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 복서의 마지막 승부, 200년 동안 회자된 이유
[김성호 기자]
격투기를 대하는 두 가지 시선이 있다. 하나는 인간의 원초적 투쟁심을 근간으로 스스로를 단련하여 나가 붙는 순수한 스포츠로 이를 바라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공식적인 틀 안에서 잔인하고 원시적인 싸움을 붙여 즐기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두 시선 모두에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격투기라는 이름이 그대로 내보인다. 격투기의 격(格)은 격식과 법도를 이야기하며, 투(鬪)는 말 그대로 싸움을 뜻한다. 여기에 기술이며 기예를 뜻하는 기(技)를 붙여 격투기라는 단어를 이루는 것이다. 말하자면 싸움은 싸움이되 기술을 단련하여 격을 갖춰 맞붙는 것이 격투기가 되겠다. 본질은 싸움이지만 규칙이 붙었으므로 더는 싸움에서 그치지 않는 것, 그로부터 기와 격이 가진 의미에 다가서는 것이야말로 격투기의 매력이 되겠다.
▲ 더 챔피언 포스터 |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
권투가 스포츠가 되는 순간
그렇다면 초기 격투기 종목은 어떻게 싸움으로부터 격투기, 또 무예의 경지에 이르렀을까. 영화 <더 챔피언>이 그리는 것이 바로 그러한 순간이다.
영화는 전설적인 복서 젬 벨처의 일대기를 다룬다. 흔히 복싱영화라 하면 누구나 <록키> 시리즈를 떠올리게 되지만, 이 영화의 실제 모델인 척 웨프너는 기라성 같은 복서들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선수였다. 51전 중 패배가 14패나 됐고, 타이틀을 단 한 번도 갖지 못했다. 당대 최강의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와의 대결을 모두가 피하는 와중에 타이틀매치가 성사됐고, 이 경기에서 15라운드까지 무수히 많은 펀치를 얻어맞으며 버티다 TKO로 패한 것을 실베스터 스텔론이 보고 영화화한 것이 <록키>의 모태가 된 것이다. 뒷 이야기는 영화팬을 씁쓸하게 하는 것들 뿐이므로 굳이 더 적지 않는다.
▲ 더 챔피언 스틸컷 |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
200년 전 런던에 전설적인 복서가 있었다
맷 후킹스의 관심은 이들보다 앞선 곳에 있었다. 복싱이 오늘날의 현대적인 스포츠로 거듭나기 전, 영국에서 내기스포츠로 서서히 시장을 만들어가고 있던 시절이 그의 눈에 들었다. 실베스터 스텔론이 <록키>로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자리매김했듯, 후킹스는 잊힌 복서 젬 벨처의 이야기로 그와 같은 길을 걷고자 했다. 제임스(젬) 벨처, <더 챔피언>의 주인공인 그를 스텔론이 그러했듯 후킹스가 직접 연기한다.
후킹스가 시나리오를 쓰고 다니엘 그레이엄이 연출을 맡은 <더 챔피언>은 19세기 초 영국 런던 복싱무대에서 화려하게 뜨고 진 챔피언 젬 벨처의 이야기다. 브리스톨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젬 벨처는 외할아버지(러셀 크로우 분)와 엄마(조디 메이 분), 두 명의 동생과 함께 살아간다. 할아버지는 종일 술을 마시거나 내기 복싱판에 나아가 싸우는 걸로 소일한다. 한때 대단한 주먹으로 소문이 자자했다는 할아버지지만 늘 취하여 뒷골목 싸움판에서 시간을 보내니 엄마는 젬이 할아버지와 어울리는 게 영 탐탁지 않다.
▲ 더 챔피언 스틸컷 |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
최연소 챔피언에서 몰락한 패배자로
이후로는 탄탄대로다. 젬은 엄마의 걱정을 귓등으로 흘리며 훈련에 매진하고, 마침내 런던에서 열리는 타이틀 경기를 치르게 된다. 모두가 챔피언의 희생양이 되리라고 가볍게 여겼던 그 경기에서 젬은 상대를 때려눕히고 챔피언이 된다. 서른일곱의 노장 잭 바르톨로뮤를 리턴매치 끝에 무너뜨린 것이다. 때는 1800년, 불과 열아홉의 어린 나이로 최연소 영국 챔피언에 오른 것이다.
귀족이 후원하는 복싱에서 최연소 챔피언이 된다는 건 대단한 인기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런던에선 브리스톨과는 전혀 다른 수준의 삶이 펼쳐진다. 화려한 음식과 술, 온갖 물건들이 전에는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예쁜 여자들을 거느리고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삶 가운데 젬은 조금씩 무너져 간다. 당대 최고의 챔피언으로 1805년까지 6년 간 챔프 자리를 지킨 그지만, 훈련을 게을리 하며 실력은 녹슬어 간다.
▲ 더 챔피언 스틸컷 |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
포기하지 않은 챔피언의 마지막 승부
그로부터 2년 뒤인 1805년 도전자인 헨리 피어스와 한 눈을 잃은 젬의 타이틀 매치가 펼쳐지기에 이른다. 경기는 무려 18라운드까지 가는 접전이었고, 이 경기 후반부는 이미 시야를 잃은 젬이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경기였다고 전한다. 18라운드에 마침내 쓰러진 젬의 패배로 영화는 예고된 결말을 맞을 밖에 없는 것인데, <더 챔피언>은 이로부터 전혀 다른 의미를 구해내기에 이른다. 바로 복싱이 싸움이 아닌 스포츠이며 예술적인 무엇에 다가서는 무예인 이유다.
젬은 이 경기로부터 6년 뒤인 1811년 30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한다. 이 경기에서 젬을 꺾고 챔피언이 된 헨리 또한 다시는 링 위에 서지 않고 은퇴한다. 영상도 무엇도 없이 오로지 그 경기를 직접 본 이들의 감격적인 표현과 기록으로만 전해지는 명승부는 두 세기를 건너 이렇게 다시 영화로 태어났다. 무엇이 그들에게 온 몸을 불살라 싸우도록 했을까, 또 이 싸움으로부터 그들은 무엇을 얻었을까.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더 챔피언>은 복싱이 오늘의 복싱이 되기 전, 처절했던 이들의 승부를 그린다. 그 본질이 오늘날 복싱에 얼마만큼 남아있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감상법이 될 테다. 역사엔 오늘을 달리 대하게 하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역사를 배운다는 건 그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젬의 이야기는 이로써 역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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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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