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처럼 고고하고 치열한 저항인 이달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좋은 자리의 높은 벼슬아치들
곳곳에서 만나는데
수레는 물같이 흘러가고
말도 마치 용과 같구나
장안의 길 위에서
헛되이 머리를 돌리니
그대의 집이 곁에 있지만
아홉 집이나 닫혀 있더라.
함께 글을 배운 옛날의 벗들이 높은 벼슬아치가 되어 지금은 다른 사람이 되었으니, 타고 있는 말과 수레부터도 그의 초라한 나귀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그러나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러한 외양의 차이가 아니라 정신적인 따돌림이었다. 옛 친구들의 집이 바로 옆에 있지만, 들어갈 수가 없다. 신분 차이뿐만 아니라, 그의 재주를 미워하고 질시하는 속물들이 냉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달은 아홉 겹이나 둘러싸인 대문을 두드릴 생각도 못한 채, 속절없이 발길을 돌리고 만다는 내용이다.
이달의 시에 <도룡진>이란 작품이 있다.
가을 강물은 급하게 흘러
용나루로 내려가는데
나루의 관리가 배를 세우고는
비웃다가 다시금 꾸짖는구나
서울에 드나들면서
무슨 일을 했길래
십 년이 넘어가도록
벼슬 한 자리 못 얻었는가.
이 시는 이달의 자기풍자인 동시에 해학이다. 한강 나루를 건너서 서울을 드나드는 자신을 보고 나루의 관리까지도 과거에 계속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여 비웃은 내용을 풍자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시가 의미하는 바는 벼슬을 못 했다는 데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떠돌아다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에 있다. 남들은 비웃지만 자신은 신념을 가지고 부끄러움 없이 방랑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내용이다.
이달의 자(字)는 익지(益之), 흔히 손곡산인(蓀谷山人)으로 불린다. 그의 출생 시기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언제까지 살았는지 자세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여기저기 문헌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선조 때 사람임이 분명하다.
이달은 고려시대의 문장가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의 후손이지만, 그의 아버지와 고을의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서얼이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대로 쓰여질 수 없는 운명을 타고 출생했다.
이달은 한동안 원주에서 살면서 그곳의 지명을 따서 손곡이라고 호를 지었다. 비록 서얼 출신이지만 아버지가 조정의 벼슬아치를 한 까닭에 집에 많은 책이 있어서 읽을 수가 있었다. 그는 천성이 총명하여 하나를 읽으면 열을 헤아리는 재주를 가졌다. 젊었을 때에 읽지 않는 책이 거의 없었으며, 또 많은 글을 지었다.
서얼 출신에게는 과거도 관직도 허용되지 않던 시대였다. 남다른 두뇌와 문재를 지닌 이달이 울분을 달랠 수 있는 길은 정처없는 방랑뿐이었다. 흔히 그를 김삿갓과 비교하는데, 김삿갓의 경우는 죄인의 자손이라는 죄책감과 할아버지를 비난했다는 부끄러움 때문이었지만, 이달의 경우는 서얼 출신이라는 제도의 얽매임이 이유의 전부였다.
이달은 떠돌이 생활로 울분을 달래고 시를 지어 세속사를 잊고자 했다. 최창경, 백광훈 등과 함께 어울리면서 서로 마음을 주고 즐기며 시사(詩社)를 맺었다. 이들은 이달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로서 당대에 소문난 지식인 그룹이었다.
조선왕조 시대 최대의 문인이자 저항아인 허균과 여류시인 허난설헌이 있기까지는 이달의 역할을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한마디로 허균의 반항과 자유정신은 이달에게서 연유한다. 서자 출신인 허균은 자신과 비슷한 배경의 이달에게서 학문과 비판정신, 불평등한 사회구조 등을 배웠다. 허균의 아버지가 당대의 재야학자 이달을 초빙하여 자식들의 교육을 맡겼던 데서 이들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이달은 허균의 영특함을 지켜보고 열심히 가르쳤다. 5년 동안이나 이들의 사제관계는 이어졌다.
이달의 시는 날로 명성이 높아갔다. 그의 이름은 온 나라에 알려졌고 또한 이를 귀하게 여겼지만, 반대로 그 인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얼이라는 것과 글재주를 시기하는 문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달은 세속적인 명예나 영달 따위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생애의 대부분을 전국 각지를 유람하는 방랑으로 보냈다. 성격이 호탕하고 세속의 예의범절 같은 것에 구애되지 않으면서 자유분방하게 보냈다.
일정한 직업도 없이 늙을 때까지 떠돌아다니며 음식을 빌어먹기도 하고 제문이나 부고 같은 것을 지어 주는 대가로 몇 푼을 받아 술을 마시며 살았다.
그러나 품격을 잃거나 매문하지 않는 고매한 방랑객이었다. 떠돌아다닌 그에게는 염문도 따랐다. 전라도 영광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이달은 한 아리따운 기생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기생이 자주빛 비단을 보고서 갖고 싶어하자 사주고 싶었지만, 그 값이 비쌌다. 이달은 시를 지어 그 지방 부자에게 보냈다.
중국 상인이 강남의 시장에서
비단을 팔고 있는데
아침 해가 떠오르며 비치니
자주빛 연기가 피어나는구나
아름다운 여인이 그걸 가져다가
치마 띠를 만들고 싶어하지만
주머니 속을 아무리 뒤져도
값어치 나아갈 돈량이 없네.
이 시를 받아 본 부자는 "이달의 시는 한 글자에 천금씩이나 값이 나가니 어찌 감히 비용을 아끼겠느냐?"라고 하면서, 글자 하나마다 각각 석 필씩을 쳐서 그가 구하던 것을 대어 주었다.
평양 북쪽의 선연동(嬋娟洞)은 옛부터 기생들의 무덤으로 유명하여 남성들이 "선연동 속의 혼이 되기를 바란다"고 부러워할 정도로 미인들의 무덤이 많았다.
어느 날 이달은 선연동을 찾았다. 때마침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물기 머금은 구름은 무덤 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아무 무덤이나 한 잔 술을 부어 놓고 시 한 수를 지었다.
모란봉 밑에 있는
선연동 골짜기에는
그 속에 미인들 묻혀 있어서
풀빛 언제나 봄과 같구나.
신선의 환술을
빌릴 수만 있다면
그 옛날의 가장 아름답던 이들
불러일으킬 수 있으련만.
그러나 이달은 정처 없이 떠돌면서 음풍농월이나 즐기는 한인(閑人)만은 아니었다.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로 백성들이 어떻게 어려움에 처하고 있는가를 살피고 분노를 시구에 담아 이들을 질타했다. 허균이 "시골집의 어려운 식생활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 같다"고 평가한 <동산역시(洞山驛詩)>도 궁핍한 시대의 민중의 실상을 노래한 내용이다.
이웃집의 젊은 아낙은
저녁거리가 없어서
빗속에 나가 보리를 베어
초가집으로 돌아오네
생나무는 축축해서
불길도 알지 않는 데
문에 들어서서 어린애들은
옷자락을 잡으며 우는구나.
이달이 죽을 때 남긴 것이라곤 '시인'이라는 이름뿐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하게, '무소유의 미학'을 즐기며 살아간 기인의 이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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