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싱잉 좀 하는 60대 언니, 박영순

배현명 2023. 11. 2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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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무대에서 재즈 한 곡을 소중히 부르는 과정, 그 자체가 내 삶의 틀을 깨는 일"

[배현명 기자]

 그가 고난의 역사를 자청하며 매주 재즈 클럽 무대에 오르는 이유는 뭘까.
ⓒ pixabay
 
일요일 저녁. 압구정역이 붐빈다. 삼삼오오 몰려든 젊은이들. 그 경쾌한 무리 속에 유독 영순 언니(가명)의 표정이 비장하다. 3번 출구를 빠져나온 그는 익숙한 듯 재즈 클럽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지금 그의 마음은 온통 가방에 든 재즈 악보를 향해 있다. 도전과 떨림이 청춘의 일이라면 영순 언니는 이 순간 그 어떤 젊은이보다 더 청춘이다. 재즈가 좋아 일요일 밤 클럽을 찾은 관객들 앞에서, 내로라하는 재즈 세션들과 호흡을 맞춰 노래를 불러야 한다. 심장이 두근댄다. 이럴 때 필요한 건 화끈하고도 경쾌한 자기 암시다.

'그래, 더 쪽팔릴 것도 없지 뭐!'

영순 언니는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가 풍성한 회색 머리칼의 숏컷과 빈틈없이 어울린다. 60대를 훌쩍 넘었지만, 그에겐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고수해 온 사람의 맵시, 흐트러짐 없는 일상을 살아온 사람 특유의 반듯한 몸가짐이 있다. 안정된 중년기를 누릴 것만 같은 그가 고난의 역사를 자청하며 매주 재즈 클럽 무대에 오르는 이유는 뭘까.

'틀을 깨는 뭔가가 있다' 

영순 언니는 초등교사였다. 발령을 받고, 결혼을 하고, 아내이자 엄마로 사는 순탄한 길인 줄 알았다. 하지만 홀시어머니와 도련님까지 한 지붕 아래 모시고 살아야 하는 며느리 영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마음이 부치고, 자주 체력이 달렸다. 결국, 그는 교직 6년 차에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한다. 해외 발령을 받은 남편을 따라가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종종 울컥한 마음이 올라왔다. 교직을 내려놓는 일은 자신이 일궈낸 모범적인 삶의 궤적을 뚝 떼 내어 반납하는 일이자, 온전히 영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포기하겠다는 선언 같았다.

하지만 차차 원망이나 후회의 감정도 아물어 갔다. 견뎌낸 세월 끝에는 잘 자라 준 두 딸과 그의 수고를 고마워하는 남편이 곁에 있었다. 영순 언니는 어떻게든 단단히 가정을 일궈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리고, 이젠 오롯이 자신을 위한 뭔가를 시도하고 싶어졌다.

"남편이 은퇴하고, 뉴타운에 자리를 잡았어. 두 딸도 출가했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사느라 못 키워본 화초를 길러보고 싶어서 식물 기르기에 관한 마을 강좌를 찾았지. 수업 첫날, 누군가 지각을 해서 헐레벌떡 내 옆자리에 앉더라고. 기운이 범상치 않은 거야. 괴물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는 친구인데, 이야기를 나눠보니 매력이 상당했어. 마침 자기가 단장으로 있는 마을 합창단에 노래를 부르러 가자고 하더라고. 그렇게 합창을 시작한 거지."

그렇게 영순 언니의 삶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졌다. 그가 자리 잡은 마을은 합창, 뜨개, 요가, 영문학 독해, 꽃꽂이 수업과 같이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서로의 재능을 나누고 배우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동네에 건강한 공동체가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은 좋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방증이다.

괴물이 매력적인 이웃이었듯, 그 자신도 합창단에서 충분히 호감을 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노래를 빼어나게 잘 부르는 것도 아닌" 그가 합창 단원이 된 지 1년 만에 회장을 맡아 살림을 살게 된 일을 설명할 수 없다. 영순 언니는 4년간 물푸레 합창 단원으로 무대에 섰다. 무음의 단정했던 영순 언니의 일상이 리듬과 선율로 꿈틀대기 시작했다.

"합창단을 하면서도 노래를 잘 부른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 합창은 함께 부르는 일이잖아. 그냥 나도 악보를 읽고, 화음을 넣는 일 정도는 할 수 있구나 했지. 그런데 어느 날 합창단에 다니는 연주(가명)가 그러더라고. 마을 카페에서 재즈 싱잉을 배우는데, 틀을 깨는 뭔가가 있다고."

'틀을 깨는 뭔가가 있다'란 말이 영순 언니의 가슴을 흔들었다. 작은 조약돌이 퐁당 던져진 곳에 동심원이 요동쳤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기반이 흔들리지 않도록 견고한 틀을 쌓고 애지중지 지키며 살아왔는데, 그 틀이 깨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돌연 궁금해졌다. 그 길로 '물푸레 재즈 싱잉 수업'을 신청했다.

"재즈 싱잉 수업 첫날, 난 내가 음치란 걸 알게 됐어. 합창단에서는 그럭저럭 악보도 잘 읽고 화음도 잘 내는 알토 보컬이었거든. 근데 재즈 수업에선 있는지도 몰랐던 음을 내보라 하더라고. 그 음이 도저히 불러지지가 않는 거야."

재즈 싱잉이 틀을 깬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첫날부터 그는 자신이 부를 수 없는 음정과 리듬이 있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머리를 띵하게 만든 건 선생인 말로의 존재였다. 말로는 우리나라에서 3대 보컬로 손꼽히는 유명 재즈 싱어이자, 한국 재즈 역사에서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 음악가였다. 재즈 뮤지션 말로가 구축한 음악의 세계는 누구도 쉽게 넘을 수 없는 벽 너머에 있었다.

하지만, 인간 말로는 스스로 그 벽을 허물었다. 그리고 누구나 닿을 수 있는 재즈 싱잉 유니버스를 만들어 마을 사람들과 음악을 나누고 있던 것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물푸레 재즈 싱잉 수업'도 벌써 10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스승 말로는 그야말로 틀을 깨는 삶의 본보기였다.

"아마 말로는 나보다 10살 정도 어릴 거야. 근데 나는 마음속에서 그이를 인생 선배로 깍듯하게 모셔. 배울 게 너무 많은 사람이거든."

주어진 악보를 거스르는 노래 
 
 영순 언니는 곧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믿어온 삶도 그저 스스로 써 내려간 악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 unsplash
 
위대한 영혼은 전염성이 강하다. 영순 언니의 인생은 서서히 스승 말로가 친절하게 안내하는 그 어딘가로 고개를 틀고 있었다. 그 여정은 익숙한 길 위에 단순히 재즈 싱잉을 더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의 풍경을 통째로 바꾸는 일에 가까웠다. 자주 쓰는 말도 바뀌었다. "꼭 그렇게 해야 해?"라고 저항하고, "이렇게 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라며 진보했다. 재즈는 결코 주어진 악보대로 불리지 않았다.

영순 언니는 곧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믿어온 삶도 그저 스스로 써 내려간 악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굳어진 관념들이 저돌적인 재즈 정신과 정면충돌할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수치심과 짜릿한 해방감을 동시에 느꼈다. 괴물에겐 너무 미안했지만, 더는 합창이 재미있지 않았다. 영순 언니는 이제 홀로 우뚝 무대에 설 용기를 내고 있었다. '절대 남 앞에 나서지 않는다'라는 평생의 철칙이 서서히 깨지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디바 야누스 무대에 섰던 날이 생생히 기억나. < Wave >란 보사노바 곡을 불렀는데, 너무 긴장해서 피아노, 베이스, 드럼 세션의 연주가 하나도 안 들리는 거야. 박자를 절고, 가사를 더듬거리며 어찌어찌 끝은 냈지. 근데 그 시간이 너무 부끄러워서 밤새 잠이 안 오는 거야. 꼬박 날을 샜어."

그는 첫 보컬 잼 데이 무대 후 잔뜩 주눅이 들었다. 열심히 재즈 싱잉 수업을 들었고 같은 곡을 수십 번을 넘게 연습했는데, 겨우 그 정도 실력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적잖은 나이에 남들 앞에서 뭐 하는 건지 무안하고 창피한 마음이 들었고, 출중한 프로 세션들이 아마추어인 자신을 위해 재능을 낭비했다는 미안함마저 들었다. 왜 이 험난한 도전이 계속돼야 하는지 스스로 이유를 찾고 싶었다.

"어느 날, 보컬이 아닌 재즈 뮤지션들이 디바 야누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걸 봤어. 악기가 아닌 마이크를 잡으니, 그들도 똑같은 아마추어더라고. 떨기도 하고, 어려워하기도 하고. 아, 저분들에게도 재즈를 부른다는 것은 여전히 노력이 필요한 일이구나 싶어서 다시 용기가 생겼어. 있잖아. 난 그냥 새로운 재즈곡을 배우고, 그 한 곡을 소중히 불러내는 과정에 만족하기로 했어. 그 자체로도 충분히 내 삶의 틀을 깨는 일이니까."

한 달에 한 번 재즈 클럽을 찾던 영순 언니는 이제 매주 보컬 잼 데이 무대에 오른다. 지난해부터 아주 서서히 빈도를 늘여서일까. 더는 남편도 일요일 밤마다 지하철 막차를 타고 귀가하는 육십 대 아내를 낯설게 보지 않는다. 이제, "일요일 밤은 온전히 그의 것"이다. 특유의 성실한 천성으로 쟁취해 낸, 진정한 일요 해방인 셈이다.

영순 언니에게 재즈 싱잉은 이전의 나보다 조금 더 나아지는 일이자, 여전히 부르고 있는 자신으로 존재하는 일이다. 커튼 뒤에서, 혹은 관객석에서 갈채를 보내던 과거를 뿌리치고, 과감히 스스로 무대 위로 끌어 올려 음악적인 시도를 이어가는 일. 그는 이 무모한 도전 때문에 끊임없이 무안을 당하고, 부끄러워 밤을 새우고, 더 잘하고 싶다고 욕심을 낸다. 어쩌면 영순 언니는 그림자로 살아온 지난 세월을 힘차게 거스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무대 위 그는 젊음과 생기로 빛난다.

"My funny Valentine...."

영순 언니가 떨리는 호흡으로 첫 소절을 내놓는다. 마이크를 타고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선명하던 시야가 아마득해진다. 저만치 멀어진 객석에서 엄마를 지켜보는 딸아이의 실루엣이 보인다. 영순 언니의 딸, 지아(가명)는 자신이 목격하고 있는 광경에 가슴이 벅차올라 목이 멘다. 지금껏 손바닥만큼 훤히 알고 있다고 믿었던 엄마라는 세계가 산산조각 부서지는 중이니까. 모든 위대한 영혼은 전염성이 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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