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강변에서 들어본 2030의 속내
[홍성식 기자]
▲ 후쿠오카 나카스 야타이 거리의 야경. |
ⓒ 홍성민 제공 |
낮의 역동성과 활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는 밤이 가진 안온함과 고요한 평화를 기다린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취향과 성정의 차이일 뿐.
내 경우엔 밤의 매력에 이끌리는 사람. 그래서다. 오래전 아래와 같은 시를 읽었을 때 잠시잠깐 가슴이 술렁였다.
시인 나희덕(57)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의 미지(未知)를 아래와 같이 노래한 적이 있다.
'우리는 어둠의 온도와 속도도 느낄 수 없지/알 수 없기에 두렵고 달콤한 어둠/아, 얼마나 다행인가/어둠이 아직 어둠으로 남겨져 있다는 것은.'
'어둠이 아직 어둠으로 남겨져 있는' 시간을 요절한 시인 기형도(1960~1989)는 "진짜 밤은 검지 않고 푸르다"라고 썼다. 비단 예술가인 기형도와 나희덕만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의외로 낮보다 밤을 사랑하는 인간도 많다.
2개월 전 늦은 휴가로 떠난 후쿠오카. 낮에는 신사(神社)와 도시의 랜드마크인 타워, 중세에 축조된 고풍스런 성(城), 세계 각국 여행자들이 휴양을 즐기는 해변을 찾아다녔다. 나쁘지 않았다.
후쿠오카는 낮 이상으로 밤 또한 좋았다. 세상사를 말없이 지켜보며 수천 년을 흘러온 강을 등지고 앉아, 이러저런 요리를 안주 삼아 술 한 잔 즐길 수 있는 서민적 공간이 있다는 건 '밤의 후쿠오카'가 지닌 매력 중 하나다.
후쿠오카를 찾는 관광객들이 '나카스 야타이 거리(中洲屋台街)'라고 부르는 곳을 4박5일 머무는 동안 매일 밤 갔다. 이지앤북스의 <일본 후쿠오카 여행>은 그곳을 이렇게 설명한다.
"밤이 찾아오면 긴 밤을 지키는 불빛들이 하나씩 밝혀져 도시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어묵, 꼬치, 라면, 만두는 물론 다국적 음식을 맛볼 수 있는 후쿠오카 포장마차 거리가 있다. 일본 내 가장 많은 점포를 운영 중인 후쿠오카는 '야타이'가 대규모로 정착된 유일무이한 도시다. 야타이는 후쿠오카 상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소박한 음식과 함께 즐기는 후쿠오카 밤의 낭만
▲ 후쿠오카의 번화가 하카타역 인근 풍광. |
ⓒ 홍성민 제공 |
▲ 대부분의 일본 요리는 정갈하고 깔끔하게 장식돼 있다. |
ⓒ 홍성민 제공 |
후쿠오카의 번화가인 하카타역 인근엔 일본인과 외국인 여행자를 대상으로 영업하는 식당이 수백 개다. 거기서 맛본 음식은 입보다 먼저 눈을 즐겁게 해줬다. 떼어 낸 새우의 머리와 조그만 나뭇잎이 그처럼 화려한 요리 장식 재료로 사용되는 걸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카스 야타이'라 불리는 술집은 노상에 늘어선 포장마차다. 화려함이나 정갈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야타이'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아볼까? 앞서 언급한 <일본 후쿠오카 여행>으로 돌아간다.
"야타이는 에도 시대 도쿄에서 생겨난 일본식 포장마차다. 1940~1950년 사이 경제 발전과 함께 전국적으로 붐이 일었다가 1964년 도쿄 올림픽과 함께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나 후쿠오카에서는 야타이 문화를 보호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현재는 후쿠오카시(市)로부터 허가를 받은 야타이만 운영된다. 야타이 문화는 후쿠오카에서 꽃을 피웠다. 일본 최대 야타이 도시답게 후쿠오카에는 나카스와 텐진 두 곳의 대표적 야타이 거리가 있다."
일본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코로나19 사태'를 혹독하게 겪었다. 그 영향 탓인지 한창땐 100개 넘게 운영됐다는 야타이 중 현재는 20~30개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럼에도 '포장마차'만이 줄 수 있는 낭만은 사그라들지 않아 보였다.
야외에서 오렌지색 전등을 밝히고 소박한 요리를 안주 삼아 옆 자리에 앉은 처음 보는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게 포장마차, 즉 야타이 아닌가. 한국이 그렇듯 일본도 그랬다.
그래서다. 하카타역 주변 근사한 식당에서 비싼 식기에 담긴 고급 요리를 먹는 것 이상으로 나카스 야타이의 요리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싸구려 플라스틱 접시에 담아낸 한국 돈 8천~9천 원짜리 명란 구이와 닭 꼬치도 맛있다는 이야기다. 제법 멀리 떨어진 화장실을 수차례 다녀오는 것도 귀찮게 느껴지지 않았을 정도.
▲ 나카스 야타이의 메뉴판. |
ⓒ 홍성민 제공 |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후쿠오카에 도착한 날. 가볍게 저녁을 먹은 후 강변으로 갔다. 숙소에서 가까우니 산책이나 해보자고 나선 길이었다. 그날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나카스 야타이'와 만났다.
명란 구이에 청주 한 잔을 주문하고 홀로 앉아 있는 기자의 바로 옆에 오사카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학생 넷이 왔다. 의도하지 않은 자연스런 합석이었다.
한국말을 못하는 일본 젊은이들과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한국의 중년. 그러니, 소통은 양측 모두 서툰 영어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후쿠오카만이 아니라 오사카에도 한국인 관광객이 많아서 번화가를 걷다보면 일본말보다 한국말이 더 많이 들린다', '나도 한국에 두 번 가봤다. 삼계탕이 맛있더라', '한국 걸그룹 멤버 중엔 일본인이 적지 않다'라는 것쯤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 플라스틱 접시에 소박하게 담아낸 야타이의 명란 구이. |
ⓒ 홍성민 제공 |
후쿠오카 여행 둘째 날과 셋째 날엔 서울과 여수, 대전과 청주에서 왔다는 한국의 젊은 여행자들과 대화하는 경험을 선물 받았다. 역시 나카스 야타이에서였다.
30대 초반인 남성들은 대기업과 독립 프로덕션에서 일한다고 했고,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스물네 살 여성들은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새내기 회사원이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밝고 환한 에너지가 부러웠다. 나 역시 그런 시절을 지나왔음에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역동적인 활기와 거침없는 웃음.
2023년을 사는 30대 한국 남성이 생각하는 결혼과 출산에 인식은 내가 청년일 때 느꼈던 것과는 크게 달랐고, 같은 회사를 다니면서도 50대 이상의 부장·이사와 함께 점심을 먹거나, 술 마시는 걸 꺼려하는 솔직한 이유도 들을 수 있었다.
20대 여성들이 바라보는 워라밸(work-life balance)에 대한 견해와 여행하는 인간으로서의 즐거움에 관해 들어본 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전화기를 가리키며 "내 엄마와 똑같은 핸드폰을 쓰시네요"라고 하길래, 모친의 나이를 물었다가 나보다 두 살이 적다는 답을 듣고는 잠시 서글퍼졌던 기억까지 웃음과 함께 남았다.
정보보다는 개인적 체험을 담은 '후쿠오카 여행기'를 쓰다 보니 다시금 조그만 배낭을 꾸려 낯선 도시로 떠나고 싶어진다.
다음 번 여행에선 어떤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맛보고, 어떤 낯선 사람들과 국적과 인종, 나이와 종교를 뛰어넘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이런 궁금증만으로도 벌써 설레니 "여행자는 몸은 집에 있어도 마음만은 언제나 길 위를 떠돈다"는 이야기가 생겨난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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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에 게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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