토리는 <고려사> 강조열전과 다소 다르다. 지난 18일 방송된 제3회 24분경에 강조(이원종 분)의 부관인 이현운(김재민 분)이 "간밤에는 궁궐에 큰불이 나더니 지금은 김치양의 군사들이 궁궐을 포위하고 있답니다"라며 "개경 곳곳에 황제께서 승하하셨다는 글귀가 나붙었다 하옵니다"라고 보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 뒤, 김치양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던 강조가 "성상 폐하께서 아직 살아계시옵니다"라는 뜻밖의 보고를 받는 장면이 38분경에 나온다. 뒤이어, 강조가 한밤중에 군영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민하고, 이현운이 다가가 "뭘 그렇게 고민하십니까?"라며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라는 말로 쿠데타를 부추기는 장면이 나온다.
<고려사> 강조열전이 말하는 실제 상황은 드라마 장면과 다르다. 이에 따르면, 강조가 목종이 죽었다고 믿게 된 데는 두 개의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는, 왕명을 받고 출동한 강조에게 접근한 위종정과 최창의 허위 제보다. 조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두 관원은 '왕명을 보낸 사람은 주상이 아니라 태후와 김치양이며, 두 사람은 당신이 자기들을 따르지 않을까봐 왕명을 사칭해 당신을 불러들였으니 그들에게 속지 말고 신속히 원대 복귀하라'는 취지로 귀띔했다.
다만 두 관원은 목종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주상의 병이 위독하고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이 말을 들은 강조의 머릿속에서 자체적으로 나온 결론이 '임금이 죽었구나'였다. 강조(康兆)열전은 "조(兆)는 돌연히 왕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조정이 이미 치양에 의해 잘못되었으리라고 생각했다"라고 서술한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 강조의 속마음까지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 뒤 강조는 거란족 요나라에 끌려가 강도 높은 수사를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쿠데타 당시에 그가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를 당시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위종정과 최창의 허위 제보로 인한 강조의 '셀프 착각'은 그가 군대를 되돌리게 만들었다. 위에 언급된 두 요인 중 첫째는 그런 결과로 이어졌다. 이에 반해, 둘째 요인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강조가 본영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걱정했다. 아버지는 노비의 머리카락을 깎고 묘향산 승려로 위장시킨 뒤 쪽지가 담긴 대나무 지팡이를 건넸다. 쪽지에는 '왕이 이미 죽었으니 군대를 동원해 상황을 수습하라'는 취지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승려로 가장한 노비는 강조의 본영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고, 강조를 보자마자 목숨이 다해 쓰러졌다. 그의 지팡이에서 쪽지를 발견한 강조는 부관인 이현운 등을 움직여 5천 군대를 동원했다.
그는 그렇게 진격하던 중에 왕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로 인해 한참 동안 풀이 죽어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는 부하들의 강권을 받고 쿠데타를 결행했다. 목종을 폐위시키겠다는 결의가 이 시점에 생겨났다고 강조열전은 말한다. 드라마가 실제보다 극적이라고 하지만, 강조가 쿠데타를 결심하는 과정은 실제가 드라마보다 훨씬 극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처음에는 왕명을 받고 출동했지만 나중에는 쿠데타를 결의한 일로 인해 강조가 심적 압박을 느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이듬해에 요나라 성종이 강조의 임금 시해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며 군대를 동원했을 때였다. 강조열전은 거란군에 체포되기 직전에 강조가 마치 목종의 환영을 본 듯이 투구를 벗고 엎드려 꿇은 뒤 죽을 죄를 졌노라며 머리를 조아렸다고 말한다.
▲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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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은 강조의 착각와 과욕이 작용하기는 했지만 그의 쿠데타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등장인물들은 강조의 과한 행동을 비판하면서도 천추태후와 김치양뿐 아니라 목종의 최측근 유행간마저 월권을 일삼던 상황에서 강조가 혼탁한 조정을 바로잡는 데 기여했다는 점만큼은 부인하지 않았다.
강조도 잘한 게 없지만 천추태후 역시 잘한 게 없다는 관점은 지극히 '전통적'인 것이다. 하지만 목종을 억압한 천추태후가 어떤 정치를 했는가를 감안하면, 강조의 쿠데타로 천추태후가 실각한 것이 역사를 퇴행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알 수 있다.
천추태후의 집정으로 인해 목종의 왕권이 제약된 것은 어디까지나 고려왕조의 사정이다. 당시 민중의 시각에서 보면 천추태후의 정치는 역사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귀족을 견제하고 신진세력을 많이 등용했다. 귀족들은 노비와 토지를 대거 보유하고 왕실과 일반 백성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천추태후는 지금의 재벌에 상응하는 그들을 견제했다. 이는 그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기여하는 동시에 평민과 귀족 사이의 격차를 어느 정도나마 줄이는 데 기여했다.
비슷한 취지에서 그는 과거 급제자도 증가시켰다. 실력 위주의 인사정책을 통해 귀족들의 조정 진입을 견제했다. 또 북중국의 요나라와 남중국의 송나라 사이에서 적절히 중립을 유지함으로써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강조의 쿠데타는 그런 천추태후의 진보정치에 재를 뿌리는 것이었다. 강조의 눈에는 천추태후가 목종을 억압하고 김씨 아버지의 아들이 왕이 되고 유행간 같은 인물이 위세를 부리는 것이 혼탁한 일로 비춰졌을 수도 있지만, 고려 왕조가 아닌 고려 백성의 시각에서 보면 그의 쿠데타는 시대를 퇴행시키는 것이었다. 왕권교체라는 결과를 초래해 역사적으로 크게 조명되고는 있지만, 역사발전이라는 잣대에서 보면 3류나 2류 반란으로 해석될 여지가 농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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