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거리고 헐거운 '더 마블스', 이래서 아쉽다

고광일 2023. 11. 2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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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더 마블스>

[고광일 기자]

 영화 <더 마블스> 스틸컷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우리가 사랑한 MCU의 슈퍼히어로들에게는 떠오르는 키워드가 하나씩 있다. 대표적으로 캡틴아메리카는 자신의 힘으로 쉴드를 해제시키면서도 자유를 지켰고, 군수산업체를 운영했던 아이언맨은 모든 과거를 책임지고 우주를 구했다. 철없던 왕자 토르는 결국 숭고한 희생을 거치며 진정한 번개의 신으로 각성했다. 기존의 영웅들이 퇴장하고 새로운 페이즈의 중심인물로 활약할 캡틴 마블의 키워드는 '정체성'이 아닐까.

<더 마블스>의 전작인 <캡틴 마블>에 대해 이동진 평론가는 이에 대해 '허락된 힘이 아니라 자각된 힘'이라는 평을 남겼다. 슈프림 인텔리전스(아네트 베닝)와 스승이었던 욘 로그(주드 로)에게 '제어되지 않는 힘을 통제해라', '감정을 다스리라'라며 가스라이팅을 당하던 캡틴 마블(브리 라슨)은 마지막 순간에 "너에게 증명할 것은 없다"며 일격을 날림과 동시에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원래 갖고 있던 모든 힘을 해방한다.

캡틴 마블은 전편을 통해 타고난 정체성에 대한 증명이 필요 없음을 확인했다. 다만 누구든 타고난 대로만 살 수는 없다. 정체성을 포기하라는 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조율할 부분들이 있다는 말이다. 캡틴 마블은 타노스와 일대일로 붙어도 쉽게 지지 않을 만큼 강력하지만, 독선적인 성향 탓에 어벤져스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했다. <더 마블스>는 이 독불장군 캡틴 마블이 모니카 램보(테요나 패리스), '미즈 마블' 카말라 칸(이만 벨라니)과 함께 어쩔 수 없이 팀을 이루며 시작한다.
 
 영화 <더 마블스> 스틸컷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희미해진 정체성과 확장의 실패

제국주의, 전체주의 성향을 띄는 크리 제국은 초지능을 가진 AI 슈프림 인텔리전스의 통제 아래 번영했다. 하지만 캡틴 마블에 의해 슈프림 인텔리전스가 파괴된 후 제국의 구심점은 사라졌고 내전이 발발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모성인 할라를 비추던 태양이 사그라들며 대기가 증발하고, 바다가 마르는 기후 위기 속에 몰락 중이다. 크리제국의 지도자가 된 다르벤(자웨 애쉬튼)은 캡틴 마블을 '말살자'라고 부르며 복수의 칼날을 간다.

AI의 통치에서 크리 제국의 주민들을 해방해 주겠다는 선의로 시작한 행동이었지만 캡틴 마블의 선택으로 또 다른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다르벤은 결국 캡틴 마블이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다. 모니카와의 재회를 꺼리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모니카가 블립을 당해 5년간 사라진 사이 모니카의 어머니인 마리아 램보는 암에 걸려 홀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절친의 죽음에도 캡틴 마블은 지구를 찾지 않았다. 어벤져스가 없는 다른 우주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이 아닌 이상 우주의 모든 사건을 해결할 수는 없다.

캡틴 마블이 자신을 증명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한계는 인정해야 했다. 선의의 행동이 어떤 파국을 초래할지 의견을 구해야 했고 그보다 앞서 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해야 했다. 타노스의 우주선을 파괴하는 힘과 동료들과 함께 타이밍 맞춰 줄을 넘을 넘는 힘은 분명 다르다. 에너지가 중첩되는 순간 셋의 위치가 바뀐다는 아이디어는 관객을 시각적으로 설득하고, 그녀가 차후 어벤져스를 이끌 리더로 성장할 첫걸음을 뗐다는 걸 보여준다.
 
 영화 <더 마블스> 스틸컷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하지만 캐릭터의 성장과는 별개로 캡틴 마블 시리즈에 기대하는 주제가 희미해진 것은 아쉽다. '정체성'이라는 키워드는 전작에서 보여준 페미니즘적 테마들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 닥터 스트레인지, 블랙 팬서처럼 일찌감치 단독 시리즈를 시작한 남성 히어로와 달리 MCU 최초의 단독 여성 주연 영화라는 정체성 탓에 캡틴 마블이 걸어야 할 길은 일방통행이었다(로맨스가 빠진 건 불행 중 다행이다).

4년이 흐르고 세상이 변했다. <블랙 위도우>를 시작으로 <완다비전> <미즈 마블>, <쉬헐크>처럼 여성이 주인공인 시리즈가 늘어났다. 가족, 사랑, 육아, 사춘기, 커리어, 연애 그리고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가질 듬직하고 개성적인 동료들이 생겼다. 캡틴 마블이 떠맡아야 했던 '정체성'은 이제 페미니즘에 국한된 게 아니라 무한한 확장성과 함께 현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공감대를 불러올 수 있는 주제다.

<더 마블스>는 이미 스크럴과 크리의 대립을 통해 난민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자유롭게 변신이 가능한 스크럴 족은 크리 족에게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는다. 정체성에 의한 편견과 제약으로 고통받았던 캡틴 마블이 두 종족 간의 갈등을 중재했다면 시리즈의 저변이 더 넓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다시 우주 난민이 된 스크럴이 뉴아스가르드로 피난을 가고, 늦게나마 크리의 태양을 되살리는 방식으로 격리하는 데 그친다.
 
 영화 <더 마블스> 스틸컷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MCU는 한번 더 캡틴 마블과 함께 간다

덜컹거리고 헐겁다. <더 마블스>는 MCU 영화 중 최소인 105분의 상영시간 동안 빌런과 세 차례나 전투한다. 미국 저지시티의 미즈마블, 대기권에 있는 S.A.B.E.R. 우주정거장의 모니카, 우주선을 타고 여러 행성을 넘나드는 캡틴 마블이 하나의 팀으로 융합되는 과정도 그려내야 한다. 그 사이에 캡틴 마블의 서류상 배우자이자 노래로 대화하는 물의 행성 아라드나의 얀 왕자(박서준)와 춤도 춰야 한다.

다르벤이 마음대로 열어버린 포탈을 타고 우주를 누비며 연달아 터지는 사건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모범답안이 실시간으로 제시된다. 맹렬한 악의를 지닌 막강한 빌런의 등장으로 관객과 함께 마음 졸이고 깊은 고민을 거친 해결 방법을 찾아내기도 전에 이뤄지는 속전속결 진행은 누군가의 말처럼 유튜브의 요약본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온다. 쉼 없이 시도하는 마블의 엇박자 유머는 잠깐의 몰입마저도 방해한다.

전작의 슬로건이었던 'Higher. Futher. Faster.'이다. 더 높고, 더 멀리, 더 빠르게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124분이 정복자 캉과 함께 개미 떼에 휩쓸려 버린 <앤트맨: 퀀텀매니아>, 161분을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주인공 소개에 낭비해 버린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와 달리 퀀텀 밴드와 멀티버스에 대한 미끼를 던지며 세계관을 다지는 MCU 장편 영화의 역할을 간결하고 성실하게 수행한다. <더 마블스> 슬로건에 추가된 'Together' 만큼은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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